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다. 그렇다고 볼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 눈에도 참으로 고졸한 정자란 느낌이 든다. 정자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말끔히 단장이 된 정자는 어디 한 곳 흠 잡을 곳이 없다.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 소재한 택풍당. 양동에서 여주 북내면으로 나가는 길목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택풍당을 만날 수가 있다.

 

택풍당은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이식 선생이 제자와 자손들을 가리키고,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정자는 이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으며 사방에 난간이 없이 누마루를 놓고 중앙에 작은 방을 드렸다. 그저 조촐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는 택풍당은, 뒤숭숭한 정국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식 선생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바람따라 흘러온 것일까?

 

이식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사대가이자 대문장가로 알려졌다. 자는 여고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누각의 이름도 자신의 호에 바람풍(風)자를 넣어 지었다. 아마 자신이 바람을 따라 이곳에 왔음을 뜻하거나,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말라는 뜻으로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 및 선전관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10년인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곳에 낙향하여 오직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택풍당은 선생이 낙향한 이듬해에 지었다. 가을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있을 때, 지나던 길에 우연히 찾아들어 간 택풍당.

 

 

 

첫눈에도 참으로 조촐한 누각이란 생각으로,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지 않은 담장을 둘러치고 작은 문을 낸 택풍당은, 중층 누각의 형태로 지어졌다. 아래를 막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곳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아닐까? 창호도 가장 흔한 것으로 했다. 주인은 어디 하나 검소하지 않음이 없다.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한 작은 집

 

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집주위를 돌며 들여다 본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서 큰마음을 읽어낸다. 그것은 그저 평범한 가운데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반듯하면서도 화려함을 피한 택풍당의 모습 때문이다. 폐모론이 일자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이곳 쌍학리 촌마을로 찾아 든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도 택풍당 주변에는 몇 집 되지 않는다. 400여 년 전에는 이곳에 몇 집이나 있었을까? 아마 이곳에 내려와 세상 인연을 끊고 후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낙을 삼았을 것만 같다. 많은 정자를 찾아다녔지만 이처럼 조촐하고 고졸한 누각은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작은 집. 그 곳에서 큰 교훈 하나를 얻어간다. 세상 시류에 물들지 말고 초연하라는.

정자를 지을 때 옛 선인들은 무엇을 먼저 생각했을까? 우선은 물과 숲이다.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송림이 우거졌다면, 그것이 정자를 세우는데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만 같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정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 모두가 빼어난 절경에 자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기암절벽 위에 정자가 서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정자를 가린다. 한편은 대숲이 있어, 바람이 불때마다 대숲이 화답을 한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자연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까? 그렇게 아름다운 정자 송석정(松石亭)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강성리 762번지에 소재한다.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송석정

당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한 양인용이 처음으로 지었다고 전하는 송석정. 양인용은 제주인으로 자는 ‘여함(汝涵)’이요, 호는 송석정(松石亭)이다.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 을묘 12월에,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양산립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한 송석정은 소시에 등과하여, 종사품인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당시의 조정은 당쟁으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광해군이 등극해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키자, 공은 이를 반대하는 충간을 광해군에게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공은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호를 붙여 ‘송석정’이라 당호를 지었다.



글 속에 남아있는 송석정의 마음

대장부 어지러운 때를 만나
거룩한 진리안고 숲속에 있네.
궁약은 경서 속에 달래보고
공명은 물거품으로 생각하도다.
소나무 어루만져 달아실(=月谷) 바라보며
돌덩이 헤아리며 용두암을 거닐어보네
이 깊은 애정(哀情)을 뉘와 더불어 논할까
좋은 벗들 찾아와 머물었건만

송석정의 원운(原韻)에 보면 나라를 향한 걱정을 하면서 단장의 애한을 달래고 있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공은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냈다. 정자 안에 빼곡하게 걸린 수많은 시판들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절경’이란 말이 어울리는 정자 송석정

송석정이 차음으로 지어진 것은 400여 년 전이다. 8월 21일 전라남도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송석정. 많은 사람들이 정자에 올라있다. 무슨 일인가해서 다가갔더니, 공의 후손들이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한다. 바쁜 답사 일정만 아니라면, 나도 그 안에 끼어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고 돌아서려니, 공이 한마디 할 것만 같다. ‘술 한 잔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는 주변머리 없는 인간’이라고.

송석정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이다.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중앙에 한 칸 온돌을 놓아, 주변경치를 사시사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은 사방을 모두 열어 위로 걸게 하였으며, 한편 마루를 높여 그 아래 아궁이를 두었다.



주변으로는 암반이 솟아있고, 노송들이 가지를 뻗고 있다.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진다. 정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송석정,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듯하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길에는, 그 곳에서 공의 마음을 읽기 위해 술 한 잔 따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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