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인취사. 인취사 극락전에는 조선시대의 아미타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5호 아산 인취사 석조 아미타삼존불상은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에는 관음보살이 우에는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는 삼존불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좌상은 선정인으로서 결가부좌하였으며, 육계가 크고 나발이 선명하고 오른팔에 편삼을 걸친 변형 통견식 법의로서, 아미타불의 전형적인 수인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본존과 같은 착의법을 하였으며, 보관정면에 아미타불좌상의 화불을 조각하여 관세음보살임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우측의 지장보살상은 고려후기에 유행했던 피건을 두른 모습으로서 무릎위에 올린 두 손에 보주를 잡고 있는 형태이다. 삼존불 모두 둥글고 작은 얼굴로서 형태가 비슷한 데 눈, , 입이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모습으로 지방적인 요소가 강한 표정을 보이고 있으며,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법흥왕 때에 창건했다는 인취사

 

인취사는 신라 법흥왕 때에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눈이 쌓여 있는 날 찾아갔던 인취사. 그리 크지 않은 인취사 경내는 온통 흰 눈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겨울에 사찰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 절을 올라갈 때 한참을 걸어야한다면 바람과 미끄러운 길로 인해 애를 먹기도 한다.

 

인취사 경내에 들어서면 앞으로 탁 트인 전망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극락전에 들려 참배를 한다. 고려 말부터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은 민초들은 이승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관세음보살과 저승의 지옥에서 건져준다는 지장보살을 좌우협시불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삼존불의 형태를 알 수 있어

 

이 인취사 석조아미타삼존불상은 조선시대 아미타삼존불의 시원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금으로 채색을 하여 석조불의 느낌은 제대로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뿌듯하다. 오랜 시간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불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인취사는 절에 내력에 대해서 전하는 바가 없어 일설에는 고려 때 창건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수많은 절들이 임진왜란 등 전화로 소실이 되면서 기록이나 문화재들이 소실이 되었다. 거기다가 수탈까지 해간 것들이 상당히 많은 양이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재는 양으로는 많다고 하지만 질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한다.

 

 

문화재란 단순히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과 습속, 그리고 환경까지도 알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들이 훼파를 당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거기다가 종교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문화재 훼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문화국민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눈길을 걸어 올라간 아산 인취사. 절 경내는 눈이 치워졌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그저 한가롭게 널찍한 경내를 돌아보면서 극락전에서 만난 강한 인상의 삼존불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자세한 창건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 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찰들은 저마다 계절별 아름다움이 있다. 절이라는 곳이 사시사철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은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무량사는 겨울에 특히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고찰이다. 무량사는 사실 우리소리문화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운 곳이다.

 

 

2층으로 지은 불전 무량사 극락전

 

무량사의 중심건물은 보물 제356호로 지정이 된 무량사 극락전이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은 2층 불전으로,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정면이 3,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 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불교 건축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배흘림기둥과 활주가 고풍스러워

 

무량사 극락전은 이 사찰의 경내가 극락세계임을 뜻한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뒤 인조 11년인 1633년에 중창하였으며,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이다. 무량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의 전각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2층 불전으로 지었으며,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 주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겉에서 보면 2층집이지만, 내부는 통으로 되어있는 이러한 불전은 오층 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과,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화엄사 각황전이나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도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다. 이 불전들은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극락전의 기단은 장대석 세벌대로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배흘린 원형기둥을 세워놓고, 1, 2층 모서리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놓았다. 아래층 문살은 가운데가 네 짝이고 점차 두 짝, 한 짝씩으로 줄었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아냈으며, 2층 정면도 원래는 살문을 달아있다고 한다. 이는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마련한 것이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동양 최대의 소조삼존불을 모셔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1565호인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이 심존불은 흙으로 빚어 조형한 것으로 동양 최대의 삼존불이다. 중앙에 좌정한 아미타불은 높이 5.4m이며, 양쪽에는 높이 4.8m의 관세음보살과 역시 4.8m의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두고 있다.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삼존상은,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특히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1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월 6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규모가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지난 410일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아직 이른 철이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주변에는 산수유가 망울을 터트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재 중 아름다운 전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봉암사 극락전을 말한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전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봉암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기도 하다.

봉암사 극락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이다. 지증국사가 봉암사를 창건하면서 지어진 건물로, 지어지고 난 후 80년이 지나 봉암사의 많은 전각들이 화재로 모두 소실이 되고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대사가 봉암사를 재중창 하였으나, 임진란을 거치면서 일주문과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경순왕이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한 극락전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에,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옥개석을 보수 한 듯, 망와에는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봉암사 극락전은 얼핏 보면 중층으로 지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층 몸채에 차양 칸을 둘러 마치 중층 같은 외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6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봉암사를, 하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봉암사는 공양대접을 하는 사람들도, 3시간 이내에 사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면 경내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에는 조금은 버거울 듯해, 걸음을 바삐 해야만 했다.



탑처럼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봉암사 극락전. 현재 보물 제15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은 기단부의 상, 하 갑석을 면석으로 처리를 하고, 기단의 바닥은 장방형 판석으로 깔았다. 원형의 주추는 잘 다듬은 원형의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외진주 12본과 내진주 4본으로 중층 목탑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삼면에 문을 낸 극락전, 궁전의 천정과 같은 아름다움

중앙에 마련한 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의 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전면의 문은 세 짝문을 내었으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뒤편으로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를 해,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 측면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내출목의 상단에는 장혀를 올리고 상벽을 구성한 후, 외진으로 17개의 우물을 돌려 궁전천정을 연상케 한다. 천정의 중앙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불단은 간략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이 돌로 만든 장식을 올려놓았다.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봉암사 극락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그리 흔치가 않다. 봉암사를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란 생각인데, 거기다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까지 볼 수 있다니.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전국을 다니며 문화재를 답사한 것에 대한 보답은 아니었을까?


극락전을 뒤로하고 삼층석탑으로 향하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언제 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를 모르니.

문경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산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지증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이 날개를 쳐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흐르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절을 지었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 한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을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절집 안 땅을 밟기도 송구스럽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30분경.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안거 중인 스님들께 ‘스님짜장’보시를 하러 왔으니 어찌하랴. 닫힌 산문이 열렸다. 버스로 구불거리는 길을 들어간다.

경내로 들어가니 절 입구에는 통행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안거 중인데도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다. 마당을 둘러본다. 조그만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다. 세속에 묻힌 때를 갖고 이곳 땅을 밟기조차 송구스럽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공양간으로 옮겨 놓고 절 경내를 돌아본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진 널찍한 돌들. 그저 앉으면 자리가 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다 못해 푸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한 물소리가 암반 위를 흐르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길가에 놓인 이끼가 가득한 돌. 그대로 자연이다.

돌아다니기조차 죄스럽다. 정말 조심스럽게 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수행으로 인해서 인가보다. 봉암사 안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도 죄스럽다. 오늘따라 셔텨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린다. 금색전 쪽으로 지나다가 보니 입구 한편에 기와조각, 돌들이 모여져 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놓아두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이 빈틈없는 봉암사 경내에서 돌절구 하나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정감이 간다. 아마도 마음에 한 점 여유를 느끼고 싶으셨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썩으니, 일부러 쓰러트려 놓았다는 것이다. 수행자와 속인의 느낌의 차이인지. 봉사도 정해진 시간 안에 산문을 나가야 된다는 봉암사. 3시간의 짧은 머무름 속에서 그래도 볼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깊숙한 곳은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길가에 놓여있다. 바위 하나도 자연이 되기싶은 곳이다. 전각 입구에 놓여있는 돌들. 돌맹이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경내이다. 돌절구 하나가 쓰러져 있다. 봉암사에서 본 마음의 한자락 여유이다.  




봉암사의 전각들.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맨 아래 극락전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를 모셔놓은 전각(문화재에 대한 글을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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