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아까운 문화재들이 제 자리를 떠나, 먼 이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리고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 중 일부가 돌아오긴 했지만, 찬탈당한 수많은 문화재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아까운 문화재 한 점이, 비록 제자리는 떠났지만 그래도 우리 땅에 남아있어 안도의 숨을 쉬게 만든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수많은 석등 중에서 유일하게 간주석에 조각을 한 석등이 있다. 바로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교정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34호 발산리 석등이다. 이 석등은 이곳에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 일본으로 갖고 가기 위해 전북 완주에 있는 석등을 자신의 농장으로 옮겨 온 것이다.

 

뛰어난 석등, 절로 안도의 숨을 쉬다.

 

높이 2.5m의 이 석등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원래는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 터에 있던 이 석등을, 시마타니가 이곳으로 옮겨 일본으로 반출을 시도했던 걸작품이다. 석등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동안 보아왔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만일 이것이 시마타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잃을 뻔했다.

 

 

 

 

 

이 석등은 색다르다. 우선 불을 켜는 화사석의 창이 사각형이 아닌, 타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팔각으로 꾸민 화사석에는 사방에 타원형의 창을 내고, 폭이 좁은 남은 네 곳의 기둥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양각으로 조각한 사천왕상의 발밑에도 밟힌 사악한 무리들을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사천왕은 사왕, 혹은 호세사왕이라고도 한다. ‘호세사왕(護世四王)’이란 세상을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경에 사천왕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고 보면, 단순히 불을 밝히는 목적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이 석등은 세상을 밝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간주석에 용틀임, 뛰어난 작품

 

일반적인 석등의 간주석은 각이 지게 조성을 한다. 그러나 발산리 석등의 간주석은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기둥 돌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용은 비늘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조각을 하였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은 뛰어난 조각술이다.

 

이런 석등을 조성한 봉림사라는 절은,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에는 꽤나 번창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용을 새긴 간주석 밑으로는 여덟 개의 연꽃을 새긴 받침돌이 자리한다. 사각형의 기단돌 위에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한 받침돌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하였는데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지붕돌 역시 팔각으로 꾸몄는데, 처마 밑에 서까래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지붕돌 위에 올리는 보주 등은 사라져버렸다. 통일신라 사대에 조성한 발산리 석등. 엄밀하게 따지자면 발산리 석등이기보다는 봉림사지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일본으로 밀반출을 하기 위해 자리까지 옮겨진 석등이, 이름까지 변해버렸다는 것에 또 한 번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이렇게 남아 우리 땅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주변에 늘어서 있는 석조물들과 함께 자리를 지켜주고 있음이 정말로 고맙기만 하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슴이 먹먹하다고 한다. 그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절로 욕이 튀어나온단다. 이 나라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다는 느낌이다. 어째 나라가 이토록 비리로 얼룩져 잇는 것인지. 이젠 뉴스조차 보기가 싫다. 뉴스마저 신뢰가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아파해야 이 아픔이 끝날 것인가?

 

세상이 다 아프다고 하는데, 이 통에도 자신과 사고가 맞지 않는다고 물어뜯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미친개들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 아파하는데 그 아픔에 상처를 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인지도 의심스럽다. 아침 일찍 산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들, 불빛으로 치유가 되었으면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본다. 하지만 잠깐 틀어놓은 TV화면에서 또 세월호의 아픔이 보인다. 괜히 책상머리에 앉아 이것저것 뒤적여본다. 그러다가 문득 석등이 눈에 들어온다.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석등.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대웅전의 앞에 자리한다. 대웅전이란 절의 중심 전각이다. 그 앞에 석등을 세우는 것은,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등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를 밝혀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 앞에 조성한 석등의 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석등은 흔히 광명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간주석과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찰에서 보이는 석등은 이러한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석등을 그렇게 대웅전 앞에 배치를 한 것도, 알고 보면 수많은 중생을 어둠에서 깨우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답사를 한 수많은 석등의 자료를 뒤적이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해본다.

 

정말 미안합니다. 석등의 불빛 따라 편히 가시길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일꾼들을 뽑는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악에서 지켜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한 것이다. 제몫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 수도 없이 고쳤다그러면 무얼 하겠는가? 소만 들여놓으면 또 잃어버리는 것을. 처음부터 튼튼한 외양간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겉만 번지르르하면 손 툭툭 털고 일어나버렸다. 그런 사람들의 관습이 이렇게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온 것이다. 초파일에는 가까운 곳을 찾아가 석등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겠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에 소재한 백장암. 백장암은 남원 실상사의 부속 암자이다. 실상사는 백장암은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인 828년 증각대사(일명 홍척국사)가 선종9산 중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절 안의 백장암 남쪽 밑으로 울타리를 마련하여 몇 점의 유물을 보호하고 있는데, 석등은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기단석은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큼지막하게 새긴 연꽃잎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다.

 

간결하게 처리한 화사석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의 화사석은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연꽁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가 2.5m인 백장암 석등은 조각을 한 기법 등으로 보아 곁에 함께 서 있는 국보 제10호인 석탑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장암은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난 산길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만날 수가 있다. 11월 말이라고 해도 한 낮의 날씨는 땀이 날 정도이다.

 

하물며 구불구불 산 정상부로 향해 난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흐르는 담을 닦아내며 찾아간 백장암. 경내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석탑과 석등은 흐르는 땀을 잊을 정도로 아름답다. 도대체 이렇게 높은 곳이 있는 절집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석조물을 조성할 수가 잇엇을까?

 

 

뛰어난 석조각 눈에 현란해

 

국보인 백장암 석탑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아름다움이란 사람이 조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국보 옆에 서 있는 석등 역시 단출하지만 품위를 지키고 있다. 보주의 조각 아래 지붕돌의 날렵한 처마는 한옥의 고운 처마 선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밑에 4개의 창을 낸 화사석 역시 보기에도 반듯하다.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위 받침돌의 조각은 큼지막하게 연꽃잎을 조각하고 그 안에 술을 표현했다. 그 큼지막한 연꽃잎은 통일신라의 기상을 나타내듯 힘이 넘친다. 팔각의 기둥은 딴 석등의 간주석에 비해 조형미가 뛰어나다. 그리고 아래받침돌에 새겨진 앙련 역시 힘이 넘친다.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만일 이 백장암 석등이 석탑 옆에 자리하지 않고 별개로 서 있었다고 하면 그 아름다운 힘찬 기상이 더했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두고 바라보아도 이렇듯 훌륭한 석조 예술품이다. 석탑과 석등을 돌아보고 난 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산 밑을 바라본다.

 

저 밑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몇 분의 선방에 있는 스님들이 포행이라도 나가는 듯 줄지어 뒷짐을 지고 걸어나간다. 어디로 나가는 것일까? 바쁜 여정만 아니라면 스님들의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 포행에 동참을 하고 싶다. 늘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스님들의 포행길을 일부러 걸어보는 것도, 그렇게라도 하면 세속에서 찌든 때가 조금은 가실 것만 같아서이다.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 한 점 미동도 하지 않는 오후 시간이다.

(두번 째 사진은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조성한 간결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은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과 버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한 겨울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미륵대원지. 그곳에서 만난 석등은 그저 아무런 밀도 없이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 , 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받침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위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대원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오측석탑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석등이 서 있다.

 

 

이 두 개의 석등은 사각 석등과 팔각 석등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를 처음 석굴사원으로 보성할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석등은 간결하지만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석등에 쌓인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사계절을 다 돌아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문화재는 여름철에 더 아름답고, 또 어느 문화재는 겨울철에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미륵대원지야 말로 겨울철에 가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 겨울에 눈 속이 묻힌 석등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봄철에 이곳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는 충주미륵대원지이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 사원터로 밝혀졌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미륵대원지에는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 그리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당간지주, 삼층석탑, 귀부, 사각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각형으로 조형이 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이 된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이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와 화사석, 그리고 위에 올린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벌써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동안 이름도 바뀌고 비지정으로 남아있던 석조물들이 지정문화재로 바뀌기도 했다. 사각석등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아. 오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화형문양으로 장식을 한 간주석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을 장식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형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는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면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특이한 화사석의 결구수법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롭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사각석등에서 보이는 화사석의 결구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 현화사, 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든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비록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며 답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많은 문화재를 만났다는 행복이 더 깊었나보다. 남들이야 그 행복을 알 수 없겠지만, 30년 세월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보다 즐거움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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