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경내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비

위와 같이 해인사의 창건내력을 적고 있다.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70여점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해인사 경내를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탑을 비롯하여 많은 비들이 서 있다. 그 끝에 보면 비각이 하나 보인다. 이 비각에는 <원경왕사비>라고 현판이 붙어있다.

보물 제128호인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의 왕사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는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비는 신라시대의 비와는 달리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얇고 단출한 것이 특색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인 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의 스승이기도 한 원경왕사는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인종 3년인 1125년에 조성한 이 비는,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시대의 비의 특징을 보이는 원경왕사비

이 비를 보면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비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비받침을 보면 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머리가 용을 형상화 한다. 화려한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한 초기의 작품에 비해, 원경왕사비의 귀두는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 받침인 귀부에는 귀갑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결부분 양편에는 卍자 두 개를 겹쳐 조각을 하였다. 거북이의 발 등도 힘차고 날카로운 초기의 거북이에 비해, 뭉툭하게 조각이 되었다. 귀갑문 역시 초기의 것들이 작고 섬세한 것에 비해, 크고 조금은 둔하게 보인다.



귀두의 조각 역시 단조롭다. 원경왕사비는 전체적으로 초기의 비 밭침에 비해, 많이 약소화 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는 오석으로 얇게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자리 부분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여름에 만난 원경왕사비. 그 많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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