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계절에 떠난 무작정 여행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16, 무작정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로움인가? 1시간여를 달려 찾아간 곳은 여주시였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서울서 옮겨온 감고당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 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전형적인 중부지방 민가로 지어진 집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세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 음식이나 기념품, 전통혼래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은 늘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두 명의 황후가 살았던 집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작업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감고당 옆에 서 있는 소원바위

 

감고당과 옆 민가마을 뒤편에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소원바위라고 부른다.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씨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한 부인이 바로 나중에 한창부부인이 된 한산 이씨다. 이들 부부사이에선 1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부부는 집 인근에 소재한 바위를 찾아가 정성으로 자녀를 점지해 주기를 빌었다.

 

정성이 효험을 보았는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딸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날인 18511117일 새벽, 붉은 빛이 비치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전하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나중에 큰일을 할 것을 예견하는 전조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소원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와 소원바위, 김고당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하다. 한국민속촌을 찾아가면 99칸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다. 바로 수원 팔달산 밑 남창동에 자리하고 있던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축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 내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고택 200여 채를 돌아보았다. 그 많은 집을 보면서 늘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이 바로 이 거대한 고택이 옛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돌아보기 위해 수원화성 안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을에 떠난 여행,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만든 것이 바로 남창동 99칸의 양반가이다.

 

가을철 놀이에 빠진 사람들 부러워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지난 28일 잠시 틈을 내어 가까운 여주로 달려갔다. 매주 한번은 이웃 도시에 있는 문화재와 명소 등을 찾아보는 것이 요즈음 유일한 낙이다. 마침 날씨도 좋고 단풍철이라 길이 많이 막힐 줄 알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영동고속도로애도 그렇게 많은 차들이 몰리지 않는다. 수원을 출발해 한 시간 남짓 걸려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벌써 몇 차례나 이곳을 들렸지만 들릴 때마다 가슴 한 편이 아린 것은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 잘 보여줘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와 안채는 자 형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 가옥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중문과 이어져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대청과 건넌방이 이어져 있다. 건넌방의 툇마루는 높게 놓고 아래편에 아궁이를 놓았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살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고택이 부럽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생가를 찾아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연못에는 어린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와 연못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물고기들을 보고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연과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마련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우리 수원의 행궁동에도 한옥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즐길만한 곳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이나 가족단위로 함께 즐길 곳을 찾아다닌다. 그런 곳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올 것이란 생각이다. 한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늘 아쉬웠던 점은 바로 민속촌에 소재하고 있는 남창동 양반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이 수원에 그대로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도 저런 공간 하나 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화성 서신면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오얏리길 56(궁평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5호인 화성 정용래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집이다.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와 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주말만 되면 답사를 나간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해 늘 몸이 굼실거리는 것이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 번 답사를 나서면 7~8곳을 돌아오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그동안 게으름을 반성하는 뜻에서이다.

 

화성시는 일개 지역치고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래서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몇 주에 걸쳐 돌아보기로 한 곳이다. 7일 이른 시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화성시 서신면을 중점적으로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답사를 즐기면서 하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초가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소

 

서신면 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산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기와집인 정용채 가옥과 이웃하고 있다. 위쪽 정용채 가옥은 기와집이고 아래쪽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한 곳에서 기와와 초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용래 가옥은 항상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앞으로는 소로가 나 있고 대문 앞에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이 꽤 된 이 느티나무가 정용래 가옥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집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밖에서 촬영을 하자니 산비탈까지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어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다.

 

 

 

 

집 앞 도로에서는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굴뚝이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 것이 이곳 사랑은 부엌이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 이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정용래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볼썽사나운 문화재 안내판, 문화재명 바꾼 지가 언제인데

 

대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저 집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의 모습을 이곳저곳 꼼꼼히 촬영을 마치고나서 문화재 안내판을 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판은 색이 다 흐려져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거기다가 중요민속문화재로 문화재 명칭이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요민속자료라는 안내판과 안내 석물에 적혀 있다.

 

화성시 몇 곳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명칭이 바뀐 것을 교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화재명칭 하나 제대로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요민속문화재라고 해도 관리는 해당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성시 모든 곳의 민속문화재는 민속자료라고 쓴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이유는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작은 정성이다. 문화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좋은 것을 칭찬해주고 문제가 있는 것은 시정을 요구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힘이나마 후손들에게 온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문화재 안내판을 정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교체한다고 해서 화성시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화성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는 관내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정비를 해주기 바란다.

 

 

여주시 향토유적 이인영 생가 관리 엉망

 

한 마디로 부끄럽다. 외지인들이 와서 이곳을 찾기라도 한다면 무슨 망신인가? 더구나 요즈음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지역 문화재 관람을 다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중국인 요우커를 비롯해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지역에 들어와 쓰고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문화재를 이용한 지자체의 수 입 늘리기도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여주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남한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륵사를 비롯해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등 불교유적은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그리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이 문화재를 잘 이용하면 적지 않은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주시이다.

 

1, 여주에서 430일부터 시작한 도자기축제를 돌아볼 겸 여주로 향했다. 휴일인데도 예년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오전 11) 축제장 안은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는다. 매장 안에는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관계자들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상교리 이인영 생가지를 찾아가다

 

도자기축제장을 돌아본 후 북내면 상교리로 향했다.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면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있다.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이다. 혹 문화재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라도 되었을까하는 우려에서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1119-16에는 여주시 향토유적 제17(2011117일 지정)인 의병장 이인영의 생가가 소재한다. 이인영은 여주사람으로 고종 4년인 1867년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이인영의 생가 앞에는 의병대장 중남 이인영 기념비가 서 있다.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인영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유인석의 제천전투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의병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이 재기하자, 그 해 9월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에 올랐다.

 

 

 

190711월 전 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군사장에 허위, 관동총대장에 민긍호 등을 선정한 뒤,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조약을 무효로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결했다. 그러나 각 도의 의병 중에는 제 날짜에 도착을 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기밀을 알아차린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해옴에 따라 다시 여주까지 퇴각을 하였다.

 

여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인영은 대치를 하고 있던 1908128일 문경에 거주하던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인영은 "충은 효이고, 효는 충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후사를 군사장인 허위에게 맡기고 본가로 급히 내려갔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재기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 잡혀 순국을 하였다.

 

 

 

폐허가 된 이인영 생가지 정말 부끄럽다

 

요즈음은 문화가 대세라고 한다. 한류열품을 타고 지자체는 물론 각 문화예술단체들도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인영의 생가는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교육 자료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인영이 이야기는 귀감이 될 수 있는 교육적 가치를 갖는다.

 

1일 찾아간 상교리 이인영 생가. 한 마디로 창피하다. 남들이 볼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했으면 당연히 관리도 해야 한다. 하지만 생가지는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생가지 이인영 기념비 안쪽으로는 차량을 주차해 놓았고, 생가지의 초가지붕은 짚이 바람에 들고 일어서 까치집이 되었다.

 

 

 

대청마루에는 짐승의 분뇨가 굴러다니고 있고 부엌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잠이라도 자려고 했는지 접이식 침대까지 한 구석에 놓여있다. 먼지는 수북이 쌓여있고 초가 이엉은 언제 갈았는지 짚은 시커멓게 변했다. 거기다가 바람에 날려 들고 일어나 볼썽사납게 되었다. 한 마디로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국기지정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관리는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인물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이인영의 생가지는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어찌 지역 향토유적 관리를 이렇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주시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이인영 생가지를 재정비를 해야 한다. 이런 꼴을 보일 것 같으면 아예 이인영생가지 안내판을 없애야하지 않을까? 이런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문화재답사 30년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청탁이

 

문화재답사 30. 말이 30년이지 그동안 숱한 고생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것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일이다. 날이 추운 겨울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억수장마가 쏟아지는 날에도 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우리 문화재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엄청나다. 고생을 해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바로 짐 하나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전국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하루에 먼 거리를 걷기도 부지기수였다. 길도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 상여막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인 자료들이 방안 가득하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내기 이 짓을 해야 할까라는 자문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할까? 라는 대답 때문에 30년을 길에 서 있었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지, 혹 누구에게 훼파는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걸려온 전화

 

하주성 기자님이세요?”

, 그렇습니다.”

저는 KBS TV 여유만만의 작가인데요. 혹 남양주 화길옹주님이 사시던 궁집에 대한 자료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화길옹주 고택은 왜요?”

저희 프로그램에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인데요. 화길옹주님 고택을 촬영할 수가 없어서요.”

 

궁집은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이자, 정조대왕의 막내고모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은 남양주시 평내동 426-1에 소재하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옹주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이 궁집을 돌아보면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을 알 것 같다. 하긴 영조에게 아들은 유일하게 사도세자 한 명 뿐이었다. 이 궁집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 등을 보내어 집을 지었다고 해서 궁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공주는 50칸 이상의 집을 지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 집은 그러한 법도에 따라 칸수를 꽉 채운 집이다.

 

 

 

 

보수공사로 인해 관람이 금지된 궁집

 

날이 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른다. 안내판을 보고 땀을 흘리며 찾아간 궁집 입구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인터넷을 보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훼손을 하는 바람에 아예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번을 더 이야기를 하고서야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궁집은 집 자체의 치목이나 석재 등이 뛰어나다. 영조가 막내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고,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1765~1772) 이곳에 거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이 집은 1765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치목과 석재 등을 직접 내려 보낸 영조

 

궁집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집의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이 된 이 집은 안채를 자 형으로 꾸몄다. 안채는 부엌이 4,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침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드렸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광이 있고, 그 앞에 안마당을 가로 질러 우측 날개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정면으로는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는 대청과 부엌을 두었다. 안방 앞에서 대청까지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좌측 날개채에는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자 형으로 방 두 칸 이외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을 시켜 누정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이 누정은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깐 형태이다. 기단 역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집의 품위를 높인 듯하다. 사랑채의 북쪽에는 기단을 높이 쌓았는데 그 위에 우물을 있다. 이 우물은 안채 큰 부엌의 뒷문 쪽이기도 하다.

 

 

 

 

격조 높은 화길옹주의 궁집

 

화길옹주가 살았다는 이 궁집은 한 마디로 그 어느 집보다 격조가 있는 집이다. 양반가의 큰 집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리 크지 않은 집 구조를 갖고 이렇게 쓰임새 있게 지은 집 구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 중에서도 사랑채 뒤편 장대석을 이용해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마련한 우물과 배수시설은 가히 일품이다.

 

우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석재로 물이 빠지는 배수시설을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하여 배수구가 사랑채 뒤편으로 빠지게 하였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있는 궁집의 건조함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가 임수(臨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곳에서 한 세상을 살다간 화길옹주. 방송에서 자막으로 소개가 된 문화재전문기자라는 명칭. 30년 동안 오로지 우리 문화재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땀을 흘리다보니 이젠 방송사에서조차 도움을 청해온다. 적어도 30년은 한 자리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옛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덥거나 춥거나 눈이 오거니 비기 내리거나 스승님의 말씀 한 마디가 지금껏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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