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나라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죠. 한 때는 한 해 1조원이 넘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공산품 수출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배에서 잠을 자고, 배에서 먹고 사는 항숙자(航宿者)일 뿐입니다. 노숙자와 다를 것이 없죠.”

 

219,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몸을 옴츠리게 만든다. 평택항은 바람이 딴 곳마다 조금 더 부는 듯하다. 12시 전에 도착한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늘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대개 우리가 보따리 상이라고 하는 평택항 소무역연합회의 회원들이다. 그들의 평균나이가 65세 정도라고 한다. 오늘 오후 7시 경에 출발을 해 내일 중국 땅을 밟고, 한 두 시간을 그곳에서 머문 뒤 다시 그 배를 타고 평택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몇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자 매표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우리가 흔히 보따리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소무역연합회 김광석(, 67) 교룡회장이 동행을 하고 있어 물어보았다. 1시부터 승선권을 발매를 하는데, 이렇게 미리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아직도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비좁은 대합실에는 승선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평택항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객선은 모두 4. 영성(퉁청)을 오가는 대륭호는 14시간, 위해(웨이하이)를 오가는 교동호 14시간, 연운(렌윈)을 오가는 연운호 24시간, 일조(르지오)를 오가는 일조호 20시간 동안 배를 타며 일주일에 3회를 오간다는 것이다. 이 각 항로를 오가는 배들마다 소무역연합회 회원들은 회장 등 임원을 선출해 자생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현재 평택항 소무역연합회에 소속된 회원은 모두 2,000여 명. 각 배마다 500명 정도의 회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주에 3회 중국을 왕복합니다. 오후에 출발해 그 다음 날 중국에 도착을 하면, 한 두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배를 타고 평택항을 돌아옵니다. 배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하는 것이죠. 1년이면 10개월을 배에서 생활을 하고, 한국에서 땅을 밟고 있는 기간을 불과 2개월 정도입니다

 

한 때는 그래도 살만했는데

 

이렇게 중국을 오가며 소무역을 하던 보따리상들이 공산품을 내다 팔아 벌어들인 외화는 년 간 1조원에 당했다. 인천, 평택, 군산을 이용해 소무역을 하던 보따리상은 5,500여명 정도. 그들은 우리나라의 공산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팔고, 그곳에서 농산물을 사와 그것으로 돈벌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2011년 말에 이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것은 한국세관이 중국에서 들여오는 농산물 불법 반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들여오는 모든 공산품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보복성이긴 하지만 보따리상들은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세관은 한 사람이 중국에서 들여올 수 있는 농산물을 5kg 이내로 줄였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판매를 목적으로 물건을 들여오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5kg의 농산물인 깨, 팥 등 중국에서 농산물을 들여와 팔면, 그래도 한 번 다녀 올 때 5만 원 정도의 이익을 올렸어요. 일주에 3회를 다녀오니까 15만원, 한 달이면 60~70만 원 정도를 벌어왔죠. 그러던 것이 20124월까지이고 그 뒤로는 단속강화를 하면서 한번 다녀오면 22,000~25,000원 정도의 이익을 내죠. 그 돈에서 밥 한 그릇 사 먹으면 한번 왕복에 10,000원 벌이가 고작입니다.”

 

대규모 수입상들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농산물을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수입농산물 가격이 폭락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행법으로는 우리가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한국에서 팔면 범법입니다. 집에서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보따리상들을 위해 눈감아 준다는 것이죠. 우리가 세관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팔면 밀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조호를 타고 중국을 오가면서 소무역을 하고 있는 민양기(, 54) 일조회장은 앞으로 살아가기가 막막하다면서 한숨을 내쉰다. 벌써 10년이나 소무역을 하고 있지만, 지금이 최악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한 때는 우리 보따리상이 농산물을 중국에 수출하는 금액이 년 간 12천억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오는 것이 1,700억 정도였죠. 그 때는 소무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저희들이 밀수꾼이 되어버렸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농산물에서 발암물질이 검사가 되었다고만 하면, 저희 보따리상들인 소무역연합회가 도마 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정작 대량으로 수입을 하는 무역상들은 늘 면죄부를 받고는 하죠.”

 

평택항 소무역엽합회 최태용(, 64) 이사장은 자신도 중국을 오가지만 답답하기만 하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와도 2만 원 정도 밖에 이문이 없자, 밥값이라도 주리려고 밥을 싸들고 배를 타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비좁은 대합실, 농산물수입 규제 완화해야

 

한 때는 서해안시대를 여는 수출입의 중심에 섰던 보따리상이다. 그러나 한국 세관이 중국 농산물의 반입을 강력히 규제하자, 중국에서도 2011년 말과 2012년 초부터 한국에서 들어오는 공산품인 옷, 화장품, 커피, 벽지 등 모든 것을 막아버렸다. 현재까지도 그 규제는 풀리지가 않아, 중국으로는 아무것도 갖고 갈 수가 없다는 것.

 

생각해 보면

여보게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나

보따리 아닌 적 어디 있었겠는가?

 

배부르고 등 따스했던

그리하여 이번 생애 지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책보 둘러메고 깡충거리며

징검다리 뛰어 건넜던 어린시절

 

내가 업혔고

그 다음 내 새끼 둘러맸던 포대기

무거웠지만 아름다웠던 날들

그것도 보따리였네(하략)

 

김우영 시인의 우리 보따리 인생 아닌 적 있었겠는가?’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사실 우리민족의 상업의 근간은 보따리였다. 예전 보부상이 그랬고, 방물장수가 그랬다. 그들은 소규모 상인이었지만 전국 구석구석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던 그들의 후손들이 이제 생계마저 막막해진 것이다.

 

 

저희의 바람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대합실을 좀 넓혀달라는 것입니다. 명색이 국제여객터미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비좁아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리고 고시를 바꿔 소무역상들이 들여오는 농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생계를 이어가는 보따리상들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바람이죠.”

 

보따리상들을 위해서 세관 측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일어서는 평택항 소무역연합회 최태용 이사장은 요즈음 기자들만 왔다 가면 보따리상들이 밀수업자처럼 표현을 한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민감하다라고 한다. 혼자는 카메라를 들고 대합실 쪽으로 가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그만큼 보따리상들이 내일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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