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큰키나무이다. 이 나무의 원산지는 한국이며 일본, 대만, 중국에도 서식한다. 왕버들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는 나무로 유명하다. 나무의 키는 10~20m로 크게 자라며, 주로 습지나 냇가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왕버들 나무의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거나 긴 타원 모양이며, 잎이 새로 돋을 때는 붉은 빛이 돈다. 암수가 딴 그루이고, 4월에 잎과 함께 꽃이 핀다.



광주호를 끼고 있는 마을 충효동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은 조선 정조 때 충효리에서 유래된 충효동이,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리가 동으로 되었다. 그 후 1998년 9월 21일 행정동인 충효동(법정동 : 충효동, 덕의동, 금곡동) 청옥동(법정동 : 화암동, 청풍동, 망월동) 장운동(법정동 : 장등동, 운정동) 3동을 통ㆍ폐합하여 현 석곡동이 되었다.

이 충효동의 왕버들은 광주호 동쪽 제방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가에서 자라고 있다.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한 그루와 버드나무 한 그루, 그리고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정자가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왕버들도, 그 때 심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 그루의 나무 중 가장 큰 나무의 높이가 12m, 둘레가 6.3m이고, 작은 나무의 높이가 9m, 둘레가 6.25m로 세 그루가 고른 크기로 자라고 있다.

왕버들에 빠져버리다.

지난 6월 18일,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을 답사하면서 들리게 된 광주호 일원. 길을 가다가보니 큰 나무들이 보인다. 앞을 보니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차에서 내려 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수령이 400여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세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왕버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가지가 늘어져 버팀기둥을 세웠으며, 나무의 밑동은 그야말로 혹부리라도 된 듯하다. 이런 나무가 세 그루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무 근처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모습이 가히 놀랍기만 하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가 각각 나름대로의 장관을 연출한다. 안쪽의 나무 한 그루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까지 닿고 있다. 그 나무 가지 밑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한 낮의 더위를 가시기에 충분한 그늘이 생겼다. 그렇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모두 다섯 그루가 있었다는 왕버들의 두 나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남아있는 왕버들 나무의 모습으로 보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고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기기묘묘한 형태를 자랑하는 충효동 왕버들나무. 그동안 많은 나무들을 보아 온 나로서도 이런 나무를 보기란 흔치가 않다. 어찌 이리 제 멋대로 생긴 것일까?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동행자의 재촉도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 나무에 손을 대고 있고 싶은 것은,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왕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이다.

송강 정철(1536 ~1593)은 담양 어디를 가나 그 흔적이 보인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송강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등 많은 가사와 한시, 단가 등을 남겼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 - 1 에는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식영정 일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쓴 비가 보이고, 정자와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명승의 좌측 낮은 동산 위에는 크지 않은 정자가 서 있다. 바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이 된 식영정이다.

국가지정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된 식영정 일원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김성원은 이 식영정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복원을 하였다. 정자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을 지었으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운차를 하였으며, 이 네 사람을 합해 <식영정사선>이라고 일컬었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운치를 살린 식영정의 대들보

송강문학의 산실 식영정

식영정
은 이곳을 중심으로 성산별곡 등을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지어졌다. 한편에는 한 칸의 방을, 그리고 그 남은 부분은 누마루를 깔아 시원하게 조성을 하였다. 온돌방과 마루가 반씩 차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편 중앙에 방을 들이고, 방 앞뒤에는 툇마루 형태의 마루가 있어 공간적 여유를 보인다.

『서하당유고』에 따르면 이 식영정은 명종 15년인 1560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지금부터 450년 전에 이 정자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식영정 위에 오르니 앞쪽으로는 광주호가 펼쳐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광주호가 있어,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한층 배가 시킨다.

앞으로는 넓은 광주호가 자리를 잡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가히 명승이로세

마루에는 각종 싯귀가 적힌 게판들이 걸려있고, 옆으로는 노송 두어 그루가 서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신선이라도 머물만한 절경이다. 이 식영정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서하당 김성원은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다녔을까? 아마 담양 곳곳을 누비면서 이만한 장소를 찾아 정자를 지었다고 생각을 하니, 새삼 식영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연신 식영정에 오른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는 사람들. 도대체 우리들은 이만한 경치에, 이 정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오르기가 무섭게 우르르 몰려 사진 몇 장을 찍어대고는 내려가 버린다. 아무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는다.



  
450년이란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이 땅의 문학의 산실로 자리를 잡은 식영정. 푸른 나무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한 마리 이름모를 새가 고요함을 깬다. 아마 저 새도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멋 없이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을 곳인데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세월의 무상함이란 그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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