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일. 언젠가 찾아갔던 유관순 열사 생가지. 어릴 적 유관순 열사를 보고 유관순 누나라고 호칭을 했다. 아마 당시 여자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면서 불러대던 유관순 열사의 노랫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꽃다운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에도 만세운동을 주도해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열사의 죽음이 모든 국민 전체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이 마음이 아파 고무줄놀이를 하는 소녀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놀고는 했다. 그런 유관순 열사를 다시금 기억하게 만든 것은 201931일이 바로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제 230호 생가지를 돌아보다.

 

열사의 생가지는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1에 소재한다. 이곳은 현재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어있다. 생가가 아닌 생가지라는 것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임을 의미한다. 집은 그 당시의 것으로 복원을 했지만 당시의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 시작되는 날 찾아간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 집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초가 담장 밖에 서 있고, 사립문 안으로는 자형의 안채와 맞은편에 헛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광과 부엌, 안방이 있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이 있다. 집이라야 모두 5칸 남짓하다. 맞은편에는 2칸의 헛간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집에서 어린 한 소녀가 나라를 위해 홀연히 떨치고 일어나, 아우내 장터에서 목청을 높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차마 우산을 쓰기도 죄스럽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점점 죄스럽기만 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만다.

 

열사의 집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서야

 

천안은 독립을 상징하는 고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의 한 가운데에 유관순이라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숨져간 충혼이 있다. 19021216일 이곳에서 태어난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19193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 온 열사는 유림들과 학교, 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41, 아우내 장터에서는 3천여 명이 참가한 호서지방 최대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날 가족들은 일경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되었고 열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고문에 못 이겨 19209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다.

 

19021117(음력)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한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열사는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4월에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3월 보통과를 졸업하고, 1918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 사람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조인원이 한성에서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렇게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열사를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그런 열사의 모습이 곳곳에서 열린 것이다.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를 가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에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가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31일은 3.1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날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동녕 선생의 존재는 남다르다. 이곳 천안은 이동녕 선생 외에도 유관순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동녕 선생은 천안 목천 동리에서 태어났다. 이동년 선생의 생가는 충남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되어있다. 원래는 9칸 반의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생가지 조성을 하면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말끔하게 조성 된 이동녕 선생 생가지

 

이동녕 선생은 이병옥의 장남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1904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에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여 이사장이 되고,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으며, 그곳에 안장하였다가 1948년에 효창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다. 그 집 앞에 선생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엷은 미소를 띠우고 계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성된 선생의 모습이다. 집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모습이 찾는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려는 듯하다.

 

원래 집의 모습은 자형의 안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의 구조를 대충은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욱 9칸 반이었다고 하면 그 집이 어떤 형태로 지어졌었는가는 지역마다 갖고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대충 알 수가 있다.

 

현재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앞으로 대문채인 광채가 - 자로 있고, 뒤편에 자형의 안채가 놓여있어 튼 자형으로 공간구성을 하였다. 현재 안채는 중앙에 세 칸 대청이 있고,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끝에 다락방인 듯한 반 칸 정도의 방을 드려 모두 4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청 좌측으로 보이는 곳도 네 칸으로 구성을 했으며, 대청에 달아낸 부분에는 사랑방을 드렸고, 부엌과 방, 그리고 개방된 마루방을 놓았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를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 갈 곳은 많고 걸어야할 길도 멀다. 그리고 하루 만에 돌아본 3.1절을 되새길 수 있는 여행지. 3월 한 달은 이렇게 의미있는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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