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참으로 많다. 어디는 사랑채가 너무 멋이있어 그곳을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는가 하면, 집 안에 자리한 정자의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어 몇 시간을 늘어지게 자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택들을 둘러보면서 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많은 글들이 올라오지만 정작 집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대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문은 집안의 귄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의 대문을 보면 그 집안의 내력을 대개는 이해할 수가 있다. 하기에 대문은 그 집을 돌아보는데 있어, 가장 먼저 만나게 되지만 그만큼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기도 하다. 어딜가나 만나게 되는 많은 고택들. 과연 그 대문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대문을 만나보기로 하자.

중요민속자료 제196호 충남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솟을대문은 위엄있는 사대부가의 상징


솟을대문이란 중앙에 높게 지붕을 올리고 그 양편을 낮게 만든 대문을 말한다. 이 솟을대문은 대문 양편을 얼마나 크게 조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의 내력을 가늠할 수도 있다. 대개는 지방의 세도가와 양반가의 대문에 즐겨 사용을 했으며, 솟을문 옆으로는 하인들이 묵는 문간채와 헛간, 마굿간, 광채 등이 함께 자리를 잡는다. 솟을대문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지 살펴보자.





맨 위는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소재한 충남 민속자료 제7호인 이삼장군 고택 대문이다. 이삼(1677~1735) 장군이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다. 이 대문은 기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옆으로는 하인이 사용하는 문간방을 들이고, 그 굴뚝을 대문 밖으로 빼냈다. 헛간과 마구간이 있는 비교적 단아한 형태의 대문이다.

두 번째는 충북 음성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의 솟을대문이다. 이 대문은 사랑채에서 내려다 본 안쪽의 모습이다. 김주태 가옥은 약 300년 전에 이익이 세운 집이라고 전하지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솟을대문은 마을의 길과 같은 높이로 놓이고, 대신 사랑채가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의 양편은 모두 광채로 사용을 하고 있으며, 밖에서 대문의 우측을 보면 쪽문이 있다. 즉 아랫사람들은 대문을 열지 않고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세 번째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26호인 김동수 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인 김동수 가옥의 솟을대문은 전국의 고택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큰 대문이다. 이 대문채에는 방과 광, 마구간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끝 부분은 꺾어서 ㄱ 자 형태로 꾸몄다. 김동수 가옥은 집 밖에 호지집이라고 하는 별채를 둘 정도로 지역에서 대부호로 꼽히는 집이기도 하다.

맨 아래는 경주의 독락당 솟을대문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계곡가에 자리하고 있는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독락당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를 말한다. 이 집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독락당의 솟을대문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저 중앙을 높이고 양편을 낮게 해 담을 판벽으로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솟을대문의 극치 함양 정여창 가옥



솟을대문의 극치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일두 정여창 고택(정병호 가옥)에서 만날 수가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3,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최초에는 17동이라고 전한다)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에는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초가가 정겨운 작은 대문

기와에 주로 나타나는 대문은 솟을대문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그 집의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가 뚜렷한 조선조에서는 이러한 대문의 형태가 곧 그 집안의 가세와도 관계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안과 관계없이 초가에 묻혀 세상을 살아간 반가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들은 대개 작은 일각문을 사용하는데, 기와집에서도 이런 형태는 보이고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48호인 정원태 가옥이 있다. 이 집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초가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갖고 있다. 그 사랑 옆으로 작은 초가로 이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 문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구실을 한다. 옛날에는 바깥 담장이 있고 그 곳에 대문이 있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현재 이 집에서 살림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이 초가 일각문이 대문이라고 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원태 가옥은 남도지방과 중부지방의 가옥의 형태가 습합되어 있다.


별다른 문이 없는 너와집

집은 여러 형태로 지어진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살고 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이 된 너와집이 있다. 굴피나무를 잘라 지붕을 인 이 너와집은 '느에집' 혹은 '능에집'이라고도 부른다. 이 집들은 따로 대문이 나 있지가 않다. 집 자체가 간단한 구조로 꾸며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화전민들의 집이기 때문에 집 안에서 모든 일을 다 보아야 한다. 그래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 자체가 대문의 역할을 한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어던 것일까? 솟을대문도 아니고, 기와나 와가의 대문도 아니다. 대문은 그 집을 드나드는 곳이다. 그 문으로 사람도 드나들고, 수 많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가고 나간다. 하기에 그 문으로는 그 집의 모든 복락이 드나드는 곳이라고도 한다. 전국의 많은 집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옥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집은 증평에 있는 연병호 생가이다.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자손들에게 남겨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다 쓰러져 가는 집 한채 뿐이다.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이 싸리문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이란 생각이다. 이 문은 평생을 나라만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난 연병호 선생이 드나들던 문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들. 그 문에는 제각각 그 뜻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온누리의 문화재 답사기가 영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해리티지 채널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답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도 역시 취재를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섭니다.
밤 늦게 돌아올 듯 하네요^^





해리티지 채널에서 보기


 이 영상은 오래전에 제작됐고

블로그에 올렸던 것을 다시 한 번 발행합니다

히기에 지금은 막아놓은 댓글을 당시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그대로 노출시킵니다

다힌 한 번 답사의 열정을 기억하고 싶어지네요  

 

정조의 백성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구조물

 

수원화성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현재의 장소로 옮긴 후 축성한 성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천봉하고 난 후 쌓은 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요, 후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축성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을 이곳에 주둔시켜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요새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20만 덩이의 석재,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6천주의 목재, 1845명의 장인이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시용하여 1794년부터 28개월 만에 완공한 자연친화적인 성이다. 수원화성은 성을 축성하면서 각 공사구간별로 책임을 맡은 모든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제작하여 성벽에 부착함으로써, 자신이 축성한 곳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누가 그곳을 책임지고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화성 시설물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어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시설물 중 연도와 굴뚝이 서 있는 곳이 있거나, 곳곳에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19일이 우수인데 16일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눈보라가 치는 날 수원화성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수문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지휘소 겸 인근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달문과 남공심돈·남암문(두 곳은 현재 유실되었다) 남수문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지만 남수문에서 동남각루를 항해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치는 중에도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각루는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함께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를 돌아보니 연도와 굴뚝이 보인다. 연도와 굴뚝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다. 동남각루를 돌아 뒤편으로 가니 아궁이가 있다. 수원천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울 것을 염려해 온돌방을 놓은 것이다. 이런 온돌방은 서북각루에도 굴뚝과 온돌방이 보인다. 수원화성의 구조물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들이 눈에 띤다.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동남각루를 지나 봉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보라가 더 심하게 친다. 며칠 안 있으면 우수인데 꽃샘추위인 듯하다. 항상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닥친다. 동삼치를 지나 공사 중인 동이포루를 지난다. 그리고 봉돈을 앞에 두고 밖에서 인을 들여다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 봉돈 안에도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창문은 까치살창을 내어 환기를 도왔다.

 

·포루 등을 거쳐 창룡문을 돌아본 후 동북노대를 지난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곳으로 동북노대는 동장대와 동북공심도 가까이에,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소재한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복노대를 거쳐 관람이 중지된 동북공심돈에 도착했다.

 

동장대인 연무대를 돌아본 후 동암문을 지나 높은 곳에서 군사들이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동복포루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기 때문인가?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동복포루 역시 높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인 동북포루는 정자와 같은 형태로 이층으로 올리고 아래편에는 군사들이 눈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이 공간은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비밀공간이기도 하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1794(정조 18) 10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역시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평소 같으면 꼼꼼히 돌아보아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인데, 눈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바람도 점점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거세진다. 더 이상 돌아본다는 것이 어려울 듯하다.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본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화성의 시설물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의 시설물들. 그저 겉으로 보고 걷기보다는 그 시설물에 얽힌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어보자. 정조대왕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기 때문에 그 시설물들이 한결 돋보이는 듯하다.

 

올 초부터 작정을 했다. 올해는 23일 여행을 계절별로 해보아야겠다고.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발목을 잡혀 제철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이번에는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짐을 꾸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생각 외로 짐 보따리가 묵직해 질 것만 같다.

 

23일 여행 채비를 하려고 준비를 해보았다. 그런데 꽤 소소한 것들을 많이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준비를 해서 여행을 떠나야 할까? 앞으로는 이런 준비물보다 더 소규모화가 될 수 있는 여행 보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앞으로 2~3년 안에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지금도 소형화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앞으로는 PC를 대신할 소형화된 제품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거기다가 카메라와 휴대폰이 서로 상응을 해 그 자리에서 바로 시진을 편집할 수 있고 글을 올릴 수 있다고 하니, 이렇게 번잡하게 준비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23일간 어디로 갈까?

 

긴 시간을 돌아볼 수가 없으니 피서 겸 그리 멀지 않은 곳을 택하고 싶다. 어차피 가까운 곳이라야 무슨 일이 있으니 바로 올라올 수 있는 곳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수시로 일이 생기다 보니, 어디 가서 진득하니 며칠씩 묵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하기에 가까운 곳에서 가고 싶었던 곳을 찾고 싶다.

 

 

그중 가장 바람직한 곳은 역시 강화도이다. 강화도는 거리도 가깝지만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도보를 이용하면서도 많은 문화재를 담아올 수가 있다. 거기다가 강화도에는 성곽까지 자리하고 있으니 금상참화가 아니겠는가? 예전에 전등사를 들어가면서 둘러본 성곽 말고도 또 다른 성들을 둘러보고 싶다.

 

강화도의 매력은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많은 고인돌들이다. 거기다가 해안가에 마련한 수많은 진들과 각종 문화재들. 또한 민속자료 등도 산재해 있는 곳이다. 아마도 23일의 일정으로는 강화도의 일부밖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을 돌아보고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 기고 싶은 곳은 판소리 발원지

 

이번 여행에서 두 번째로 가고 싶은 곳은 바로 판소리 발원지이다. 판소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동편제와 서편제만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中高制)가 있었다. 중고제는 한수 이남과 금강 이북의 지역인 경기 충청간의 소리이다. 송서율창이라고 하여 마치 선비가 달밤에 글을 읽는 듯한 소리라는 중고제의 지역을 찾아보는 것이다.

 

중고제 중 경기도의 소리인 경제는 여주 신륵사에서 득음을 한 염계달의 창법이다. 또 하나의 창법은 판소리사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3대 명창을 배출한 김성옥-김정근-김창룡, 김창진의 기문인 김문이다. 이들의 고향인 바로 강경 일끗리라고 한다. 그곳과 이동백의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희이산, 김정근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살았다는 서천군 장항읍의 빗금내를 돌아보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돌아오는 길에 부여 부소산성과 공주 공산성 등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의 백제의 흔적을 만나보고 싶다. 시간이 23일 밖에 안되는데 갈 곳이 너무 많아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곳 날을 잡아 준비 해놓은 짐을 들고 길을 나서리라 마음을 먹는다.

 

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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