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開心寺). 말 그대로 ‘마음을 여는 절’이란 뜻이다. 이 절에 가면 절로 마음이 열릴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 108배를 하면 마음이 열릴까? 아니면 도력 높은 스님의 법문으로 인해, 꽁꽁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릴까? 참 알 수 없는 절 이름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 절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전각들에게서,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 괜히 넋 나간 인간처럼 비실거리고 웃다가 보니, 절로 마음이 열렸다. 충청남도에 있는 절집 중 4대 사찰의 하나로 백제시대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개심사는, 처음에는 개원사였다고 한다.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 있어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에 소재한 개심사는, 아직도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있는 절이다. 현대의 대웅전은 성종 6년인 1475년에 산불로 소실이 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건하였다. 1484년에 중건한 대웅전이 아직 보존이 되어있으니, 대웅전은 53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고 있는 전각이다.

 

대웅전의 기단은 백제 대 것이라고 

 

보물 제143호로 지정이 된 대웅전은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인 대웅전 외에도 보물 제1264호로 지정된 영산회 괘불탱,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인 명부전, 충남 문화재자료 제358호인 심검당 및 아미타본존불, 관경변상도, 칠성탱화, 오층석탑, 경전 목판 등의 자료가 있다.

 

여름에 처음으로 만난 개심사

 

개심사는 벌써 4~5 차례나 찾았던 절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모두 가을이었다. 굳이 가을을 고집했던 것은, 가을이 참 아름다우 절이기 때문이다. 7월 28일(일), 이번에 처음으로 한 여름에 개원사를 찾은 셈이다. 개원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전에는 계단과 흙길로 오르막이었으나, 이번에 찾아가니 계단을 말끔히 정리하여 사람들의 보행에 편하게 해 놓았다.

 

해탈문서 부터 기둥이 틀어졌다(위). 종각 역시 마찬가지

 

절집을 찾아갈 때 바쁠 이유가 없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개원사였지만, 일행의 뒤에 쳐져 혼자 길을 걷는다.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고는 있지만, 빗방울 몇 방울 더 맞으면 어떠하랴. 계단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개심사가 보인다. 계단 끝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자란 배롱나무는 꽃이 지고 있다.

 

개심사 경내로 접어든다. 대웅전과 안양루가 남북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동서로 나뉘어져 자리하고 있다. 무량수각 뒤로 돌면 명부전이 있고, 그곳을 지나 산길로 오르면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나 이 절을 찾아가면 그리 마음이 느긋해진다.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까?

 

심검당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자연은 개심사 곳곳에 있다 

 

스님, 치목이 안 되었나 봅니다.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안양루 옆으로 작은 해탈문이 있다. 그 해탈문을 들어서다가 그만 웃고 만다. 괜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제 멋대로 구부러진 나무를 이용해 조성을 한 일각문. 스님이 치목을 하기 싫으셨을까?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갖다 맞추신 것일까? 일각문의 묘한 생김새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종각의 기둥들도 제멋대로다. 얼마나 자연스런 스님이 머물다 가셨기에, 자연 그대로를 이렇게 기둥으로 사용을 하셨을까? 심검당의 배흘림 기둥도 눈길을 끈다. 심검당 한 편으로 돌아가니 이 곳 기둥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생각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틀어짐의 압권인 전각(위) 과 명부전도 틀어지기는 마찬가지

 

무량수각 앞에서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난 뒤, 무량수각을 지나 명부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예스런 전각 하나가 서있고 앞에는 사람들이 담소를 하고 있다. 이 전각의 기둥 역시 제멋대로이다. 개원사의 스님들은 나무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치목을 하지 않으셨을까?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어?

 

명부전 앞을 지나치려는데, 삼사순례를 도는 일행들이 명부전에서 나온다. 잠시 안을 향해 합장을 한다. 명부전 기둥 역시 뒤틀려 있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을 걷는다. 몇 해 전인가?, 가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단풍이 떨어져 만든 아름다운 관경이 눈에 선하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는데. 산신각 앞에도 무리가 지어 있다.

 

 

일행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돌아가려면, 어디를 들어가 제대로 108배 한 번 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혼자 호젓하게 길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그저 108배를 하던지, 아니면 피곤한 다리를 쉬던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서이다.

 

비바람에 산신각의 기왓장이라도 날아갈까 봐 그랬는가? 끈으로 묶어 놓았다. 산신각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전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산신각에 무슨 까치살창이 있지’. 이런 것은 부엌이나 광에나 사용을 하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개심사라는 이절, 하나도 정해진 틀이라는 것이 없다.

 


 2007년 11월 11일 단풍이들고 낙엽이 가득한 깊은 가을의 개심사 모습입니다


 

“스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하나같이 제멋대로입니까? 그래서 닫혔던 마음이 비틀어진 기둥사이에 난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빗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이 절에서 스님 덕분에 마음을 열고 갑니다.”

풍남문은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남문시장 인근에 자리한다. 이 풍남문은 보물 제308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전주읍성의 남쪽 문에 해당한다. 읍성이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곳으로,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하는 것이다.

 

풍남문은 선조 30년인 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인 1734년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고 불렀다 한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명칭은 영조 43년인 1767년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인 1768년에 풍남문을 중수하면서 붙인 것이다. 풍남문은 조선조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현재의 풍남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특별한 기둥의 수법이 뛰어나

 

풍남문의 규모는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어졌고, 2층은 정면이 3칸인데 비해 측면은 1칸이다. 이렇게 갑자기 이층 누각이 줄어든 것은 1층 안쪽의 기둥을 그대로 이층까지 올려 모서리 기둥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둥을 사용하는 수법은 우리나라의 문루 건축상 매우 드문 형태이다.

 

풍남문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짠 장식은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계로 구성되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해태 등 동물들을 장식한 것도 풍남문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풍남문의 부재에 사용된 조각이나,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로 보아 풍남문의 건립년도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견고한 성곽, 수원 화성을 닮아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화성을 축조하고 난 뒤, 우리나라의 모든 성곽은 화성을 기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풍남문과 연결이 되는 전주읍성의 경우에도 문을 받치고 있는 아랫부분의 성곽을 보면, 화성도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문루에는 성 안쪽으로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 적고 있으며, 성문을 에워싸고 있는 옹성 쪽인 성 밖으로는 풍남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성을 쌓고 있는 돌은 서로 귀퉁이를 깎아내 엇물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곽을 더 견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며 밖으로 옹성이 보인다. 옹성 한편에만 출입구를 내어 적이 공격을 할 때 어려움을 겪도록 만들었다. 옹성은 문을 위주로 둥글게 반원으로 꾸며졌으며, 옹성 위에도 길을 낸 후, 여장을 쌓고 총안 등을 내어 내외의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문은 두꺼운 철판을 입혀 적이 공성무기나 불 등으로 공격을 해도 잘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은 전주 남문시장과 접해있어 풍남문을 주위로 원을 그리며 많은 차량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성벽은 중앙에 문루를 중심으로 양편에 포 등을 설치한 치와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있다. 양편으로 성곽이 연결되어 있던 부분인 듯하다. 성안에서 양편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으며, 좌측 위에는 포가, 우측 위에는 종이 달려있다. 위를 올라갈 수가 없어 이 종이 정확하게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어디나 그러하지만 문화제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곳을 출입하기가 쉽지가 않다. 풍남문도 위로 오르는 계단에 출입통제 목책을 세워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위편을 찍으려면 아무래도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길이 무조건 문을 잠가버리는 것만이, 최고의 보존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8) - 서장대와 서노대

화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화성장대’라 불리는 ‘서장대’이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서장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사면팔방으로 모두 통하는 곳이다. 석성산의 봉화와 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는 곳이다.


서장대, 한 때 어느 취객에 의해 웅장한 서장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 문지방 위에는 정조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인 [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정조 이산의 꿈은 무엇일까?

정조임금은 이 장대에 올라 장용위 군사들을 호령했다. 이산은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갖고 북진을 하여, 옛 고토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장대 위에서서 사면팔방을 바라보면서, 막힘없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무한한 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엮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깃든 이산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난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정조임금의 꿈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저마다 큰 꿈을 키워나갈 수가 있을 텐데. 늘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장대에는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받치었고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척 5촌이다. 위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층의 반자가 되었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다연발 화살을 쏘아대는 노대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척 5촌,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척 5촌, 높이 12척,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凸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




고 하였다. 장대 쪽으로는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부를 둘러 총안을 낸 여장을 둘러놓았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돌을 깔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쇠뇌를 쏘았을 것이다. 쇠뇌란 다연발로 발사하는 화살을 말한다. 쇠로 된 발사 장치를 갖고 있는 이 쇠뇌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임금 이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정조는 더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군사들의 위용을 보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이산의 꿈을 지금 이 땅의 젊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철모르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연인이 조금은 아쉬운 까닭이다.

남원시에 소재한 광한루원. 명승 제33호인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마도 남원을 들렸다가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의 장소로도 유명한 광한루.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부른 후 ‘광한루’라고 광풍루를 고쳐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볼거리가 많은 광한루원

광한루는 누원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넓지 않은 루원 앞으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답다. 광한루원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그 앞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완월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정자는, 지상에서 달을 보기 위한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있는데, 아름다운 선녀들이 달나라의 궁전이라는 ‘계관’에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전을 닮은 광한루를 세웠으며, 완월정은 그 달 속에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겹처마 팔작 오방집인 완월정

완월정은 오방집이다. 오방집이란 네모난 집의 한편을 돌출시켜 오방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겹처마 팔작의 조선식으로 누각을 마련하고, 그 뒤편을 연못으로 돌출시켜 오방집으로 꾸몄다. 완월정은 작은 인공 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을 물이 에워싸고 있으며, 작은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중층 누각으로 조성을 한 완월정은 양편으로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꺾인계단을 놓았다. 위로 오르면 누각 뒤편을 밖으로 돌출시켜 높임마루를 깔았다. 양편으로는 게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다. 11월 6일 찾아갔을 때는 붉은 단풍이 완월정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완월정을 바라보아도 아름답다. 가을의 완월정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계단을 내려 누각 밑을 들여다본다. 굵은 원형기둥의 밑에는 자연 그대로인 덤벙주추를 놓아, 자연스러운 멋을 더했다.

완월정, 지금 그대로가 좋다

완월정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붉은 단풍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부서진다. 음력 5월 단오가 되면 춘향제가 열린다는 완월정. 아마도 그 어떤 누각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쳤을 때 이곳 완월정에 올라, 멀리 지리산 위로 솟는 달을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모든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다시 한 번 완월정 계단을 밟아본다.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천상의 선녀가 보이지 않아도, 이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광한루원에는 광한루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단풍들이 명을 다하지 못하고 스러져 간다. 그런 단풍들이 아쉬워 연일 단풍을 보려는 사람들로, 단풍이 절경이라는 곳은 만원이란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자리한 상왕산 개심사. 가을 단풍이 그리운 사람들에게는 제몫을 다하고 있는 곳이다. 일주문에서 돌로 만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발밑을 간질이는 낙엽들과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단풍, 붉다고 단풍은 아니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단풍이다. 개심사의 단풍은 바로 그런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다. 개심사는 백제 때의 절이다. 혜감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개심사는, 대웅전 기단이 백제 때의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조 성종 6년인 1475년 소실이 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건한 것이다.


깔린 단풍을 밟고

일주문을 지나 상왕상 개심사로 가려면 10여 분을 걸어야 한다. 오르는 길에 만나는 돌계단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 바로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때문이다. 지천으로 깔린 낙엽이 이리저리 뒹굴면서 발아래서 소리를 낸다.

주변은 온갖 색을 자랑하는 단풍들이 들어차 있다. 천천히 가을을 느끼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입구에 들어선다. 연못 가운데로 난 길을 걸으면 별천지다. 그래서 가을에 개심사를 찾는 사람들은, 또 다시 다음을 약속하는가 보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이 된 대웅보전은 백제 때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주변의 단풍과 어우러져 또 다른 가을을 이야기한다



자연을 닮은 개심사


개심사가 좋은 것은 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심검당과 종각, 무량수각의 기둥들을 보면 제멋대로다. 굽어진 나무들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도 뒤틀림이 없이 버티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자연의 조화다. 자연 그대로를 사용한 전각들이 있어 개심사의 가을이 더 아름답다


어디를 가도 낙엽이 그대로 쌓여있다. 치우지 않은 낙엽이 있어, 개심사의 가을이 더 풍성해 보인다. 명부전을 지나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에 보면 환상적인 낙엽 길을 걷게 된다. 누가 이 아름다운 자연을, 둔한 머리로 표현을 할 것인가?



널브러진 나무가 하나 누워있어 마음이 편해진다. 만일 저 나무를 누군가 치웠다면 이리 아름다운 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을. 멋대로 놓아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치장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마음대로 놓여있는 것들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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