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문화재 답사는 답사라는 특성상 날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그때그때 답사를 해서, 날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 기사가 일반적인 뉴스의 생성과 달리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2박 3일 정도 답사를 나가게 되면, 15~20점 정도의 문화재를 담아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에서 조금 위편에 보면, 경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일대가 바로 승안사지이다. 승안사지는 통일신라 때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승안사는 성종 12년인 1481년에 편찬된 『둥국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는 절이다.

 

승안사지는 어떻게 사라졌을까?

 

12월이 다 지나기 전에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승안사지다. 좁은 길로 마을들을 이리저리 지나 도착한 승안사지. 이곳에는 보물 제294호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석불좌상과 2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고 300여년 정도가 지난, 정조 23년인 1799년에 발간된 『범우고』에는 승안사지가 사라지고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안사는 언제 무슨 일에 의해서 사라진 것일까? 현재 있는 석불좌상의 크기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의 거대불로 보인다. 고려시대 때에 이렇게 큰 거대불을 조성한 이유는 북벌의 상징이다.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세월의 흔적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 파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안사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비례가 맞지 않아 어색한 석조여래좌상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 많은 석조문화재가 조성이 되었다. 그 중에서 석조불상과 석탑 등은 상당수에 이른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시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석조여래좌상을 보면 심하게 훼손이 되어 본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머리는 민머리인 듯한 이 석조여래좌상은 모든 비율이 제대로 맞지가 않는다. 눈은 움푹 들어간 듯 보이며 코가 유난히 크다. 얼굴이 길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여래좌상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석인과 같은 모습에 가깝다. 좁은 어깨로 인해 전체적인 체구는 왜소해 보이며, 유난히 큰 코와 일자로 꽉 다문 입으로 인해 엄격한 인상을 풍긴다.

 

목 부분이 떨어진 것을 붙여놓은 자국이 남아있으며,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쳤다. 옷의 주름도 사선으로 비스듬히 나타나고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성의 비례가 잘 맞지가 않아 어색해 보인다.

 

잘린 팔과 사라진 하반신

 

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오른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거기다가 좌상의 발 부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현재 좌상의 다리 부분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심하게 훼손이 된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거대한 석불의 팔과 다리 부분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훼손이 되었을까?

 

 

조선조 성종 12년 부터 정조 23년 사이에 이곳에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융성하던 승안사라는 사찰이 사라지고, 이렇게 거대석불이 심하게 훼손을 입을 것을 볼 때, 어떠한 재난을 당했다는 것을 추정할 뿐이다. 기록문화에 약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바로 이런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라도 기록을 남겨 후손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에, 바쁜 답사 길을 재촉하는가 보다.

수원시청 청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의 방송인 iTV 스튜디오에서는, 재미있는 토크 한마당이 펼쳐졌다. 염태영 수원시장과 탤런트인 박철이 ‘엄장토크’라고 하여 키워드를 갖고 한바탕 설전을 벌인 것이다. 거기다가 패널로 참석한 시민들까지 시장과 담이 없는 대화의 창구까지 마련한 자리였다.

 

사회자인 탤런트인 박철이 이날 염태영 시장에게 제시한 키워드는, 나는 유재석이다, 일편단심 짝사랑, 올빼미, 스타병이라는 네 가지였다. 그 네 가지 키워드에 대한 염태영 시장의 설명이 이어지고, 이어서 패널로 참가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직접 질문하고 설명을 듣는 그런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소통의 창구가 된 염장토크

 

한 마디로 염장토크를 보면서 정말로 바람직한 시민들과의 소통이란 생각이다. 물론 시장이란 직을 수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현장에서 그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시정을 맡아 일을 처리하면서, 느티나무 밑 대화 등 다각도의 모임을 갖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는 했다.

 

사실 염태영 수원시장에 대해 처음에는 환경운동가로서, 또는 시민운동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시정을 어떻게 끌어나갈 것인가는 늘 궁금했던 차였다. 그리고 그의 솔직한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 염장토크에서의 속풀이라면 일부나마 그가 시장으로서 직함을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염장토크 키워드’, 염장질은 제대로 한겨?

 

네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가는 염장토크는, 지금까지 지자체의 단체장이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을 탈피했다. 2013년 1월 1일 12시부터 수원 iTV(인터넷 방송)를 통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이 방송을 통해서, 수원시민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염태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염태영 수원시장이 사회자인 박철이 제시한 키워드에 대한 딥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유재석이다!’에 대한 답은 수원의 토박이로써 언제까지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국민 MC라는 유재석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 설령 시장의 임기가 끝나도 언제까지라고 시민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것이다. 5기 행정이 들어서면서 ‘사람’ 중심의 시정을 펼쳐나가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며, 수원 토박이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사고하는 것이다.

 

‘일편단심 짝사랑’ 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내가 서울시를 너무 짝사랑하고 있어 서울시의 것을 베낀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우리 수원의 것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마을만들기 등은 우리가 먼저 시작한 시민들이 직접 참여를 하는 거버넌스 행정이다. 우리는 예산도 시민들이 참여를 해서 책정을 한다. 내가 짝사랑을 하는 것은 오직 수원일 뿐이다.“ 라고.

 

‘올빼미!’ 라는 키워드에 대한 답은 염태영 수원시장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올빼미라는 키워드에 딱 맞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시장은 “시장이란 자리는 솔직히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3D보다 더해 4D가 적당한 표현이다”라며, ”새벽시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시민들과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결재시간까지도 전자결재로 처리하기가 일쑤이다.“ 라면서 보고절차도 간소화를 시키겠다는 것.

 

‘스타병!’ 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내가 행사장에 늦게 나타난다고 붙인 것 같은데, 너무 많은 일정을 소화하다가 보니 조금 늦는다. 이해를 해 달라”며 웃음으로 넘기기도. 염시장은 솔직히 자신은 스타가 되고 싶단다.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는 스타가 아니라, 시정을 잘 처리하고 시민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선진국형 자자체장인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


 

 

시민 패널과의 대화와 빠진 이야기들

 

염태영 수원시장과 사회자인 박철의 토크 한 마당은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우선은  시정을 펼쳐나가는 시장에게 있어 개인적인 것보다는 시정의 이슈를 질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토크의 경우 개인적인 사안도 중요하지만, 제작진에서는 그 전에 수원시의 전반적인 이슈를 검토했더라면, 더 좋은 토크가 되었을 것이란 점이 아쉬움이다.

 

방송사처럼 넓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시청 청사 안에 마련한 좁은 스튜디오 안은 찜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화를 열어가는 열기도 높았지만 좁은 스튜디오에서 에어컨을 작동할 수 없어, 몇 차례나 쉬어가야만 했으니 말이다. 11명의 시민 패널들은 각자 자신이 당면한 사안을 질문하고, 그것을 사회자가 정리를 해 시장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시민 패널들의 질문은 다양했다. ‘취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것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취업준비생 이진원), ’기간제 근로자인데 비정규직 문제의 수원시 해결방안은 무엇인가?‘(수원시 산하기관 근무 정양희), ‘수원은 축구의 메카다. 그런데 요즈음 너무 프로야구 10구단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권선축구연합회장 이상대), ‘수원의 밤길이 무섭다. 해결방법은 없는가?’(회사원 김성경), ‘2013년 9월 한 달, 행궁동 일대에서 ‘생태교통페스티벌’이 열린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든다고 하는데, 주민들의 불편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행궁동 주민 도종호), ’도서관의 증설과 공공청사 한편에 북카페 등을 수용하는 것은 어떤가?‘(독서지도강사 김소라), ’공직에서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실버세대에 대한 복지정책은 어떠한가?‘(송죽동 이주섭)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러한 시민패널 들의 질문에 대해 염태영 수원시장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꼼꼼히 답변을 했다. 그 중 현실적인 사안으로 중요한 취업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답변을 보면

 

취업문제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젊은 졸업자들의 문제이다. 수원시는 직장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행정의 경험을 쌓는 동시에 단기적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1일 32,900원을 지급하지만, 이것도 신청을 하는 대학생들이 너무 많아, 기회가 모두 주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는 우리경제구조의 양극화문제인데, 우리시는 청년창업지원센타를 통해 창업을 배려하고, 기업유치, 취업박람회 등을 통해 기회의 문을 열어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에 소재한 기업인 삼성전자의 협력회사들이나, SKC, R·D광교테크노벨리, 고색산업단지 등에 양질의 고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답변을 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는 “수원시 공무원 2,500명 중 600명 안팎이 비정규직이다. 2013년부터는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다만 그 조건은 2년 근무자에 한해서 만이다. 현재 산하기관도 검토 중에 있다. 이 부분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돼야 한다. 정원과 직급이 국가권한이어서 지자체의 자율권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토크나 패널들 간의 이야기 속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시 공무원들이 제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킨다고 싫다고 한단다. 아마 다음에 제가 다시 시장 출마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절반 이상이 반대를 할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잘사는 수원, 사람답게 사는 수원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수원의 모든 사람들이 살고 싶은 수원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당신들의 아이들이 그 행복함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일을 좀 더 하자. 그리고 우리 수원이 전국 청렴도에서 꼴찌였다. 하지만 올 해는 25위로 뛰어 올랐다. 내년에는 상위권으로 도약하자. 그것이 바로 휴면시티 수원, 사람이 반가운 수원이 되는 길이다.” 라고.

 

두 시간 반 동안 진행이 된 ‘염장토크’는 이렇게 끝났다. 패널로 참가한 한 시민은 “시장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수원에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 앞으로도 이런 소통의 창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걱정을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인사는 늘 그렇다. ‘밥은 먹고 사냐?’ 라는 질문이다. 물론 밥을 굶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질문 속에는 혼자 생활을 하면서 혹 귀찮다고 제 때 끼니를 때우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날마다 취재한다고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저녁이 되면 거의 술자리에 있는 나를 보고 걱정스러워 하는 말일 것이다. 혹은 저것이 밤에 술을 먹고 아침에 귀찮다고 혹 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 정말 듣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항상 “왜 그러고 혼자 사냐?” 라는 속내가 있기 때문이다.

 

12월 23일(일) 아침 상

 

걱정마라 아침은 세상없어도 해 먹는다

 

여기저기 기사를 쓰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보면, 아침 이외에는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인가 아침은 세상없어도 꼭 챙겨먹는 버릇이 생겼다. 천성이 그래서인가는 모르지만, 밥을 먹을 때 반찬을 통째로 내 먹기가 죽기보다 싫다. 그런 것 하나가 내가 괜히 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끔 TV 등에서 방영을 하는 것을 보면,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찬을 그릇째 먹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화면을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는 살지 말자.’고 늘 생각을 한다. 물론 아직은 남들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찾아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걱정만 수 없이 하는 지인들. 그들에게 나 잘 살고 있으니 걱정을 하지 말라고 전해고 싶은 마음이다.

 

나, 이렇게 먹고 산다.

 

예전에는 밥을 먹을 때 부친께서 국이 없으면 꼭 물이라도 한 그릇 곁에 두어야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국’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도 늙어 가는가 보다. 성격이 까다로워서인지 찬은 꼭 용기에 덜어서 차려 먹는다.

 

지난 일요일부터 왜 아침 밥상을 찍고 싶었을까? 아마도 지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전날 아무리 술에 떡이 돼서 들어와도, 아침은 일찍 일어나 꼭 챙겨먹는다. ‘밥심‘이라는 말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25일)까지 3일간 내가 챙겨먹은 아침밥상은 이렇다.

 

 

일요일 아침밥상(12월 23일)

 

밥이야 아침마다 해 먹는 것이니 늘 따듯한 밥을 먹는다. 항상 하는 말이 얼마나 더 먹겠다고 식은 밥을 먹느냐고 반문을 하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에 국은 미역국을 끓이고 찬은 항상 4~5가지 정도를 차린다. 이날 찬은 김, 오징어 채 무침, 된장에 넣었던 깻잎, 그리고 파김치였다.

 

 

월요일 아침밥상(12월 24일)

 

전날 과하게 마셨더니 입이 칼칼하다. 이런 날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묵은지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다. 이상하게 묵은지 찌개를 먹으면 속이 확 풀리는 듯하다. 참 식성마저 남다른 것인지. 월요일 아침에 반찬은 김(워낙 좋아하는 고로)과 연근뿌리, 장조림, 그리고 꼴뚜기젖으로 아침을.

 

 

화요일 아침밥상(12월 25일)

 

밤이 새도록 책 교정을 보느라 새벽 4시가 넘어서 눈을 부쳤다. 6시 정도에 눈을 떴으나 머리가 조금 무겁다.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아, 북어국을 끓였다. 먹을 때 고춧가루를 치면 몸살기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찬은 고추장아치와 조개젖, 김치와 계란부침이다. 가급적 반찬은 매일 다르게 먹는 편이다.

 

그래도 이렇게 냉장고 한 가득 반찬은 많은 이유는 주변의 덕이다. 살다가 보니 아직 인심은 크게 잃지 않았는지, 여기저기서 걱정들을 하고 찬이라도 한 통씩 갖다가 주신다. 아마도 주변에 그런 좋은 이웃이 있어 꽤나 버티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에게 밥은 먹고 사냐?는 질문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보다 잘 먹고 살고 있으니. 그러고보니 우리 집 냉장고에 반찬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숱한 문화재를 찬탈해간 일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유산에 어지간히 욕심을 내었던 것만 같다.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예, 조선 전체를 들고 가지 그랬어!”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하고 싶을 정도로 일제는, 우리 문화재를 수도 없이 일본으로 가져갔다.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76호인 발산리 오층석탑. 지금은 오층은 사라지고 사층만 남아있다. 이층의 기단위에 세운 이 오층석탑은 원래는 완주군 고삼면 삼기리 봉산사 터에 남아있던 석탑이다. 이 석탑을 군산 개정면에 농장을 갖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오층석탑

 

아마도 처음에는 이 석탑도 오층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의 맨 위층이 사라졌다는 것은, 다 들고 갈 수 없어, 그 위층만 가져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석탑은 신라 탑의 모양을 본 따 제작한 우수한 석조공예품이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정리가 된 고려 탑의 조형미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탑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그 후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겨 딴 곳에 터를 잡고 있지만, 이 석탑과 석등은 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소재가 분명한 것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 놓아둔다는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에 반하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받침돌은 신라 석탑을 모방하였다. 네 개의 기둥을 새긴 몸돌인 탑신석과 머릿돌인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삼단 받침으로 꾸민 지붕돌은 끝이 약간 위로 치켜져 있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백제탑의 양식이 화려하고, 신라탑의 모습은 장중하다고 한다. 고려 초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면 이런 백제탑과 신라탑의 형태를 모방해,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탑의 형태를 창출해 내었다.

 

 

그 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붕돌인 옥개석의 추녀 끝이다. 마치 한옥의 처마가 치켜 올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듯, 그렇게 엷은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칫 딱딱한 석조 조형물인 석탑을, 그 곡선하나가 여유로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붕돌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올라간 곡선이 고려탑의 특징이다.

 

투박한 이층기단을 몸돌이 살려내다

 

발산리 오층석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을 올린 탑이다. 이층의 기단 중 아래기단은 삼단의 낮은 단으로 쌓았는데, 그 낮은 기단 안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하였다. 고려의 석조물에서 보이는 안상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 기단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표현을 하였다. 상층 기단의 몸돌에는 우주를 표현하고, 지붕돌인 덮개돌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그런 형태가 탑의 몸돌과 구분이 된다.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오층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꾸밈새 안에는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자칫 기단의 투박함이 몸돌이 표현한 부드러움에 묻혀있다. 돌을 이용한 탑을 조성하면서도, 나름 그 아름다움을 창출해 낸 고려탑. 그 처마 선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