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금암동 고인돌군, 사적으로 지정해야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은 바위가 많아 ‘묘바위’, ‘검바위’, ‘금암’ 등으로 불렀으며, 이곳에는 모두 11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그 중 9기의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고인돌에 파인 성혈, 쇠붙이로 조형한 듯해
고인돌 덮개돌의 윗면에는 수직으로 파인 알구멍(=성혈(性穴))이 있다. 금암동의 고인돌 중에서 2호 고인돌에도 성혈이 나 있는데, 구멍의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산시 금암동에 분포한 9기의 지정 고인돌은 금암동 일대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와 논에 분포하고 있던 것을,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 중에서 덮개돌만 땅 위에 올려놓은 것을 개석식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금암동의 고인돌 군이 바둑판식이라고도 하지만(문화재청 설명) 이곳의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으로 보인다. 덮개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6m에 이른다. 각 덮개돌의 둘레에는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공원으로 조성한 금암동 고인돌군
5월 2일 찾아간 금암동 고인돌 무리.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바위 위에 조성한 한 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6호 고인돌은 바위 위에 커다란 덮개돌 하나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화강암 계통의 장방형 돌로 조성한 덮개돌이다. 그 곳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제5호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5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두 조각으로 깨어져 있고, 돌의 형태는 장타원방형에 가깝다. 그곳에서 고인돌 무리가 모여 있는 아래편으로 내려가면, 여러 기의 고인돌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 중에서 경사가 완만한 비탈에 놓여있는 4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장방형에 가깝고, 덮개돌 남쪽과 동쪽 부분의 단면을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 금암동의 고인돌 무리군에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있으며, 7기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다.
사적 지정 서둘러야
고인돌군이 펼쳐진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어, 학생들이 찾아와 고인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와 모양, 분포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명판을 붙여놓은 구조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운동을 하면서 걷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군이 펼쳐진 동편으로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마을을 위하는 돌이라고도 한다. 모두 9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자리를 하고 있는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군. 현재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개석식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사적’으로 지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요천 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금수정은 바람가에 서 있어
앞으로는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이 흐르고, 뒤로는 금암봉이 솟아 있다. ‘금수정(錦水亭)’은 그렇게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요천을 바라보면서 금암봉을 오르는 중턱에 자리한 정자 금수정. 말 그대로 물 맑고 산세가 수려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이다.
남원 광한루원에서 요천을 가로지르는 승사교를 건너면,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 계단이 끝나는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금수정이 있다. 금수정은 1936년에 이현순, 조광엽, 서봉선 등이 주축이 되어,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세월이야 그렇게 물 흐르듯 70여 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새롭게 단청을 한 정자는 갓 조성을 한 것처럼 보인다.
남원 요천 가에 서 있는 금수정과 정자 안에 걸린 퍈액
비안정은 사라지고 금수정이 자리 잡아
금암봉이란 이름은 요천의 물가에 커다란 반석에 붙인 이름이다. 족히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인데, 주변 경관이 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천렵을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용성 팔경 중에는 ‘금암어화(金岩漁火)’라고 하여, 밤에 고기를 잡는 불빛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비안정은 요천가 금암봉 아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의 금수정 인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금암봉의 부근에는 비안정, 혹은 비오정이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이 정자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란 생각이다. 옛 시구에는 이 비안정에 대한 글이 보인다.
금암봉을 오르는 나무계단과 정자 앞으로 흐르는 요천
사방 십리에는 저녁 안개 피어나고
소나무 대밭 속에 작은 정자 하나.
필마로 찾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고
외로운 여정 속에 새벽에야 닿는구나.
오작교 가로질러 광한루에 당도하니
교룡산을 둘러싼 옛 산성이 보이네.
이곳에서 그대와 노년을 마칠까
늙어 요천가에 낚시나 드리우세.
광해군 1년에 공조참판을 지낸 현곡 조위한의 시이다. 조위한은 글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주생면 제천리에 도산정을 건립하였다. 이렇듯 요천가에 서 있었던 비안정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 빠짐이 없었나 보다.
아름다운 조각과 단청
금수정은 민족정신이 깃든 정자
금수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1935년에 조정훈이 썼다. 조정훈은 남원 광한루의 ‘호남제일루’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금수정을 지을 때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이 한창 펼쳐졌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금암봉 정상에는 남원의 신사가 세워졌는데,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 이곳에 정자를 새웠다고도 전한다. 즉 이곳에 금수정을 짓고 신사참배를 하러 간다고 오르다가, 이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이다.
정자는 주심포계로 배흘림기둥을 놓았다. 연등 천정에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밖으로 내어돌렸다. 당시의 정자치고는 상당히 화려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아마 신사보다 더 잘 짖겠다는 마음이 정자에 배어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는 요천과 교룡산성, 그리고 광한루원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금수정 현판과 벼랑 위에 선 금수정
가파른 절벽에 앞으로 기둥을 내어 정자를 내어지었다. 이 정자에 올라 시 한수 읊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가신 것은 아니었을까? 요천 물가에 한 다리를 들고 서있는 새 한 마리가, 무엇인가를 잡았나보다. 큰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간다. 그 새 등에 마음을 실어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마 그런 마음들이 금수정을 이곳에 지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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