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양사터라고 전하는 홍천 물걸리 사지.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물 5점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 파편 4, 철쇄 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대좌, 보물 제544호 대좌 및 광배, 그리고 보물 제545호인 삼층석탑이 옛 절터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 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사지 앞에 대승사라는 절이 들어서 관리를 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좌상

 

이 물걸리 사지 동편에 마련한 전각. 그 안에는 4기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 보물 제541호로 지정이 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세한 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은 형태의 모습에서 이 여래좌상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다.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인 육계가 펑퍼짐하게 솟아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 모양의 매듭을 단정하게 묶은 것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텁고 투박하게 보인다.

 

 

광배가 사라져버린 이 석조여래입상은 상체는 8세기 불상에 비해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다. 그런 표현을 하다가 보니,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여 무릎 위에 올렸다. 이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부처가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수인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가모니 부처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얼굴은 마모가 심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눈과 코, 입이 적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얼굴모습은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통일신라 전기에 비해 양감면에서 뒤처지고 있다.

 

 

여러 마리의 팔부중상과 가릉빈가로도 부족했소?

 

불상이 앉아있는 불대좌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다.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면서 조금은 마모가 되기도 했지만, 문양 등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있다. 이 불대좌는 상, , 하대로 구분되어 있다. 8각형으로 조성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와 향로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부조로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아랫돌에는 커다란 앙화의 끝에 귀꽃을 새겨 넣어 멋을 더했다. 그리고 8각의 각 면에는 팔부중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팔부중상의 흔적은 많이 마모가 되어, 정확한 표정이나 행동등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여러 장의 연꽃무늬를 겹쳐 새겨져 있다. 마모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둥근 얼굴에 눈, , 입이 작고 신체가 두텁고 투박한 점과, 불대좌에 많은 장식을 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석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가릉빈가와 팔부대중, 그리고 향로와 연꽃 등. 비록 섬세한 표현은 아니라고 해도, 많은 문양 등을 이용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아마도 광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화불과 넝쿨문양 등을 조각했을 것이다. 사라진 한 부분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문화재란 처음 모습 그대로를 만날 대 가장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번지에 소재한 각연사.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로 지정 된 석조비로나좌불상이 있다. 우선 이 불상에 대한 표현부터 먼저 하고 가자. 각연사를 찾아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조각. 사람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다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의 담당자를 찾아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종무실에 가서 비로자나불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시방세계를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

스님이 따듯하게 끓여 타 주신 차 한 잔을 마시고, 비로전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연신 감탄이 그치지를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이며,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섬세한 조각은 처음인 듯하다.

비로자나불은 시방제불을 포괄하는 법신불로 알려져 있으며, 노사나불이라고도 부른다. 각연사의 바로나자불 좌상은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좌대의 조각도 훌륭하지만, 광배의 조각은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이리도 정교하게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완벽하게 보전됐을까?

까맣게 칠을 한 작은 소라 모양으로 머리칼을 표현한 소발.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눈과 코, 입의 표현은 완벽할 정도이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앞에 마주 한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었는데, 옷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을 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무겁지 않게 하였다.



뛰어난 광배의 조각,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석불좌상의 뒤편에 놓인 광배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다. 흡사 오뚝이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일석으로 조성한 광배를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물방울처럼 생긴 광배에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불을 형상화 한 듯, 불꽃을 조각하여 놓았다. 그리고 머리와 불상의 양편으로 각각 3구씩의 작은 부처인 화불이 조각돼 있다.




머리 위에도 3구의 화불이 좌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광배에 아홉 분의 화불을 새겨 넣었다. 광배의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를 찬찬히 살펴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 그리고 뛰어난 조화로움. 도대체 인간의 조각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망치와 정 하나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가능하다니. 광배와 잘 어울리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선조들의 예술세계가 그저 놀랍다는 것뿐이다.


연화대좌에서도 뛰어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연꽃으로 둘러싼 대좌는 세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조각품인 각연사 석조비로나자불 좌상. 사진을 찍고 난 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삼배를 한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하는 것은, 이 석불좌상에 기원을 하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다시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산15-6번지. 좁은 마을 길 도로변 밑에 석불 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서 있지를 않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찾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 마침 선원사 최인술 봉사단장이 이곳을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과 함께 찾아와 보았다면서 안내를 하는 바람에 만날 수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상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입상과 광배가 조ㅘ를 이루고 있다. 언필 보면 떨어진 듯도 하지만, 광배를 다듬고 그 앞에 석불입상을 부조한 것만 같다.


낙동리 석조여래입상의 앞과 뒤

심하게 훼손이 된 안면

숲 속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가에는 이곳에 문화재가 서 있다는 안내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호 철책을 친 안으로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뒤편에 세운 광배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깨어진 곳도 없다. 그러나 정작 석불의 안면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볼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해, 상당히 세심한 조각수법을 보였던 것만 같다. 어깨선이 유려한 것이나 발 밑까지 흘러내린 법의의 옷 주름이 부드러운 U자형으로 퍼진 것 등을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석조여래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외롭게 서 있엇을까?




석조여래입상의 뒤편에 세운 광배는 온전하다.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꽃과 불꽃 무늬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배의 뒷면을 잘 다듬은 것이나, 광배의 조각들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이 수준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석조여래입상을 찬찬히 훑어본다. 얼굴의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균형이 알맞게 표현되었다. 두상의 크기와 알맞게 조형된 귀, 그리고 둥글게 형태를 지닌 얼굴.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가까이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손은 다 마멸이 되어 보이지가 않는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고, 법의를 걸친 어깨선은 부드럽게 표현이 되었다. 법의의 주름은 넓게 퍼져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발목 부분부터는 주름을 잡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이라면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같은 수준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심하게 마멸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안면, 잘려나간 손 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숲 속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남원 덕동리 석조여래입상. 아마 이 곳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벌써 천년 세월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 인근에 절터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지난날과, 분간이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괜한 한숨만 토해낸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바로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라니.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가면 사지 한 곳에 보물 5점이 있는 곳이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홍천 물걸리 사지가 바로 그곳이다. 이 사지에는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이 있어 강원도 내에서는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는가는 모른다. 다만 절은 흔적이 없고, 보물 5점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는 ‘홍양사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7년 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토기조각, 청자조각,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이 절터가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1982년에 보호각을 짓고, 3층 석탑을 제외한 4구의 보물을 보호각안으로 모셔 놓았다. 절터에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석조물 들이 발견이 된 것과, 한 곳에 4기의 대형 석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절집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보물들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그 문화재의 가치를 보아 보물로 지정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과 불대좌, 광배 등을 보면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걸리를 찾아 나선 길은 정말 한 낮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홍천에서 44번 도로를 이용해 인제로 가다가 보면 철정검문소가 나온다. 그곳에서 우측 다리를 건너 내촌면 소재지를 향하다가 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내를 끼고 여기저기 전원주택들이 보인다. 물걸리는 학교를 지나 좌측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길은 겨우 차가 드나들만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보호각이 한 동 서 있고, 마당에는 석탑 한 기가 보인다.


흔적없이 사라진 절

안내판을 보니 물걸리사지라고 적혀있다.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다니, 어찌하여 이리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석불과 불대좌, 석탑과 석물들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마당 한편을 보니 석물이 놓여있다. 그 규모를 보아도 이곳이 상당히 번성했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절집 이름마저 전하지 않는 것일까?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친다면 어디엔가 사지(寺誌)라도 있지 않을까?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보호각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 2기와 불대좌 2기가 있다.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통일 신라 후기의 것이라고 한다. 석물들이지만 그 조각 수법이 정교하다.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니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만하다. 천년 넘게 온갖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을 텐데 저리도 그 형상이 남아있다니. 참으로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왜 소중한 것인지 알 것만 같다. 석불 앞에 누군가 절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위로부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인 불대좌, 보물 제544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5호인 3층 석탑

어찌 그 오랜 풍상 이렇게 온전히 보존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절터에 있던 절이 무엇인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우리의 기록문화가 왜 그토록 허술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잇는 나라, 그리고 스스로 문화대국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러나 정작 자신의 소중한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하는 나라. 물걸리사지를 떠나면서 마음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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