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하는 사람들도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도 이런 무대는 처음이다. 맨 바닥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한편에선 물줄기가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사회자가 한마디 거든다.

 

폭포무대라고 이런 무대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무대이자 최초의 무댑니다. 앞으로도 이런 무대는 아무도 마들지 못할 겁니다. 우리 수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무댑니다.”

 

그 말에 수원천 건너편 객석의 관람객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한다, 3() 오후 5시부터 수원천 지동교 아래 통로애 마련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 이수자 승경숙 제3회 개인발표뢰 및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위한 위령굿현장이다. 천안에서 구경을 왔다는 이정재(, 44)는 구경을 하면서 기가 막힌다며 말한다.

 

 

세상에 나는 다리 아래서 이런 공연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전통시장 구경을 왔는데 음악소리가 나기에 찾아왔더니 다리 아래 이런 공연장이 있네요. 사람들에게 여기서 공연을 자주 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오늘 처음이라고 하네요. 참 수원이라는 동네 정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발상을 하죠.”

 

물을 사이에 두고 무대와 객석을 구분해

 

처음부터 이런 무대를 마련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위령굿 날짜를 3일로 정했는데 갑자기 태풍 나크리가 올라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행사 관계자들은 행사를 연기할 것인가? 아니면 장소를 변경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지동교 아래는 폭이 넓어 충분한 공간이 있다고 판단을 해 장소를 다리 위에서 아래로 옮겼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참 캄캄했어요. 날짜를 옮기는 것도 그렇고 딴 공연도 아니고 세월호 의생자 위령굿으로 몫을 정했는데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경기도도당굿 회원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했는데, 취소를 할 수도 없거요.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곳이 지동교 아래인데 이렇게 훌륭한 무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날 지비를 들여 개인발표회 및 세월호 희생자 극락왕생을 위한 위령굿을 펼친 승경숙(60) 도당굿보존회 이수자의 말이다.

 

 

300여명의 관중들, 즐거운 굿판이었다.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도당굿은 그 도당이 처해있는 지리적인 여건에 따라서 모셔지는 신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내륙지방에서는 대개 산치성이나 산제라고 하여서 도당할아버지나 도당할머니가 남산신 혹은 여산신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경기도의 서해안과 섬 지방의 풍농과 풍어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는 도당굿도 섬기는 신위는 용왕이나 임경업장군 혹은 바다라는 지역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신격들을 모시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섬 지역인 제부도, 영종도, 떼무리섬, 살섬, 용유도, 덕적도, 등에서도 풍어를 위한 대동굿을 풍어제라고 부르지 않고 도당굿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절차나 의례를 보아도 서해안 별신굿으로 나타나는 풍어제와는 다르게 행해졌다.

 

 

이날 위령굿은 경기도당굿 이수자 목진호의 주정청배로 시작을 해 승경숙의 선부정, 도당을 모셔들이는 산바라기, 시루굿과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굿답게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이수자인 김규미(, 54)의 지전춤 등으로 이어졌다.

 

정말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경기도도당굿 보존회 여러분과 승경숙씨 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태풍이 부는 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세월호의 많은 생명의 극락왕생을 위한 자리도 좋지만, 이 비가 퍼붓는 가운데서도 공연을 한다는 발상이 기가 막히네요. 더구나 떡이며 과일을 모두 나누어 주는 바람에 손이 푸짐해졌습니다. 정말 고맙고 즐거운 굿판입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뜰 줄을 모른다. 걸판 진 굿판과 동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날 위령굿은 발표회를 겸한 굿판을 펼친 이수자 승경숙을 비롯해 오진수(보존회장 전수조교), 장영근(전수조교), 이수자 소명자, 김순중, 백윤이, 곽승헌, 목진호, 김영은, 고현희와 전수자 이용수, 김상희, 이순덕, 강봉림, 이인자, 이주현, 최남수, 김지혜, 최인순 등이 동참했다.

지난 10월 24일(수), 수원시 팔달구 구천동 수원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달마선원에서는 태평소와 아쟁 등의 소리가 울린다. 2층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굿판이 벌어졌다. 요즈음에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에서 굿을 하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찾아든 굿판에 참 볼것이 많다.

 

청주시 흥덕구에서 왔다는 굿을 의뢰한 제가집 사람들은 굿을 하면서 무격이 내리는 공수에 귀를 기울이며 연신 “고맙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굿판에서는 모든 것이 직설적이다. “내가 다 알아서 도와주마.”라는 무격의 공수는 굿을 하는 내내 계속된다. 아마도 그런 말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 바로 굿판인 듯하다.

 

 

‘입살이 보살’이라는데

 

이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이 4명, 악사가 3명, 그리고 제가집 사람들과 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합해 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중에서 달마선원의 원장이라는 김종해(남)와 팔달구 장안동 315-1에 거주하는 황인애(여, 30세) 두 사람이 주관을 하는 굿판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신아버지와 신딸이다.

 

무격들은 자신의 내림굿을 주관한 사람을 신아버지 혹은 신어머니라고 부른다. 내림을 받은 사람을 딸 혹은 아들로 칭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령 안에서 부모의 관계로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나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내림을 하고, 받은 관계로만 형성이 되기 때문이다.

 

 

굿판에서 제가집의 조상이 실려 연신 ‘도와주마’라고 공수를 하던 김종해는 그 도와주마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입살이 보살’이라고 흔히 말을 합니다. 사람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것이죠. 거기다가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 입에서 나오는 공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죠. 굿판에서 무당이 도와주마를 계속하다가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굿판 내내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죠.”

 

 

 

이 무녀 사람께나 홀리겠소.

 

신딸인 황인애가 신복을 갈아입고 굿판으로 들어섰다. 처음에 전국 명산에 있는 산신을 초대한다는 산바라기 굿을 시작한 것이다. 홍천익에 빛갓을 쓴 무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거기다가 굿판에 선 무녀가 엷은 미소까지 띤다. 구경을 하던 한 분이 작에 말을 한다.

 

“저 무녀 참 남자께나 홀리겠네요. 저렇게 웃으면서 굿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황인애는 24살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회사에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작은 점포 하나를 차리려고 계획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다리가 심하게 아파 걷기조차 힘들었다는 것.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더니,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수술을 해도 정상적은 사람들처럼 걸을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을 통해 신아버지인 김종해를 찾게 되었고, 거기서 들은 이야기가 ‘무병이니 수술을 하지 않아도 고칠 수 있다. 다만 네가 결정을 할 일이니 시간을 줄 테니 결정을 하라고 했다는 것.’ 그런데 점점 심해오는 통증과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날마다 이상한 꿈과 소리가 들려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매초마다 심하게 몸이 떨려 막 울기도 했어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모아 둔 재물도 다 날아가 버리고요. 그래서 결국 내림을 받았는데, 그렇게 아팠던 다리가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싹 가시는 거예요”

 

 

이제 내림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굿을 하다니. 굿은 그렇게 쉽게 배울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5년 이상은 지나야 굿을 배워 한 거리라도 굿판에서 할 수가 있는데, 애동(내린지 얼마나 안되는 무당을 지칭하는 말)이 굿판에서 그렇게 춤을 추고 소리를 하면서 공수까지 주다니.

 

밤늦게까지 이어진 굿에서 몇 거리를 맡아 한 무녀 황인애. 굿을 연구한다고 30여년 세월을 굿판을 쫓아다닌 내 눈에도 굿을 하는 것이 예쁘게 보일 정도였으니, 타고난 팔자라는 생각이다. 굿판을 나서는데 ‘다음에 굿 할 때는 더 잘 배워서 보여드릴게요.’라고 인사를 한다. 하기야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언젠가는 더 잘 배운 굿을 하는 황인애를 굿판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9월 24일(월) 낮, 화령전 앞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피리를 불고, 장구와 제금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화령전 솟을삼문 앞 길 건너편 2층집 ‘용궁아씨당’이라는 간판을 건 무속인의 집에서 울리는 소리다. 굿판이 벌어졌다. 한 때 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내가 아니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들었다. 진적굿이 막 시작되었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하는데, 신을 모신 기자(祈子)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여 벌이는 잔치판이다. 봄에 하면 ‘꽃맞이 굿’이라고 하고, 가을에 하면 ‘단풍맞이 굿’이라고도 부른다.

 

 

 

유독 수원에 무속인이 많은 까닭은?

 

수원에는 유난히 신을 모신 무녀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렇게 수원에 무녀들이 많은 것은, 역사의 한 단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조선조 때는 유생들로 인해, 도성 안에 있는 많은 무녀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고는 했다. 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무녀(巫女)들은 노량진을 건너야 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던 악사 등 남자들은 뚝섬을 건너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노들만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한강을 건너 노들로 모여 든 도성의 만신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을 터. 이들은 몰려든 곳은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드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기에 이들은 화성 축성을 위해 수많은 노역자들이 몰리는 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마친 후에는 수원에는 장안문 밖인 영화역 인근과, 팔달문 앞에 커다란 장시가 형성이 된 것을 알고 수원 화성 인근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 매향동을 비롯하여, 지동, 매교동, 남수동 등 화성의 안과 밖에 이렇게 무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원에 큰만신들이 대거 포진한 것도, 이렇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과 장시는 함께 역사의 길을 걸었던 것.

 

“정조대왕 수위에서 놀구나가오”

 

“해동은 대한 국 수원이라 대목 안에 팔달산 내린 줄기 이 터전에 들었으니, 오늘 애동제자 단풍맞이 이 마전에 정조대왕 수위에서 정성 덕 입사와....”

 

스승인 승경숙 선생(여, 58세)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 용궁아씨 정현옥(여, 43세)이 천궁맞이 굿 상 앞에서 소리를 한다. 이렇게 신령을 위한 진적굿은 일 년에 한 번 , 혹은 3년에 한 번씩 하게 되는 굿이다. 또한 이 진적굿은 무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정성을 드려 제물을 차리고,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써서 펼치는 굿판이다.

 

 

 

 

우리는 흔히 ‘굿은 굿(Good)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굿판은 열린 축제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올 수가 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보낸다. 굿판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많다는 것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이런 굿판은 많은 것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나누고 복도 나눈다. 나누어 주는 문화, 그것이 바로 굿문화이다.

 

그런 굿판이 요즈음은 자꾸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밤새 즐기던 굿은, 이제는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고가 들어간다. 한 낮에도 조금만 시끄러우면 신고를 해댄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던 한 마당인 굿이, 자꾸만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유이다.

 

그 선생에 그 제자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용궁아씨 정현옥을 만났다. 내린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물었더니, 이제 4년이란다. 4년 밖에 안 된 애동(내린지 얼마 되지 않는 무녀들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이 천궁맞이 한 석을 이렇게 걸판지게 해 낼 수 있다니, 그도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스승 승경숙을 말한다. 승경숙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이수자이다)에게서 제대로 학습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제나 정말 열심히 학습을 시키시기 때문에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속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굿은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다. 내림을 받았다고 해서 굿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굿은 선대의 무녀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굿을 배울 때는 상 차리는 법, 옷 입는 법, 지화 만드는 법 등 많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을 다 배우려면 적어도 10년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정현옥은 그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내리고 난 뒤 올해 세 번째 맞이굿인가 보네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작게나마 신령님들을 위하는 굿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처음에 신병이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웠죠. 재물은 재물대로 손해를 보고,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요. 눈만 감으면 환청이 들리고,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고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내림을 받지 않고 있으니, 동생들과 내가 교대로 신병을 앓았고요. 할 수 없이 제가 내림을 받았습니다.”

 

무녀들이 신병을 앓을 때는 대개 세 가지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정신적인 것이다. 남들은 듣고 볼 수 없는 것을 본인은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아도 아무런 증세가 없다. 다음은 물질적인 신병이다. 재산이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사고가 나거나 해서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병은 육체적인 신병이다. 대개는 중병에 걸리는데도 이들은 죽지를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내림을 거부하면 가장 무섭다는 ‘인다리( =人橋)’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사람씩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무녀 중에서는 가족 5명을 보내고 난 뒤, 내림을 받은 사람도 있다.

 

“힘든 것은 말도 못하죠.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제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어쩌겠어요. 지금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골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죠. 학습에도 더 열심을 내야 하고요”

 

긴 시간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많은 제차를 다 하려면 시간이 바쁘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걸어야만 하는 무녀의 길. 이제 이들이 하는 굿 행위도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서 창출된 문화로 인정을 해야만 한다. 굿은 총체적인 예술이다. 흔히 악가무희(樂歌舞戱)가 그 안에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굿은 우리 전통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제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하기에 ‘신들린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는, 우리의 한 문화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설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얼마 뒤 더 많은 재주를 배운 정현옥의 굿판을 기대해 본다.

“참 굿판 한번 후련하다. 한바탕 뛰고 났더니 가슴에 케케묵어 뭉친 덩어리가 시원하게 뚫려버렸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얼마나 신이 나게 뛰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참 그리고 보면 이런 굿판을 잊은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방송을 하면서부터 찾아들어간 굿판. 전국을 다니면서 정말 오랫동안 굿판에서 생활을 했다. 웬만한 굿판은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도 내노라하는 굿판은 빠트리질 않았으니 말이다.

 

흔히 우스갯말로 ‘굿’은 ‘good' 이라고 한다. 좋다는 뜻이다. 그 굿이 좋지가 않았다면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을 존속이 되어 왔을리가 없지 않을까? 혹자는 우리 굿을 종교적으로 박해를 하기도 한다. ’미신‘이나 ’혹세무민‘이라는 것이다.

 

 

일제의 잔재를 이용하는 인간들

 

종교란 각자의 심성대로 가는 것이다.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해서 폄하하거나 박해를 할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우리 굿은 참 많은 시대를 박해를 받았다.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그들이 바로 하늘을 위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위치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들의 위치가 이 땅 밖에서 유입된 종교로 인해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했다. 고려 때와 조선조 때는 도성 밖으로 축출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바로 우리네의 굿이다. 일제 때는 ‘미신’이라는 용어를 써서, 우리 굿을 박해했다. 굿은 일개인의 치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굿도 있고 나라굿도 있었다.

 

 

 

일제는 1920년대에 문화말살 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우리 마을의 제당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는 ‘새마을 운동’을 한다고, 많은 마을의 제장들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는 끈끈하게 굿이 자리하고 있다. 굿은 곧 ‘좋은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속풀이 굿, 이것이 정말 굿이다.

 

2012년 3월 28일(수).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에서는 ‘고성주의 봄맞이 진적굿’이 열렸다. 진적이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는 굿이다. 대개는 1년에 한 번이나 3년에 한 번을 하지만, 고성주는 일 년에 봄, 가을 두 차례씩을 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으로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으로 행한다.

 

 

고성주의 맞이굿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벌써 이 맞이굿은 오래전에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방송이 되기도 했다. 며칠 전부터 준비를 해온 맞이굿은, 28일 아침 일찍부터 집안에 웃음소리와 음악으로 넘쳐났다. 피리, 대금, 해금의 악기소리와 장고, 징, 바라 등의 타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이 맞이굿의 하이라이트는 텃대감을 놀 때이다. 아마 이런 굿은 전국 어딜 가도 볼 수가 없다. 마당에는 돼지족발과 떡시루, 그리고 막걸리를 한 동이 갖다 놓았다. 그 앞에는 종이를 태워 물에 풀어 놓는다. 검뎅이다. 이 집 텃대감 놀이에서는 모두가 서로 얼굴에 검뎅칠을 한다. 그리고 서로 쳐다보고는 웃어댄다.

 

 

 

수양부리들도 다 대감이 되는 굿판

 

이집의 텃대감을 놀릴 때는 희한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모두가 다 남쾌자 하나씩을 걸치고 나온다. 모두가 다 대감쾌자를 하나씩 입고 있다. 이 집의 맞이굿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녀의 인도에 따라 집을 한 바퀴 돌아서 지하실로 내려간다. 지하실은 평소에 고성주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연습실이다.

 

이 지하 연습실로 들어간 일행들은 온통 난리를 친다. 소리 지르고 춤추고, 징과 바라, 잘고 장단에 맞추어 너 나 할 것 없이 온통 뛰어논다. 과거 우리네 맞이굿인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에서 ‘답지저앙’을 하고 ‘수족상응’을 했다는 것이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뛰고 났는데 어찌 속풀이가 안 되었을까? 전안으로 들어온 일행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다. 모두가 한 마디씩 한다. 한 마디로 잘 놀았다는 것이다.

 

“올 일 년도 이렇게 시원하게 속풀이를 했으니 잘 될 것 같네요. 그저 굿판에서 이런 재미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굿판에 갈까요?” 

굿판에는 늘 해학이 넘친다. 예전에는 대감굿을 할 때면, 전문적인 ‘무기(舞技-춤추는 사람)’들이나 소릿광대들이 굿판을 찾아들었다. 대감굿은 지금처럼 한 거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거리마다 끝에 질펀한 대감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감굿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하였다.

11월 2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남, 55세)의 ‘진적굿(진적굿은 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한 굿을 말하다)’ 판은 흥이 넘쳤다. 춤을 추는 무희들과 소릿광대가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타고난 소리꾼

박종국(남, 57세)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소리꾼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릴 때 시흥 읍내 탑골에 살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집을 지을 때 하는 지경닺는 소리 등 많은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요. 그 어린나이에 무엇을 알고 그랬는지. 한 번은 상여를 쫓아가 공동묘지에서 잠을 잔적도 있어요. 밤이 늦었는데도 아이가 들어오질 않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경찰들에 의해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집에 가서 혼도 많이 났죠.”

굿판에 초청이 되어 부채 하나를 손이 들고 신바람 나게 ‘변강쇠타령’을 불러대는 박종국씨.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이던 박종국씨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0호 수표교다리밟기 소리부문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당시 큰 만신 집이 있었는데, 그곳서 구경을 하다가 늦게 들어와 혼도 많이 났다고 한다.

“아마 음악이 저에게는 팔자인가 봅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보컬을 조직해 공연도 하고, 무명가수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소리판

그런 끼가 있어서인가 자신에게 맞는 소리를 찾다가 우리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선소리 산타령의 보유자였던 고 정득만 선생과 현재 서울 휘몰이잡가의 보유자인 박상옥 선생께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 동안 수원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온 박종국씨는 판소리를 마당극화 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하는 등, 많은 공연을 하였다. 언제나 타고난 소리꾼으로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고 이어간 것이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인가 보다.

소릿광대는 재담이 뛰어나야만 한다. 판소리의 소리꾼만이 아니라, 어느 소리를 하든지 재담이 없으면 소리판이 영 밋밋해진다. 소리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좌중을 휘어잡는 재담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박종국씨의 재담은 언제나 재미있다. 수많은 무대에 작품을 올리면서 직접 연출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소리로, 박수로 굿판의 흥을 절정으로 오르게 한 소릿광대. 아마 이 날 장구를 대한민국 최고의 장구잽이라고 하는 장덕화 선생이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굿판의 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우리 굿의 재미이기도 하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