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242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제109호는 어사각이다. 어사각은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7년간의 호남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분들과, 이 비보를 받고 자결한 부인들의 의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어사각이란 말 그대로 임금이 내린 책을 보관한 전각이라는 뜻이다.

 

이 고창 어사각에 모셔진 의열들은 김유신장군의 후예로 김해김씨 판도판서공파(金海金氏 判圖判書公派), 일명 삼현파(三賢派)의 절효공 김극일의 직계 근친 25의사와 5열부들이다.

 

 

선조가 서훈한 단서철권을 보관한 곳

 

어사각은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선조 38년인 1605년 4월 16일에 이들에게 선무원종공신록에 서훈하여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다. 이어 영조 25년인 1749년에는 칙령을 내리어 각을 하사하여, 단서철권이란 왕의 옥쇄가 날인된 책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김극일의 가문은 수로왕을 시조로 하고, 김유신장군(수로왕 12대 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조와 고려조를 통해 많은 어진 신하와 훌륭한 장수를 배출하였으며, 고려조에서 만도 정승 급 14명을 비롯하여 이름 높은 신하, 공이 큰 신하 10여명과 장군 8명, 학자 1명 등 숱한 인물을 내어 위세를 떨쳤다.

 

김극일은 고려 때의 이름난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 그 둘째 아들 김맹은 조선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그의 세 아들 준손, 기손, 일손이 모두 문장은 물론, 과거에 올라, 김씨 3주(三珠)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으로써 문과에 급제, 예문관의 호당에 뽑혔다.

 

 

김극일의 본받을 만한 문중

 

이 문중에는 구국에 불타는 충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김극일의 5세손으로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등 벼슬살이를 했는데, 당대의 명필로 그의 「이충무공 수군대첩비」는 특히 유명하다.

 

고려말기 두문동 72학자중의 한분이며, 예의판서, 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낸 김진문의 막내아들인 김조는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수찬을 거쳐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자격루, 간의대, 혼천의, 갑인자(활자)등을 장영실등과 함께 제작하여, 세종조의 과학 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문학으로도 그 재질을 발휘, 세종대왕의 아낌을 받았다.

 

김우항은 조선시대에 김해 김씨가 낳은 오직 하나뿐인 정승이다. 그는 숙종 때에 문과에 올라 부사,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호조, 병조, 형조 등 다섯 판서를 고루 지내고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고, 그가 사망했을 때 왕은 관을 하사하여 장례했다. 김홍복은 김우항의 숙부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을 지냈는데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극일의 문중에서 이름난 장군으로는 김경서와 김완을 들 수 있다. 또한 김자정은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성종 때 노사신, 노희맹 등과 『신찬여지승람(新撰與地勝覽)』을 편찬했다. 김덕승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목사에 이르렀는데, 경사 등 모든 학문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조선시대 화가 중의 제일인으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 역시 이 가문이다.

 

그런가 하면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을 집필한 김천택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신부도 이 가문의 사람으로 종교가로서 명망이 높다. 오늘날 김대건 신부를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삼고 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작은 어사각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어사각에 모셔진 김극일의 자손들이 7년간의 호남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조상들의 뜻을 고귀하게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남편들의 전사 소식에 장렬히 남편의 뒤를 따라 스스로 자결을 할 수 있었던 부인들의 기개도 집안의 내력이 아니겠는가?

 

 

이 작은 집 하나를 보면서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이런 험한 일이 닥쳤다고 하면 당당하게 목숨을 내놓고 구국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또한 남편이 장렬하게 순국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킬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가진 마음만은 변하지 않아야 올곧은 나라가 될 수 있단 생각이다. 오늘 우리는 이 어사각에 깃든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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