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떠나 여주까지 찾아가 작가와 현장대담까지

 

사람의 학습이란 끝이 없다. 누군가 나이 먹어 무슨 학습이냐고 하겠지만 사람이 평생 배우며 살아간다는 것도 어찌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 학습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난 언제라도 환영한다. 그동안 자칫 나태하게 살았을 수도 있었던 나 스스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2813e수원뉴스에 첫 기사를 쓰고 난 뒤 벌써 만 6년이 지났다. 그동안 무던히도 수원 곳곳을 누비며 땀을 흘렸다. 늘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성미 때문에 아무도 이루지 못한 2,000개의 기사를 지난 해 7월 이루어냈다. 그리고 현재 2,500개의 기사를 송고했다. 이런 추세라면 2019년이 끝나기 전에 3,000개의 기사를 송고할 듯하다.

 

 

기사 3,000개를 채우면 은퇴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언제 내가 말대로 은퇴 할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최선을 다해 기사를 쓸 뿐이다. 그렇게 기사를 계속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학습이다. 학습을 하기위해 사람들과 함께 연구하고 현장을 찾아가 더 많은 것을 공부하는 버릇이 필요하다.

 

그런 차에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보다는 힘께 공부하고 함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기자의 생활이란 생각이다.

 

 

시민기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 만들어

 

수원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을 해서인지 각 기관이나 모임 등에서 기자교육의 의뢰를 받아 자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가진 터에, 현장에서 늘 만날 수 있는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마련되었으니 나에게 이보다 즐거운 일이 있겠는가? 길지 않은 5회 정도의 시간을 한 주에 1회씩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학습을 함께 시작했다.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도 열심을 내주는 시민가지들이 노력에 나 역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4회의 교육을 마쳤다. 기자란 무엇인가? 현장에서는 어떻게 취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사람을 만나 대담을 할 때의 자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 그동안 현장 취재를 하면서 보고 느낀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약속한 5회차 시간에는 현장을 찾아가 직접 인물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6일 오후 수원을 출발해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로 향했다. 이곳에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가 소재한 곳이다. 경덕왕은 신라 35대왕이다. 고달사는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다.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와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석불좌,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등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석조 등이 소재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아 고달사지에 관한 것을 돌아보고 난 뒤 인근에 있는 김원주 작가(, 56)의 공방으로 향했다.

 

 

작가와 직접 교류하는 시간도 가져

 

김원주 작가는 지우재(至愚齋)’라는 도자기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평소 가까운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인지라 동행한 시민기자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곳을 찾은 것은 이달 10일 비무장지대인 DMZ평화촌에 통일대장군과 평화여장군이라는 목장승을 세우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원주 작가 부부는 모두 미술을 전공했다. 23년 전 여주에 보금자리를 튼 후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해온 작가로 시민기자들의 궁금증도 더 많아져 다양한 질문을 하기도 했고 직접 목장승을 옮기는 일에 함께 힘을 보태기도 했다.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바쁜 시간이지만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 작가는 기자들과 짧은 시간이지만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고마운 것은 바쁜 일정에도 가까운 곳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주까지 동행한 시민기자들이다. 그렇게 여주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으로 5회차의 학습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노력한 덕인지 지난 달 19, 경기도지사 유공표창을 받기도 했지만 나는 늘 또 다른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또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함께 자리하면서 공부한 5주간의 시간. 나에게는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함께 열심을 내준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남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한루와 춘향이다. 남원의 광한루 앞 오작교에서 사대부가의 몽룡이와, 기생 월매의 딸 춘향이가 서로의 사랑을 언약을 하고 백년가약을 약속을 했다고 한다.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은 파격적인 것이다. 요즈음이야 문벌이나 체면치레는 대충 넘어가는 편이지만 유교적인 조선조의 사고 속에서 기생의 딸과 대가 집의 도령이 눈에 맞았다니 참 알게 모르게 그 때도 사랑은 국경을 초월했는가보다.

 

광한루는 보물 제281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그 외에 주변을 다 이루어 사적 제303호로 지정하였다. 광한루는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가 남원에 유배 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부른데서 유래한다.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이 증축했고, 1444(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이 요천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춘향전에 의해 많이 알려졌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광한루는 여인의 지조와 절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끝이 슬프게 끝나는데 비해 춘향전은 대미를 기쁨으로 장식하고 있어서 좋다. 아무래도 슬픈 것 보다야 기쁜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초신경을 자극받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시청자들을 울리려고 한다. 때로는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는 과거 급제를 한 이도령이 옥에 갇힌 춘향이를 구해내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만나는 것을 대미로 삼았다.

 

그런데 왜 이도령은 춘향이를 시험해보았을까? 그것은 바로 유교적인 인습 때문이다. 아마 여기서 춘향이가 이도령 인줄 모르고 암행어사에게 수청을 들겠다고 했으면 오늘날의 광한루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춘향이는 어사에게도 질책을 한다. 자신은 임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이 참 멋지다. 당시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극에 달했을 때인데 감히 어사를 질책하다니. 그것도 기생의 딸이라는 춘향이가 말이다.

 

이 대목은 상당히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 하나는 당시의 관습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왕명을 받은 어사는 임금을 대신하는 직분이다. 그런데도 수청을 거절했다는 것은 왕을 거절한 것이나 진배없다. 여기서 민초들의 속마음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하나는,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조를 지켜야한다는 지극히 유교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지 그래서 광한루는 사랑을 지키려는 춘향이와, 그것을 어찌해보려는 변학도가 한판 성대결을 펼친 곳이다. 물론 춘향이의 승리로 끝났지만 말이다. 이 춘향전은 오늘 날 남녀평등을 부르짖고, 여성상위를 부르짖은 계기가 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광한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춘향사당은 많은 여인들이 관람을 하러 드나든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이곳을 찾는 많은 남녀들이 다 부부일까? 아니면 젊은이들이야 연인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쌍도 꽤 많이 눈에 띤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여길 온 것일까? 여자는 자신의 정조를 지금부터라도 지키려는 마음이고, 저 남자는 변학도의 마음을 갖고 어찌해보려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사당 안에 모셔진 춘향이의 영정에서는 이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 “! 너 나가

 

요즈음처럼 성이 문란한 시기에 남원 광한루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찌 보면 꽤나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줄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랑은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번쯤 사랑하는 사람과 남원 광한루를 가서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굳은 언약이라도 해보면 좋을 듯하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래요요즘 사람들이 즐겨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말이다. 한 사람만을 끝까지 사랑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너무 문란해진 성 도덕 때문에 이젠 남원 광한루에 가서 모두가 소양교육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춘향이의 그 절개를 마음에 담으면서...

 

굿이란 무엇인가요? 굿은 왜 하는 건가요? 굿을 하면 정말 재수가 좋은가요?

 

이런 질문을 한다고 하면 누구나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예전 TV드라마 주몽을 보면 부여에서는 신녀(神女)가 있어 왕과 대등한 위치에서 정사에 곧잘 참여를 했음을 볼 수 있다. 하기야 신라의 남해왕을 별칭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하여 곧 무()를 이름이라 했으니 삼국 초기만 해도 제정이 완전 분리되지 않았었나 보다.

 

굿의 역사는 깊다. 우리가 흔히 단군(檀君)이란 명칭은 단의 주인이니 곧 제사장을 일컬음이다. 당시에는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어떻게 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은 모두 제천의식으로 하늘에 감사할 때 3일 밤낮을 주야로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가히 대축제였다고 보아야겠다.

 

이렇게 굿이란 뜻은 마지(=)의 뜻으로 제천의식을 <맞이굿>, <매굿>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즉 하늘에 감사하는 의미로 봄, 가을 며칠 동안 제사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이 즐겼다는 점이다. 이 맞이굿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고 하니 당시의 정경을 보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수백, 수천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가 수족상응(手足相應)하면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은 굿이 단순한 초복축사(招福逐邪)를 하는 신앙적 요소가 아닌 전국적인 축제였던 점을 알 수 있다.

 

 

굿은 전쟁에서도 쓰였다. 전장에서 굿을 쳤다는 말은 굿이 삼국시대만 해도 단순한 치병이나 점술의 차원이 아닌 하늘에 대한 기원의식이요, 힘을 돋우기 위한 축제를 상징하는 용어였음을 알아야겠다. 전쟁에서 말하는 굿을 친다.’라는 것은 아마 지금 우리가 신명나게 한판 벌이는 풍물(風物)을 말하는 것일 게다. 굿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전통예술이 굿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거야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것일 테고, 당시에는 가장 큰 행사로 이루어지던 제천의식 속에 모든 악가무희(樂歌舞戱)가 총 망라되었을 것이니 그런 말도 나옴직하다.

 

그런데 문제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가 되면서 급격히 퇴락한 무격(巫覡)의 위치와 그들이 하는 행위인 굿이 너무도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굿이 지금은 그저 재수나 불려주고, 병이나 고쳐주는 그러한 행위쯤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강릉단오굿이나 일부 지역의 굿은 축제화를 하는데 성공한 예도 있지만 요즈음은 그 본질이 변한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에 감사를 드리는 축제의 굿! 얼마나 대단한 축제였을까? 3일간을 주야로 모든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고 마시고 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이 굿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굿판은 열린사회다. 그래서 남녀노소 구별을 할 것 없이 아무나 굿판에 참여할 수 있다. 복을 불러주고, 농사가 잘되게 하고, 마을을 평안하게 하고, 바다에 나가면 고기가 잘 잡히고, 어디 그 뿐이랴 굿이 우리에게 준 의미는 더할 나위 없이 크다고 하겠다. 지금과 같은 의미의 개인적인 치성이나 드리는 그런 굿과는 그 모양새부터가 다르다.

 

 

우리가 한일월드컵 때 전국적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치던 박수를 기억할까 모르겠다. ‘대한민국~ 짝 짝 짝짝짝이 박수가 굿에서 사용하는 동살풀이라는 장단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서 굿은 우리를 신명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풍물판에서 한바탕 흐드러지게 노는 것을 <판굿>이라고 한다. 굿판을 벌였다는 소리다. 그만큼 굿이란 단어는 우리 풍습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굿을 이야기하다가 보면 굿에 관련된 속담이 생각난다. ‘굿하고 싶어도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 안한다.’굿이 얼마나 신명이 나면 시부모 앞에서 며느리가 춤을 출 것인가? 그만큼 굿은 사람들을 그 안으로 끌어 들인다. ‘메밀 떡 굿에 북 두개 치랴라는 속담도 있다. 메밀떡만 해놓은 차린 것 없는 굿판에 쌍장고를 친다라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을 벌여 놓은 것을 말한다. ‘굿해 먹은 집 같다.’라는 속담도 있다. 굿을 할 때는 온 동네가 시끄럽다. 그런데 굿을 마치고 나면 그런 소음이 사라져 조용하다. 그런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어수선한 일이 끝나고 갑자기 조용해진 것을 말한다.

 

올해처럼 날이 더운데 갑자기 굿 이야기를 왜하나? 라고 질문을 한다면 굿이 좋다거나 복을 준다거나 하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험하니 그저 예전처럼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축제를 벌여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서로가 손에 손을 잡고 주야로 3일을 춤을 추다가 보면 피부로 전해지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다가 보면 이웃과 다투고, 서로를 죽이고, 남의 것을 탐하고, 나만 잘 살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면서 다투는 그런 것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요즘처럼 살기 어렵고 날도 더운데 풍물을 앞세워 한바탕 걸판진 굿판 한번 벌여보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2002년을 상기하면서... 그때 왜 그런 모습을 우린 보지 않았던가. 우리나라가 이길 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옆 사람과 서로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을...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굿이다.

 

우리는 지난날을 잘 잊어버린다. 흔히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일게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좀 벌면 꽤나 허세를 부리고 다닌다. 그럴 때 사용하는 말이다. 사람은 곧잘 일부러 잊어버리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후에는 언제 그랬느냐고 반문도 한다. 사람의 한 생은(한 일대) 보통 30년을 잡는다. 그래서 3대를 대물림을 했다고 하면 100여년 정도의 시간을 흘렀음을 안다.

 

100여 년 전 우리들의 생활상을 어떠했을까? 요즈음에는 많은 자료사진들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으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속사정을 보면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뜻이야 그런 말이 아닐지라도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100여 년 전이면 한참 살아가기 힘들었을 시기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또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빨래터는 여인네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빨래터는 아침밥을 해 먹고 난후, 집안일과 간단한 텃밭 등의 일을 마친 여인들이 오전 10시쯤 되어서 많이 모인다고 한다. 그 시간에 얼른 빨래를 해서 널어야 낮 햇볕에 빨래를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빨래터에서 만난 여인들은 그저 간단하게 빨래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정보를 여기서 공유하게 된다.

 

 

지금이야 시골에 가도 여럿이 함께 모여서 빨래를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지난날에는 공동 빨래터가 샘가나 개울가에 만들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는 했다. 하지만 빨래터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웃집 흉도 어지간히 보았다고 하니 여인들의 만단설화(萬端說話)가 이곳에서 나왔으리라.

 

물은 생명과 직결된다. 물이 없다고 하면 인간은 단 하루를 살아가기도 힘들다. 예전에는 꼭 우물이 아니라고 하여도 흐르는 냇물을 마실 수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그 때가 그립기도 한다. 지금이야 어디 아무 물이나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있겠는가? 물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요즈음엔 물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사대부 집에는 물을 길러 다니는 머슴들이 있었으며, 북청 물장수까지 생겨났다. 마을에는 공동우물이 있어 전체 주민들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공동우물을 잘 보존하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청소를 하고는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정월이 되면 마을 우물가에서 용왕제(龍王祭)나 수신제(水神祭)를 올려 일 년 내내 물이 가물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고는 했다.

 

 

100여 년 전의 장터에는 생명력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5일장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지만 당시 장은 지금처럼 개성이 없이 어느 장을 가든지 다 같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즉 장마다 각기 그 장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고 하니 그것들을 이용한 장돌뱅이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인가 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5일장들을 보면 충남 한산의 모시장, 충남 금산과 경북 풍기, 경기 강화의 인삼장, 충남 강경과 홍성의 젓갈장, 경북 안동의 안동포장, 서산의 마늘장, 영양의 고추장, 청양의 구기자장 등 그 지역의 특산품들과 거기에 따른 부수적인 상품들이 주 거래품목이었다.

 

5일장은 우리네 정서에는 그냥 물건을 사고파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 곳에서 모든 세상의 일이 다 이루어졌던 곳이 바로 5일장이다. 오죽하면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파는 각설이패가 다 생겨났을까. 그들이 주로 부르는 것이 장타령인데, 장타령은 대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일자에서 장자까지 셈을 하면서 자마다 구절을 만들어 부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각 장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사설을 엮어가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여인네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만 했던 시기다. 더구나 농사를 주로 짓던 우리네 살림에서 여인네들이 감당을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빨래하고, 아이들 건수하고 나면 새참을 머리에이고 들로 나간다. 들에서 돌아오면 다시 점심을 준비해야 하고 집 앞에 있는 텃밭이라도 맬 양이면 도대체 아이에게 젖을 물릴 시간도 부족하다. 오죽하면 누나 등에 업힌 아이에게 그대로 젖을 물렸을까? 그래도 젖을 빨면서 한 손으로 나머지 젖을 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정겹다. 분유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즈음보다 훨씬 인간답지 않은가? 그래서 어르신들 중에는 예전이 지금보다 훨씬 인간미가 넘쳤다고 하시는가 보다.

 

널뛰기는 도판희(跳板戱)’라고도 한다. 두툼하고 긴 널빤지 한복판의 밑을 괴어 중심을 잡은 다음, 널빤지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힘을 주어 다리를 굴신 한 후 튀어 올랐다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발을 구르면 상대방은 그 반동으로 솟아오르게 된다. 이렇게 번갈아 두 사람이 솟구쳐 올랐다 발을 굴렀다 하는 놀이로, 높이 오를 때는 56척까지도 위로 솟구쳐 오른다. 놀이가 없던 지난 날 널뛰기는 여인네들의 운동으로 참 적합하였으리라는 생각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관하여 최남선(崔南善)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유희는 후세의 산물이 아니고 대개 기마(騎馬격구라도 자유로이 하던 우리 여성 고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니 고려 이전의 민속임은 살피기 어렵지 않다고 했으니 대개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널뛰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설에는 옥중에 갇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던 여인이 남의 도움을 받아 널을 뛰면서 옥사 담장 안으로 남편을 바라본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 하나는 밖으로 출입을 자유롭지 못한 여인네들이 널을 뛰면서 담장 밖 세상을 보기 시작한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지만 둘 다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마 그보다는 고려 때 기마격구처럼 과격한 운동을 즐기던 여인들이 발의 튼튼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이와 같이 100여 년 전 우리네 살아가는 방법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바뀌고, 사람도 바뀌고, 그에 따른 풍속도 바뀌는 법이니 그것이 세상 순리 아니겠는가? 새삼 지나간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과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하면서 개구리가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느라 우리 옛것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대전, 공주, KBS대전총국 등 발간도서

 

30년이면 세상이 세 번 바뀐 세월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잇었던 책 세 권을 한꺼번에 찾아냈다. 한 권은 KBS대전총국 개국 5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대전·충남 옛 소리 기해>이라는 책이다. 당시 KBS대전방송국에서 대전과 충남 지역의 옛 소리 기행이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현장에서 지역민들을 상대로 수집한 소리를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을 다니면서 녹음하고 채록하고, 주민들과 대화를 하면서 채록한 내용을 그대로 가사와 악보를 합해 개국 50주면 기념서적으로 냈다. 책머리에는 나태주 시인의 축시도 실려있다. 많은 시간을 현장을 다니면서 채록한 소리이기 때문에 꽤나 신경을 써서 집필했던 책이다. 당시에 비매품으로 3000권을 발행했으니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소장하고 있엇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가다 책이 모두 소실되는 바람에 이 책을 소장하고 있디 못했다. 어떻게 도서관에 있는 책을 빌려다 복사를 한 책 한권을 갖고 있었는데 우연히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서점에 이 책이 판매한다고 나와있기에 주문을 했다. 책을 받아 첫 장을 열어보이 ◯◯ 기자님께/ 하주성 드림이라는 내 친필로 쓴 글이 있다.

 

당시 이 책 100여권을 지역에 있는 신문사의 기자들께 보냈는데 그 중 한 권이다. 참 세월이 많이 흘러 25년이나 지난 책이기에 왜 일 책이 헌책을 매매하는 곳으로 나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 친필 사인을 보는 순간 기분이 참 묘하다. 책의 받은 사람이 그 책을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니 말이다.

 

 

30년 된 책 두 권도 구입

 

당시는 대전KBS에서 방송을 할 때라 그곳 대전과 충남지역의 자료를 많이 썼다. 대개는 지역 문화원 등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는 작업을 했다. 어차피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옛 소리를 채집하고 녹음, 채록을 하였기 때문에 자료를 많이 갖고 있었던 터라 그 자료들을 정리해 책으로 낸 것이다.

 

<한밭의 옛 노래>는 대전문화원에서 의뢰를 받아 1987년에 발간을 했고, 공주문화원에서 이뢰를 받아 쓴 <웅진의 옛 노래>1988년에 발간했다. 벌써 30년 전이다. 그 때만해도 늘 현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휴대품목에는 항상 카메라와 녹음기, 수첩 등은 필수 품목이었다. 그렇게 현장을 다니면서 쓴 책이 상당수이다.

 

 

세권 모두 비매품이고 한정판이다. 그런데 한밭의 옛 노래와 웅진의 옛 노래는 희귀본이라 그런지 가격대가 만만팒다. 권당 20000원이란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서둘러 신청을 하고 이틀 후 책을 받았다. 그렇게 모아들인 책이 16권이다. 지금까지 24(공저 2권 포함)을 썼으니 이제 8권만 더 모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중 몇 권은 아예 찾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책을 발간한 곳에 찾아가도 대여도 해주지 않을 만큼 귀하게 여기고 있는 자료들이다. 다행히 그 희귀본들이 대학과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에서 몇 권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올해가 가기 전에 복시본이라도 만들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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