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습에 ‘매향(埋香)’이란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으로,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피우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과 시기, 그리고 관련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기록한 돌을 <매향비>라고 한다. 매향비는 다듬은 돌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에 기록을 해 놓는 형태이다.

 

미륵의 세계를 그린 민초들의 염원

 

매향의식은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는데, 매향 의식은 고려 때도 성행하였으나, 그 후 불교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던 조선조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향은 주로 민초들이 즐겨했으며, 순수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년 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 매향비를 비롯하여, 1335년 3월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소재한 보물 제614호 사천매향비는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해가 2005년이었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하기야 벌써 20여 년을 전국을 돌아다녔다. 꽤 오랜 시간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하고, 그 수많은 경비며 시간이 점차 부담스럽다.

 

자연석에 15줄 202자를 썼다. 매향은 민간들이 행한 의식이다

 

그래도 그동안 현장에서 담아 온 것을 정리하여 이렇게 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사천 매향비는 거의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표면의 굴곡이 심하다. 그저 바라보면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기도 어려운 글자가 많은 듯하다. 글자 크기도 각자가 다르고 종횡도 잘 맞지 않아 보기가 힘들다.

 

전체 15줄 202자를 각인한 사천 매향비의 판독된 내용에 보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를 조직하여,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기록했다. 당시 매향의 주도집단은 주로 보(寶)·결계(結契)·향도(香徒)였다.

 

소중한 민간신앙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문화재로 가치가 높다

 

비문은 승려 달공이 짓고, 수안이 썼으며, 김용이 새긴 것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워졌다. 건립목적과 세운 연대가 확실한 비로, 잊혀진 우리의 옛 민속을 알려주고 고려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에 맞는 매향의식이 필요해

 

매향의식을 거행할 때 땅에 묻는 향은 주로 침향이란 희귀약재로 쓰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향을 땅에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의 절박한 마음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흔치 않은 문화재인 매향비. 사천 매향비를 답사한 지 오래 전이지만, 지금도 그 매향비 안에 깃든 민초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만 같다. 어차피 민초들이야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들과 함께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보물 제614호 사천 매향비

 

갑자기 사천매향비가 생각이 난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너무 절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굳이 매향의식이 아니라고 해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정작 국민들을 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잔치에 빠져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과연 이네들을 믿고 살아야만 할까?  이제는 이 시대에 ‘매향의식’이 필요한 때일 것이란 생각이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남원으로 와서 생활을 한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정작 남원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주 하던 남원 답사를, 정작 남원으로 내려와서는 등한시 한 듯하다.

8월 2일. 일과를 마치고 6시가 넘어 답사에 나섰다. 두어 곳 돌아보려니 하고 나선 길이다. 남원에서 곡성으로 나가다 보면,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번지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곡성으로 나가는 길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좁은 하천 곁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

마을 진입로를 들어서니 석불입상의 위부분이 보인다.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는 거대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숙원인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상이나 석탑, 그리고 절 등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古土)를 찾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지당리 석불입상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낀 점은, 장중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사람을 압도한다. 지당리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 대좌를 새긴 불상이다. 현재 높이는 3.63m 정도이지만, 땅 속에 뭍인 대좌를 감안하면 4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광만 조각을 한 특이한 형태

지당리 석불입상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다. 상투가 너무 커서 투박해 보이는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법의는 가슴부분을 깊게 파 뚜렷한 U자형의 표현을 굵게 하였다.

이 석불입상의 어깨는 1.15m로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양 팔에 걸쳐진 소맷자락은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 부분만 광배로 표현을 하였다. 두광의 지름이 1.82m 정도로 상당히 크다. 머리광배의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둘레에는 원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불입상의 두 팔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광배에 있는 연꽃무늬 등 세부표현은 상당히 간략화 되어 있어, 섬세함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볼 때 인근에 있는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당당한 고려의 기개를 상징하듯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 그 보호철책 밭으로는 석물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전 절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한 가지 이 석불입상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팔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팔을 끼웠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팔이 있었다고 하면 좀 더 자세하게 이 석불입상의 존재를 알만한데, 팔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렇게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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