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못 받는 정조대왕의 모형 태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보면 화성을 본떠 조형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 쪽으로 보면, 비와 함께 탑의 형태로 조형한 구조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이 조형물은 정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그대로 모사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원래 정조의 태실과 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에 소재한다.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태실은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한 비가 놓여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모형 태실과(위) 영월에 있는 강원 유형문화재 태실 및 비(아래)
태실도 수난을 당한 정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이다. 전국에는 태봉, 태재 등의 명칭이 붙은 수많은 태를 묻은 곳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현의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실의 풍습은 매우 오래된 듯하나, 조선시대 이전의 태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이산은 조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여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현재 영월에 남아있는 정조의 태실은 192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태실을 창경궁 안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를 꺼내 관리상의 이유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태실과 태실비는 광산의 개발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에 소재한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원당형 부도를 닮은 정조의 태실
정조의 태실은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사찰 등에서 스님들의 사리 등을 모셔 놓는 팔각 원당형 부도를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꽃무늬나 도형을 장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난간을 돌렸다. 다른 한 점은 원통형의 석함 위에 정상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놓여 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에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그사이에는 구름문양을 채웠다. 비의 몸돌은 이수와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 육년시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이라 종서로 음각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뜰에 놓인 정조대왕의 태실과 비. 수원이라는 곳은 정조대왕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태실의 조형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다. 곁으로 지나치면서도, 안내판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왜 이런 것을 여기 세워야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역사, 특히 수원과 정조대왕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거북 조금은 세련되지 못했어도 보물이네.
‘탑비(塔碑)’란 옛 고승들이 입적을 한 후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그 옆에 승적기를 새긴 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는 광종의 명에 의헤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워진 법인국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안에 소재한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옛 보원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보원사 터에는 보물 5점과 함께 많은 석재들이 있으며, 주변에는 국보인 용현리마애삼존상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신과 관계하는 꿈을 꾸고 난 탄문
법인국사 탄문의 탄생일화는 신비하다. 국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관계를 맺는데, 한 중이 홀연히 나타나 금빛 가사를 주고 갔단다. 이 날 탄문의 어머니는 임신을 하였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법인국사의 자는 대오이며, 성은 고씨이다.
탄문은 15세에 출가할 뜻을 비쳐, 북한산 장의사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5년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안산을 기원하니, 태어난 이가 바로 광종이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후에 새로 낙성을 한 귀법사의 주지와 왕사가 되었다.
광종 25년인 974년에 법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국사로 임명을 하였다. 그가 서산 보원사로 길을 떠나자, 광종은 친히 왕후와 태자, 백관 등을 대동하고 개경 교외까지 그를 배웅하였다고 한다. 보원사로 온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국사가 된 이듬해에 기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75세, 법랍은 61세였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귀부와 이수
법인국사의 탑비는 경종 3년인 978년에 세웠다. 대개 거북이의 몸과 용머리를 가진 비의 귀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를 거치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탑비받침인 귀부 역시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의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인 이수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귀부의 등에 새겨 넣는 문양이 없이 밋밋하게 구성을 하였다.
또한 비 머리인 이수의 용 조각도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형태는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단순하다. 거북의 앞발도 일반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있는 표현이 아니라 형식적인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 법인국사 탑비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산 보원사 터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과 법인국사 탑비. 아마도 이 탑비는 법인국사의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978년에 이 탑비를 세우고 ‘법인’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찜통더위에 문화재답사, 나 제명대로 살기는 할까?
10일이 넘게 계속된 찜통더위. 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4일에 찾아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사적 고달사지. 그곳에서 난 땀을 비오 듯 흘리면서도 그늘을 찾아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찾아간 고달사지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을 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추시하고 대사의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다.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 후, 17년 뒤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벌써 몇 번째 찾아간 탑비, 그런데 이럴 수가
이 비는 몸돌은 무너져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이곳 고달사지에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몸돌인 비문을 볼 수가 없어 매번 갈 때마다 아쉬움이 컸던 원종대사탑비였다. 언제가 답사를 함께하던 동료 한 사람이, 도대체 왜 그렇게 갈 때마다 사진을 많이 찍어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혹 무엇이 변하지는 않았는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탑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한 장씩 찍어댄다. 40도를 육박하는 땡볕에서 사진을 찍다가보니, 이미 몸은 땀으로 다 젖어버렸다. 얼굴과 등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닦을 엄두도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이걸 왜 보지 못했을까? 지난번에는 제대로 잘 찍었었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문화재 이야기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이 비에 조성된 거북의 머리는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머릿돌인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두의 이는 큼지막하니 두텁게 표현을 하였고, 콧구멍을 크게 뚫렸다. 영화에서처럼 이 콧구멍에서 불이라도 뿜어대는 것일까? 눈썹은 짙고 굵게 표현을 하였으며, 왕방을 눈은 금방이라도 사람에게 위압을 줄 것만 같다. 귀두를 살펴본 후 그 위에 비문을 올려놓았던 장방형의 비좌를 살펴본다.
비좌는 받침돌과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이중의 육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된 귀갑문을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켰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는 이 비좌를 놓치고 말았다. 비좌에 새겨놓은 문양을 돌아보다가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더위먹고 내가 제대로 살 수는 있을까?
꽃과 구름문양을 새겨 넣은 비좌의 밑면에도 세세하게 조각을 해놓았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섬세함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이수를 보다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몸을 꼬아 용트림을 하는 조각의 놀라움이다. 어찌 그리도 섬세하게 표현을 해 놓았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비좌의 밑에도 이수의 밑에도 아름답게 조각을 한 문양들. 그런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 걸음을 옮기면서 되뇐다.
“이 문화재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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