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렸다.

 

 

 

대좌 위에 올라앉으면 나도 부처가 되려나?

 

고달사지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석불대좌의 받침돌은 상중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새롭게 보인 고달사지 석조

 

고달사지 경내에 석조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석조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석조를 살펴보니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석조를 보았지만 이렇게 안내판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화재를 자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년 세월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주 e수원뉴스 기자들과 함께 찾아갔던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문화재들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유형문화재인 석조 1점 등이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거동한 불편한 사람들도 경내를 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좀에서 보면 고달사지는 무리없이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고달사지를 찾아 선조들의 예혼(藝魂)을 느껴보기 바란다.

 

그동안 단풍이 아름다운 곳을 먾이도 다녀보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 단풍이란 생각이다.

우연히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모악산 단풍. 시리도록 붉다는 그 단풍이 아직도 선에 선하다.  

 

 

 

9월이다. 올해 그토록 폭염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제 얼마 안 있으면 산과 들의 단풍이 멋에 겨워 넘실거릴 계절이다. 이런 계절에 떠나는 가을여행. 역시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이 풍족한 계절에 찾아가는 문화역사기행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풍요의 계절 가을. 사람들은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그저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렇게 찾아가고 싶은 많은 곳 중, 그레도 역사가 있고 문화가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고찰(古刹)이라도 좋고 고택(古宅)인들 관계있으랴.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계절을 따라 찾아가는 가을문화역사기행, 그 첫 번째는 여주시 신륵사로 정했다.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기도 판소리인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이다.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진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9월에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아름답던 남한강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여강 ·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아 놓았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명창 염계달이 피를 토하던 강월헌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 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이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그 곳을 눈여겨본다.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피서를 떠난다고 하지만 막상 가볍게 길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우선을 며칠 나들이를 하면서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찮지만 오고가는 길이 꽉 막혀 피서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멀리가지 않고 수원인근에서 피서를 즐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수원을 벗어나 하루 동안 시원한 숲과 계곡을 즐길 수 있는 곳. 그런 곳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런 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다. 더욱 경비도 많이 필요 없다. 그저 주유비와 식사비 정도 들여 피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 천년전통사찰을 찾아가면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굳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숲에서 느끼는 시원한 바람과 계곡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수원에서 불과 한 시간 30분 정도에 있는 곳이다.

 

전통사찰은 대개 산 속에 자리하고 있거나 평지에 있다고 해도 산을 기고 있기 마련이다. 어느 곳을 가던지 숲이 있고 물이 있다. 계곡이 없다면 주변에 있는 물가를 찾아가면 된다. 아침에 수원을 출발하면 오고가는 길에 맛있는 음식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경비를 줄여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천년고찰 양평 사나사 계곡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사나사 계곡은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하며 폭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용문산에 위치한다. 사나사 계곡에 백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절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쉼터와 맑은 물, 숲이 한데 어우러져 수원인근에서 찾아가기가 편하다.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피서지로 추천한다.

 

 

숲이 아름다운 곳 안산 대부도 쌍계사

 

흔히 쌍계사하면 하동 쌍계사를 떠올리지만, 그 외에 여러 곳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들이 있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무더위를 식힌다. 쌍계사는 물이 없지만 대부도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근에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걸으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랜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양평 용문사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에 소재한 용문사.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산에 자리하고 있는 용문사는 절을 두고 잠시만 숲으로 길을 들어서면 시원한 물이 흐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가는 숲길도 일품이지만 무더운 여름철 찾아들어간 곳에서 만나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면 폐부 속까지 시원함을 느낀다. 인근에는 용계계곡 등 맑은 물과 숲이 어우러지는 곳이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안산시 대부도 고찰 쌍계사를 찾아 오솔길을 거닐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쌍계사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92cm로 좁은 어깨에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마 위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귀가 어깨 위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눈두덩이와 양미간이 각이 져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의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래좌상

 

두터운 법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짧게 늘어져 반전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일부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로 넘어가게 조형하였다. 왼쪽 어깨의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법의자락과 겹쳐져 유려한 U자형을 이룬다. 하반신을 덮은 법의자락은 중앙의 S자형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짧게 늘어져 있다.

 

법의 안쪽에는 복견의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를 끈으로 묶어 윗부분에 5개의 앙연형 주름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법의자락이 목 주위와 등을 V자형으로 덮어 조선후기 불상의 후면에 나타난 표현과 차이를 가진다. 따로 제작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이지만, 이와 같은 손의 자세는 조선후기 제작된 아미타불을 비롯한 약사불과 지장보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좌는 연꽃이 위를 향한 앙연의 연화좌와 삼단을 이룬 팔각대좌가 한 쌍을 이루고, 팔각대좌 중단에 하늘을 날고 있는 용과 천인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아마도 바세계의 중생을 돌보기 위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4년 만에 달라진 쌍계사를 찾아가다

 

201435일 이곳을 들렸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좋은 글은 늘 마음속에 새겨두는 버릇이 있어서인가? 한 잔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산다는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인가? 하지만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잠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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