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3)] - 포루(鋪樓)

  
▲ 동일포루 치성 위에 올려진 포루는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면서도,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 하주성
포루

 

화성의 구조물인 '포루(鋪樓)'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은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7영 3간이고, 높이는 여장 위로 6척 8촌이 솟았는데, 전체 높이는 13척이다.

 

여장의 3면은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고, 여장 안은 벽 등을 이중으로 쌓았는데, 아래 위에 네모난 총안 구멍 19개(사방 각 9촌), 누혈 11개(사방 각 4촌)을 뚫어 놓았다. 누의 위 4면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과 좌우에는 사안을 내어 놓았다. 내면에 벽돌 층계를 설치하여 오르내리게 하였다.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고,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포루의 설명)

 

병사들의 휴식공간 '포(鋪)루'

화성을 돌면서 자칫 잘못하면 착각을 하기 쉬운 구조물이 있다. 바로 '포루(鋪樓)'와 '포루(砲樓)'이다. 전자의 포루는 군사들을 보호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고, 후자의 포루는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병사들을 보호하고 쉴 수 있는 포루는 모두 5개소가 있다.

휴식공간이기도 한 포루는 성곽에서 돌출된 치성의 위에 올렸다. 화성의 포루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사면을 개방을 한 형태이고, 또 하나는 입구에 문을 내고 사면을 벽으로 둘러친 형태이다. 이런 포루의 형태 하나만 보더라도, 화성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미를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화성의 5개 포루

 

  
▲ 동일포루 동일포루의 형태
ⓒ 하주성
동일포루

 

동일포루 :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동일포루는 동문인 창룡문에서 남문인 팔달문으로 가는 첫 번째의 포루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0일에 완공을 하였다. 동일포루의 경우는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어, 성벽에서 많이 돌출이 되어있다. 또한 판문이 없이 개방형이라는 점이 다르다.

 

  
▲ 동이포루 동이포루는 봉돈을 방어하기 위한 곳이다
ⓒ 하주성
동이포루

  
▲ 동이포루 동이포루도 동일포루와 같이 판벽이 없이 개방형이다
ⓒ 하주성
동이포루

 

동이포루 : 동일포루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더 가다가 보면 동이포루가 나온다. 동이포루는 동일포루보다 일주일이 빠른 1796년 7월 3일에 완공되었다. 이 동이포루의 곁에는 화성의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인 봉돈이 있다. 아마도 이 동이포루의 역할은 봉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란 생각이다. 동이포루 역시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 서포루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5일에 완공하였다
ⓒ 하주성
서포루

  
▲ 판벽 포루의 판벽에는 총을 쏠 수 있도록 판벽에 구멍을 내었다. 서포루는 서암문을 지키기 위한 곳이다
ⓒ 하주성
서포루

 

서포루 :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하나로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5일에 완공하였으며, 서암문이 적에게 발견되어 공격 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되었다. 서암문은 서장대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팔달산 정상 부근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다. 능선으로 오르는 적을 사전에 미리 격퇴시키기 위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 북포루 북포루는 치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 하주성
북포루

  
▲ 북포루 북포루는 서북공심돈을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 하주성
북포루

 

북포루 : 북포루는 치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 나왔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다. 사방 2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사다리를 설치했다. 북포루는 서북공심돈을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 동북포루 동북포루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 하주성
동북포루

  
▲ 동북포루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동암문, 그리고 동장대인 연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곳이 위치하고 있다.
ⓒ 하주성
동북포루

 

동북포루 : 동북포루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동암문, 그리고 동장대인 연무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곳이 위치하고 있다. 양편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동북포루는 1796년 5월 15일에 완공이 되었다.

화성답사를 할 때마다 5개의 포루 중에는 보수를 하고 있는 곳들이 있었다. 이 포루의 자료사진은 2004년 8월 24일, 2011년 8월 28일, 2011년 12월 24일의 답사를 하면서 담아낸 자료들이다. 병사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면서, 적에게 군사들을 노출시키지 않는 포루. 그러면서도 유사시에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화성의 많은 구조물들이 갖는 특징이 바로 휴식과 공격,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는 점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2)] 동장대

  
▲ 동장대 화성에 주둔하는 병사들을 조련하고, 유사시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인 동장대 전경
ⓒ 하주성
동장대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 가까이 있는 동장대와 팔달산의 정상부근에 위치한 서장대이다. 동장대의 현판에는 '연무대(鍊武臺)'라고 적혀있다. 연무란 군사들을 조련한다는 뜻이다. 현재 동장대 담장 안에는 연무대 건물과 앞쪽 우측으로 솟을삼문, 그리고 좌측으로는 네 칸의 창고인 듯한 전각이 자리한다.

현재 동장대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나고 있는 <동장대도>와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성역의궤에 따른 보수 및 복원 때문이다. 2012년 임진년 1월 4일, 칼바람 속에서 동장대를 찾았다.  

 

  
▲ 동장대도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동장대도
ⓒ 하주성
동장대도


완벽한 독립공간 동장대

동장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한데다, 높이 솟아 있다. 더구나 앞으로는 평평한 너른 평지가 있어, 군사들이 훈련을 하기에 적당하다. 장용외영 군사들을 조련하던 지휘소인 동장대는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에 완공을 하였다.

동장대인 연무대가 자리한 곳은 3단으로 쌓은 대를 조성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를 설치하고 흙을 평평하게 하였으며, 바닥엔 네모난 벽돌을 깔아 놓았다. 장대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앞으로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을 만들었다.

 

  
▲ 연무대 동장대의 정면에는 연무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군사들을 조련하는 곳이란 뜻이다
ⓒ 하주성
동장대

  
▲ 연무대 연무대는 장대석으로 쌓은석축 위에 지었다
ⓒ 하주성
연무대

동장대는 독립공간이다. 아마도 화성에 들른 정조는 이곳에서 장용영 군사들이 조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곳 화성으로 도성을 옮기고, 북벌을 위한 커다란 이상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동장대는 그런 이산 정조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독립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영롱담

동장대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연무대 뒤편 담장이다. 이 담장은 '영롱담'이라고 하는데, 이 담장을 두른 이유는 연무대에서 군사들의 조련 모습을 관망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기와를 이용해 조성한 영롱담은 마치 꽃 모양을 닮았다. 구슬이 울리는 듯하다고 하여 담장 이름을 영롱담이라고 한다는데, 밑에는 문석대로 기단을 놓았다.

 

  
▲ 대 대 안에는 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그 중 1단과 2단은 네모난 전돌로 바닥을 조성했다.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하주성

  
▲ 마루 뒤편 3단에는 누마루를 깔았으며, 왕이 이곳에서 군사들의 조련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하주성
누마루

뒤편을 막은 담장을 지나 성 쪽으로 나가면 총안 앞에 놓여진 작은 '불랑기'를 볼 수 있다. 불랑기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이다. '불랑기포(佛郞機砲)'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도입한 서양식 박격포로,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전해졌다. 불랑기는 <프랑크(Frank)>라는 유럽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몸체길이는 72cm이며, 총구멍은 9.5cm이다.

이 불랑기는 몸체가 큰 1호서부터, 작은 5호까지로 구분이 된다. 불랑기포는 발사 틀의 구실을 하는 모포의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자포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사용하였으며, 불랑기포의 시용법은 당시 귀화한 박연(벨테브레)이 서양식 포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 영롱담 동장대에만 보이는 기와를 꾸민 영롱담
ⓒ 하주성
영롱담

  
▲ 영롱담 영롱담은 연무대 뒤편에 마련하였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 하주성
영롱담

  
▲ 불랑기포 서양에서 전래된 개인용 화기인 불랑기포
ⓒ 하주성
불랑기포

 정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성의 담장 안쪽으로는 커다란 철로 만든 함에 돌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돌들은 전쟁이 나면 실제로 사용을 하기도 했던 '투석(投石)'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이 무슨 전쟁무기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당시에는 이 투석만큼 손 쇱게 구할 수 있는 무기는 흔치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이 투석이 무기로써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돌이 날아다닌다고 하며 '비석(飛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투석에 사용하는 돌은, <화성성역의궤>에는, 타마다 크고 작은 돌멩이 100개씩, 10타마다 큰 돌 200근(120kg)이나 150근(90kg)짜리 3개씩을 두도록 하였다.

 

  
▲ 투석 투석은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당시의 무기였다
ⓒ 하주성
투석

작은 돌로는 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였으며, 큰 돌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굴렸을 것이다. 이렇게 완벽한 공성을 할 수 있는 화성. 손이 떨어져 나갈 듯한 찬바람 속에 찾아간 동장대. 바람을 따라 연무대가 떠나갈 듯 웃는 이산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이산 정조의 그 꿈이 아직도 후손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기 때문은 아닌지.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1)] 아름다움 강조한 휴식처, 각루

  
▲ 용연과 방화수류정 2011년 12월 24일. 오리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하고 있는 용연과 방화수류종
ⓒ 하주성
방화수류정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문인 창룡문에서 남문인 팔달문 쪽으로 가다 보면 성벽이 갑자기 아래로 굴곡져 내려가는 곳이 있다. 이곳 등성이에 '동남각루'가 자리한다. 팔달문을 지나 팔달산 정상을 향해서 오르면 좌측으로 난 등성이를 따라가는 용도가 나타나고, 그 끝에 화양루라고 부르는 '서남각루'가 자리한다.

그리고 다시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장대를 지나 서문인 화서문을 향해 가다가 보면 '서북각루'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북문인 장안문을 지나 동쪽으로 가다가 보면, 북수문인 화홍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다. 이렇게 4곳에 축조돼 있는 각루는 각기 형태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휴식과 감시를 하는 기능인 각루

이 4곳의 각루는 모두 지형적으로 시야가 트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각루에선 병사들이 쉴 수도 있고, 주변을 감시한 수도 있다. 비상시에는 각루가 각 방면의 지휘소 역할을 하기도 한다.

4곳에 서 있는 각루 중 서남각루와 동북각루는 각각 '화양루'와 '방화수류정'이라 이름을 붙일 정도로, 정자나 누각과 같이 꾸며져 있다. 이렇게 아름답게 쉼터를 꾸며 놓았다는 것도 화성의 자랑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은 모든 축조물 하나 하나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지형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 4곳의 각루는 어떤 모습으로 축조가 되어있을까? 지형과 용도에 따라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는 각루에 쉴 수 있는, 옛 장용영의 군사들은 행복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 동남각루 작은 정자처럼 지어진 동남각루. 계단을 올라 주변을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2011년 12월 24일 답사
ⓒ 하주성
동남각루

 

남수문을 지키는 동남각루

눈길에서 만난 동남각루는 작은 정자처럼 꾸며져 있다. 돌계단을 올라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동남각루는 계단 위 입구를 제외한 3면이 판벽으로 막혀있고, 전안이 뚫려있다. 동남각루는 성 안팎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성벽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그 밑을 흐르는 수원천의 남수문을 방어하기 위한 곳이다.

화성의 사라진 시설물 중 하나인 남수문은 현재 복원 공사 중이다. 그리고 동남각루의 건너편에는 남공심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공심돈도 사라졌다. 동남각루의 누각 아래에는 온돌방이 있다. 수직하는 병사들이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궁이가 있고, 반대편에는 굴뚝이 서 있다.

 

  
▲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팔달산의 남쪽 능선 끝에 자리한다. 2011년 8월 28일 답사
ⓒ 하주성
서남각루

  
▲ 서남각루 서남각루는 화양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2011년 8월 28일 답사
ⓒ 하주성
서남각루

 남쪽 능선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

2011년 8월 28일 팔달산 위로 올랐다. 그 능선 위에 마련한 서남암문 앞으로 능선을  따라 용도가 마련되어 있다. 팔달산 전체에 걸쳐 성을 쌓지 않고 그 반을 갈라 축성한 화성은 이 용도를 두고 그 끝에 서남각루를 마련하였다. 능선으로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서남암문에서 170m 거리인 용도 끝에 마련한 서남각루에는 화양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는 화성을 뜻하고 '양'은 남쪽을 뜻하는 이름이다. 서남각루는 정조 20년인 1796년 4월 1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7월 20일에 완공을 하였다. 3개월 정도의 공사기간을 가졌다. 화양루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으로 21척에 동서의 길이는 14척이다. 남쪽으로 2간은 누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러쳤으며 삼면에는 판문을 내었다.

현재 판문의 흔적이 있으나, 문은 달려있지 않다.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서남각루는 화양루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내려가다가 만난다. 2004년 8월 24일 답사
ⓒ 하주성
서북각루

  
▲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화성이 돌출된 안에 자리하고 있다. 2004년 8월 24일 답사
ⓒ 하주성
서북각루

 누마루 밑에 온돌방을 마련한 서북각루

서북각루는 서장대에서 화서문으로 내려가다가 만날 수가 있다. 2004년 8월 24일 화성답사 중 만난 서북각루.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누각 위에서 쉬고 있다. 지난해 여름 답사 때는 보수 공사 중이던 서북각루는, 위층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하고 아래층에는 온돌방을 놓았다.

동남쪽으로 1간은 청판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방을 들였다. 이는 수직하는 군사가 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북각루도 판문을 설치하였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으나, 현재 판문은 보이지 않는다. 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을 뚫어 놓았었다고 한다.

 

  
▲ 방화수류정 어느 계절에 보아도 방화수류정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2011년 12월 24일 답사
ⓒ 하주성
방화수류정

  
▲ 동북각루 2011년 8월 28일 답사 때 본 방화수류정
ⓒ 하주성
방화수류정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된 동북각루

동북각루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이다. 이 말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그럴 정도로 동북각루는 아름다운 정자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909호로 지정이 되었다.

1794년 10월 19일 완공을 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을 하는 방화수류정. 2011년 12월 24일, 한 겨울에 만나는 방화수류정은 여름과 달리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 방화수류정 2011년 8월 28일 한 여름의 더위를 피해 방화수류정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옛 장용영의 군사들도 이곳에서 쉬었을 것이다.
ⓒ 하주성
방화수류정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나게 되는 4곳의 각루. 저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각루로 인해, 화성은 그 어느 성도 견줄 수가 없는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몇 번을 돌아보아도 볼 때마다 달라져 보이는 화성. 그래서 2004년 여름 서북각루에서 만난 어르신은 "화성은 100번을 돌아보아야 그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지"라고 하셨나보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0) - 동북노대와 적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척,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척 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가공할 위력의 쇠뇌를 날리는 동북노대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고 한다.




더욱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시와 공격의 효과를 노린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안문 양편에 적대를 조성한 까닭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 된다. 그 장안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걷다(9) - 공심돈

공심돈, 우리나라의 많은 성곽 중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축조물이다. 1796년 3월 10일 완선한 서북공심돈. 공심돈이 완공을 한 이듬해인 1797년 3월 서북공심돈을 둘러 본 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서북공심돈은 그 건축물의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10호로 지정이 되었다.

원래 화성에는 모두 세 곳의 공심돈이 있었다.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그리고 남공심돈이다. 하지만 현재 남공심돈은 사라지고, 동, 서북공심돈만이 남아있다. 공심돈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동향을 살피고,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공심돈의 형태는 특이하게 조성해, 마치 화성 안에 작은 고성(古城) 하나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화서문 곁에 축조된 보물 제1710호인 서북공심돈과(위) 창룡문과 동장대 사이에 서 있는 동북공심돈(아래)

치성 위에 올린 특별한 구조물 서북공심돈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그 모양이 각각 특색이 있게 조성이 되었다,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꾸며졌다. 치성 위에 올려놓은 서북공심돈은 아래 치성은 돌로 쌓았으며, 그 위에 상부벽체는 벽돌로 쌓았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전각을 올려놓았다.



화서문 곁에 서 있는 서북공심돈은 그 안이 비어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꾸며졌다. 그러나 화성에서 출입이 제한된 곳 중 한 곳인 서북공심돈은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서운하다. 화성 안에서도 독창적인 형태로 조성이 된 서북공심돈, 아마도 정조는 이 축조물을 보고 만족하였던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구경을 하라고 한 것을 보면.


3층으로 축조된 보물로 지정이 된 서북공심돈

둥근 고성을 연상케 하는 동북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은 바로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을 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이 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 있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아름다운 공심돈에 매료당하다.

서북공심돈은 1796년 3월 10일에 완공을 하였으며,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9일에 완공이 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 그리고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에 오른 동북공심돈. 그 위에서 주변을 살펴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지금의 모습들이 왠지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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