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에 소재한 신륵사. 경기도내의 절 중에서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이다. 이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은, 보물 제231호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곳에는 보제존자의 석등과 석종, 그리고 석종 비가 한 자리에 모여있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말한다. 석등으로 오르기 전 신륵사 조사당에는 나옹화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臺下江流百丈聽. 當年說法句紳聽.(대하강류백장청. 당년설법구신청).

川女朱下方丈實. 龍王惹參蓮花經.(천여주하방장실. 용왕야참연화경).

동 아래 강물은 일백 장으로 맑구나. 당시 설법하면 귀신이 와서 들었다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지.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예주부(지금의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에서 출생한 나옹화상. 그는 원나라 유학을 했고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로서,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서 조선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스승 이었다,

 

 

이무기를 조각한 아름다운 석등

 

6월 17일(월)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이다. 신륵사를 찾아가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조사당을 거쳐 뒷산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른다. 오후의 시간이라 땀이 비 오듯 흐르지만, 그런 것이 대수이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은 더위도 잊게 만든다.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에 답사를 계속할 수 있는 가보다.

 

석등은 그리 크지 않다.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입적을 한 후 세웠다고 하니 700년 가까운 새월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의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비천상과 함께 화사석에 새긴 이무기. 화사석을 들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이다. 비천상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얼굴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며 날리고 있는 복대를 보고 있자니, 곧 석등을 뛰쳐나와 하늘로 오를 듯한 기세이다.

 

석등은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 영탑사의 우뚝 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높이 3.5m의 마애불이 있다. 원래는 연화봉 자연 암반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던 것이었는데, 유리광전이라는 전각을 지어 보존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새겨진 그대로였다면 좋았을 것을, 오히려 전각이 마애불의 멋스러움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다.

이 마애불은 약사여래마애불이다. 약사여래는 인간의 질병과 함께 무지(無智)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님이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고려말기의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조성했다는 영탑사 마애불

영탑사 마애불은 무학대사가 조성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기 무학대사가 전국을 돌아보면서 도읍터를 찾고 있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바위에서 이상한 빛을 내고 있었다. 대사가 가까이 가니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고, 그 바위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고. 이를 이상히 여긴 대사는 이 바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여기에 불상을 조각해 나라의 평안을 빌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악사여래 마애불은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지막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얼굴은 윗부분은 넓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가름해진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길게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라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영탑사 마애불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무학대사님 조각 실력이 영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련되지는 못했으니 친근한 마음이 들어

눈과 코, 입은 길고 큼직한데 다소 서투르게 표현을 하였다. 그런 조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둔한 느낌을 준다. 이런 유형의 마애불은 고려 말기 이 지역의 마애불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인근 바위와는 다르게 하나의 산처럼 생겼는데, 마애불은 근엄한 부처이기 보다는 친근함이 드러나는 형태이다.

그리 크지 않은 암벽 면에 조각을 한 탓인지, 몸은 사각형으로 건장하나 움츠린 듯한 느낌이 든다. 무릎 또한 높고 넓어서 얼굴과 함께 둔중함을 나타낸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께는 V자 형으로 되어있어, 유려하지가 않다. 안에는 속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굵은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오랜 세월동안 마멸이 심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병을 고쳤다고 소문이 나 있다. 아마도 무학대사의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영탑사 마애불을 답사하고 난 후, 집에 와서 사진 정리를 하다가 무엇인가를 잘 못 만졌는가 보다.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일반적으로 답사를 하면, 문화재 한 점을 30~40장 정도를 찍는다. 물론 고택 등을 답사할 때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을 찍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를 않는다. 세세하게 찍어 온 사진이 온데간데없다. 마애불을 촬영하면 전 부분을 세세하게 찍어오는데, 도대체 어찌 된 것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 몇 시간을 땀을 흘리고 마음을 조리면서 카메라를 만져본다. 그런데 단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나, 이 사진은 어떻게 남은 것일까? 아마도 영탑사 약사여래 마애불이 사진을 찍어 영험이라도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내가 촬영을 하면서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답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지만, 이렇게 이상한 일을 당한 마애불이다. 영탑사 마애불이 그래서 더 영험한 것은 아닐지.

7월 6일, 일 년에 한 번 밖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봉암사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가 달려간 곳은, 봉암사 마애여래좌상을 찾아 친견을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경내를 돌기도 바쁘다고 하지만, 이런 기회에 마애여래좌상을 보지 못하면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카메라를 메고 그저 뛰다시피 달렸다.

좁은 산길, 그러나 높이 오르지를 않고 내내 평탄한 길이다. 구불거리는 길을 한 15분 정도 달렸을까? 커다란 바위틈을 지나니 넓은 암반 위로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밑으로는 맑다 못해 푸른 물이 고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동북을 향한 커다란 바위에 마애보살좌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앉아, 암반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다.



백운대에 반한 마애보살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산 51 - 1번지. 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을 ‘백운대’라고 부른단다. 이 곳 백운대의 주인인 마애보살좌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계곡물이 흐르는 동북쪽을 향해 높이 4m, 폭4.4m의 정도의 큰 바위 면에 조각을 한 마애보살좌상.

주변의 바위들, 그리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소나무, 앞으로 흐르는 맑은 물. 마애보살좌상의 주변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마애보살좌상은 머리 부분 주위를 약간 깊게 파, 감실처럼 조성을 하였다. 그리고 그 안으로 파 들어간 후 광배를 겸하는 동시에,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머리 부분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앉은 상태나 하체는, 거의 선각으로 얇게 처리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위로만 치중한 듯하다. 보관의 중앙에는 화문이 있고, 미간에는 백호가 뚜렷하다. 이마에 백호는 커다란 색깔이 있는 돌이 박혀 있는데, 이는 후에 끼운 것으로 보인다. 반월형 눈썹 아래에는 반안을 하고 있다.

자비로운 모습에 무릎을 꿇다

코는 끝이 약간 손상된 것을 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옥에 티 같은 느낌이다. 입은 아주 얇고 작게 조각을 해 전체적인 모습에 조금은 미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둥근 얼굴에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긴 귀. 마치 주걱턱과 같은 좁은 하관. 삼도가 뚜렷한 목. 그저 인자한 부처님 한 분이 백운대에 경치에 빠져 세상으로 나오시기가 싫은 듯하다.




법의는 통견인데 선각으로 처리되었으며, 군의에는 띠 매듭이 뚜렷하다. 옷 주름선은 전체적으로 유려하게 표현을 하였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마애불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가슴에 얹어 두 손으로 연꽃을 들고 있으며, 손 밑에 드러난 발은 두 손과 더불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결가부좌를 한 모습은 하체를 처리하면서 무릎사이를 넓게 하여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밑에는 연화좌가 선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저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그럴 마음이 생기지가 앉는다. 바위에 털썩 무릎을 꿇는다. 목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살님, 이제 세상으로 나가시지 않으렵니까?

이 마애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 봉암사 백운대에서 조성시기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꿇은 무릎이 아파오지만 일어날 수가 없다.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앉아 마애보살좌상과 한 세상을 더불어 살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게 커다란 바위면에 조성을 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이 풍진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정화시키고 싶지가 않으신 것일까? 오랜 시간 이곳 백운대의 주인이 되어, 시끄러운 세상을 참견하고 싶지 않으신 모습이다. 입가에 띤 잔잔한 미소에서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린다.


경기도 여주군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을 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 밑에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을 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짜임새가 간결한 고려 후기의 석탑

남한강가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부는, 아래기단은 2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위기단은 양 우주와 탱주를 조각하였다. 위에 탑신에는 양편에 우주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몸돌의 끝 부분이 마모가 심하여 양 우주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얹은 지붕돌인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다. 옥개석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일반적으로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가 날렵하게 솟아오른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단의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앙련을 크게 새겨 넣었다.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긴 층급받침은 3단과 4단으로 일정치가 않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는 사라져 버렸으며, 맨 위의 옥개석 위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상륜부를 고정시키기 위해 철골로 된 구조물을 얹었던 것 같다.

나옹화상을 기억해 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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