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관음으로 유명한 낙산사 7층 석탑만큼 아픔을 바라본 석탑은 없을 것이다. 보물 제499호인 낙산사 칠층석탑은 원통보전 앞에 서 있다. 2005년 산불로 인해 원통보전을 비롯한 낙산사 일부가 불에 탈 때, 담장이 무너지고 원통보전이 전소되는 것을 앞으로 보면서, 그저 열에도 꿋꿋하게 지켜 낸 탑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탑을 볼 때마다 문화재이기 보다는, 한 시대의 아픔을 이겨냈다는 장인의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의상대사가 처음에는 조성을 할 때는 삼층이었다고 한다. 그 뒤 세조 13년인 1467년에 4층을 올려 현재의 모습인 칠층석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낙산사 칠층석탑은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6.2m의 높이에 비해 기단부가 좁기 때문이다. 삼층석탑을 4층을 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진 위는 이번 11월 14일 답사 때의 칠층석탑, 가운데는 지난 2006년 12월의 모습. 그리고 아래는 무너진 원통보전의 담장모습. 불에 탄 흔적이 보인다.
 

부분적인 손상 외에는 제 모습 지녀

일반적으로 석탑은 기단부와 몸돌인 탑 부분,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이 된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덮개석이나 탑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을 뿐, 상륜부 등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다. 기단부에는 정 사각형의 지대석 2매가 놓여있으며, 윗면에는 24판의 겹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양식의 특징으로 보인다.

낙산사 칠층석탑의 특징은 탑신부인 몸돌에 있다. 각 층마다 고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을 올렸다. 이는 간략하기는 하지만 조선조에 보이는 석탑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맨 위에 상륜부에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과 보륜 등으로 장식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모습들은 조선시대 다층석탑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탑을 볼 때마다 가슴이 허전해

불타버린 원통보전. 그리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담장. 낙산의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기와로 문양을 내고, 중간에 둥근 석재를 이용해 멋을 더했다. 그러한 아름다운 원통보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 만난 원통보전과 담장을 말끔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불이 원통보전을 태울 때, 그 뜨거운 열에서 칠층석탑이 온전하게 버티었다는 것이 장하기만 하다. 온 나라가 불이 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가슴 아파 할 때, 그래도 그 불길 속에서 남아있던 칠층석탑이다. 그래서인가 칠층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각별하다.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가 무너져 내렸다면, 아마 내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기단에 새겨진 화려한 연꽃 무늬와(위) 정비가 된 담장(아래).
그러나 무녀졌던 곳의 색이 달라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낙산사에 들려 칠층석탑을 바라보면서, 낙산사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운 생각에 부여안고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 생명도 없는 차디찬 돌에 대고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고 질문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의 탑이라도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온 열과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만들어 놓은 문화재들. 비록 그 돌과 쇠붙이에는 생명이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 장인의 혼이 그 안에 깃들어 있지는 않을까? 아마 하나의 문화재가 소실이 되고 훼파가 될 때마다, 숱한 조상들의 마음이 함께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낙산사 칠층석탑이 그저 돌을 쌓아 놓은 것으로 보이지 않고, 생명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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