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 일대와 주암리 뒷산인 옥녀봉. 그리고 서원리 뒷산을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은 굴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상교리 뒷산인 우두산에 만도 어림잡아 40~50여개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굴은 자연적인 굴이 아니다. 모두가 일제에 의해서 파여진 인공적인 굴이다. 굴 중에는 군인들에 의해서 군 작전상 막아놓은 것들도 있다.


굴은 대개 땅을 아래로 파 들어가 그곳부터 옆으로 굴착한 것들이 있고, 처음부터 암벽을 평행으로 파 들어간 것 등 다양하다. 이 굴들은 주변에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인데, 깊은 것은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굴들을 이곳 여주군 북내면 일대 산에 뚫어놓은 것일까?


금광채취를 위해 뚫어놓은 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즘골 뒤 우두산.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금광이 있었다 

다음지도에서 본 금광굴이 집단으로 있는 위치

옥녀봉 방향 뒷산은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할 수없이 북내면 상교리 ‘즘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즘골이란 예전에 가마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눈길은 아무래도 위험할 듯 해, 카메라를 소지하고 오르기를 포기했다. 우두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쌓여있는 낙엽과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엔 새들이 앉아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시끄럽다. 눈이 녹은 나무 밑에는 한겨울을 보낸 영지버섯 하나가 추위에 떨고 있다. 생명의 끈질김을 본다. 눈길에는 고라니를 비롯한 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있다. 낮에도 사람의 발길에 놀란 고라니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으로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산 중에 축대를 쌓은 듯한 돌담들이 보인다. 잘 다듬어진 돌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집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서 파 놓은 굴 옆에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축대가 있다. 금광을 채굴하던 사람들이 묵었던 막사를 지었던 곳이었나 보다.



산으로 오르다가 보면 집터인 듯한 곳이 보인다. 주추돌인 듯한 돌들과 축대가 있다.

한 때는 60호가 넘는 집들이 있던 곳


즘골의 뒤편에 있는 우두산은 ‘소머리산’이다. 이 즘골로 들어가는 곳에는 유난히 소를 키우는 목장이 많다. 현재 즘골에는 16호 정도의 집들이 있다. 하지만 금광을 한창 채굴 할 당시에는 60여 호나 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캔 광석을 잘게 부수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 와서 채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우두산은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산은 명산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우두산은 가히 인재를 키워낼 만한 산이었기에, 인근에 ‘고달사지’가 자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우두산이 일제강점기에 무수히 파 놓은 굴로 인해, 그 명산의 혈이 모두 끊겨버렸단다. 그래서 즘골에는 인재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금광굴의 흔적. 이 사진들은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하였다.

가시지 않는 상처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무수히 많은 굴들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한다. 산 중에 축대를 쌓고 관리를 하는 집까지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금이 묻혀있었던 것 같다. 산 위에도 여기저기 예전 집터가 보인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와 재화를 찬탈해간 일제. 그런 점도 마음이 아픈데 이런 흔적들이 전국에 수도 없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야 하다니.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려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어르신들조차도 “죽어도 그 원수는 갚아야 혀. 너무 많이 고통을 받았어. 우리 민족들이” 라고 분노를 표한다. 산을 내려오는데 철모르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지만 남은 오동나무가지를 쪼아댄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난 야생동물이 지나다닌 흔적과 영지버섯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