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장애 비장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결국 모든 시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늘 강조하는 최종현 회장. 수원시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맡아보던 최종현 회장은 지난해 1230일 수원시장애인복지단체연합회 회장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당선되어 제3대 수원시장애인복지단체연합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3년 임기인 복지단체연합회장은 기한을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다만 당선이 되면 임기 3년이 한시적으로 정해져있으며 재선으로 다시 회장직을 맡을 수가 있다. 지제장애인협회장 소임을 맡아하면서 장애인들을 위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최종현 회장이기 때문에 이번 장애인복지단체연합회장 선거에서도 사람들의 믿음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동안 장애인복지단체연합회가 장애인들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문제제기를 받기도 하고요. 인수인계 절차를 마치고나면 우선 장애인단체들을 점검하고 앞으로 장애인들이 사회에 나가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연합회를 꾸려나갈 생각입니다

 

 

언제나 먼저 장애인의 복지를 생각하는 사람

 

몇 년 동안 수원시지제장애인협회 일을 맡아하는 최종현 회장을 보면서 늘 생각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을까하는 생각이다. 늘 모든 일에 자신이 소임을 맡아보고 있는 지체장애인협회를 운영하면서 자신의 행복보다는 먼저 지체장애인들의 행복을 생각하고 그들의 안전과 복지를 먼저 생각하였다.

 

세상은 장애, 비장애가 한데 어울려 차별없는 세상이 될 때 가장 완벽한 복지사회기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이 주도적으로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고 생각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의 생각이 먼저 바뀌지 않으면 그런 세상을 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최종현 연합회장 당선자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의식개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변화를 시키지 못하면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면 그 세상은 절대 바뀔 수가 없다는 것이 최회장의 논리이다. 하기에 그는 늘 장애인들이 먼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회에 적응해 차별 없는 사회생활을 먼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장애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사람들이 장애인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당당하고 정당하게 일처리를 했다고 하면 사회의 구성원이나 공무원들이 왜 그들을 믿지 못하겠어요. 저는 앞으로 그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정직하고 당당하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 단체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바꾸어 나갈 것입니다

 

자신의 일보다 먼저 장애인들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겨 온 최종현 회장으로서는 사회에서 그런 대우를 받게 된 것은 누굴 탓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누구든지 믿고 모든 일을 맡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장애인 모든 단체가 먼저 변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살필 수 있는 것은 결국 장애인이라고 늘 강조하던 최종현 회장으로서는 그 일이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한단다.

 

왜 장애인들의 일을 비장애인들이 맡아해야 합니까? 장애인이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죠. 결국 사회가 그렇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지관 운영이나 상담도 장애인들이 맡아해야 합니다. 저는 각 단체마다 상담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서로 마음을 터놓고 무슨 말이나 상담을 할 수 있으니까요

 

 

최종현 회장이 늘 안타까워하는 것은 정작 누구보다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장애인을 젖혀놓고 비장애인이 그들을 상담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인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불필요한 예산낭비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을 한다.

 

3일 오후, 호매실장애인복지센터 3층 수원시지체장애인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최종현 회장은 앞으로 인수인계 절차를 마치고나면 할 일이 많다고 하면서 차근차근 모든 일을 풀어나가겠다고 한다. 자신이 장애인복지단체연합회를 맡아하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정직하고 당당한 단체와 장애인을 만드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동안 최종현 회장의 행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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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선출은 승계가 아닌 권점이라는 직선제로 선출

 

지난 23일까지 수원문화재단 특별전시실에서는 2015 근현대예술인 조망 사업 전시로 운학 이동안선생에 대한 전시가 열렸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도와 전라도 삼도에 있었으며 도 재인청 밑에는 군 재인청이 있었다. 이들의 직제는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스스로를 천민이라고 했지만 나름대로 엄격한 규약을 갖고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도대방이란 각 도의 대방을 일컫는 말로 여겨진다)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히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는 화랭이들의 가계가 즐비해

 

오산 부산동의 이용우 가계가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으로 무의식과 화랭이 춤을 지켜 온 집안이라고 한다면, 화성 남양의 이동안 가계는 4대째(일설에는 그 이상이라고 한다) 재주를 지켜온 집안이다.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경기재인청이 폐청이 되고 난 뒤 재인청 춤 교사인 용인 김인호 선생에게 재인청 춤을 전수받았다.

 

재인청 계열의 춤은 경기도를 비롯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도 전승이 되고 있다. 삼도에 있던 재인청은 그만큼 다양한 전통문화예술을 지역적 특성이 있는 각종 연희종목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경기도에서 연희되고 있는 재인청 계열의 춤은 이용우의 진쇠춤과 터벌림춤(경기도당굿 보존회로 전승)을 비롯해 이동안의 진쇠춤과 엇중몰이 신칼대신무, 태평무, 승무와 살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안성의 김숙자 가계로 전해진 도살풀이(중요무형문화재 지정)와 충남 의 재인 한성준으로 전해진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지정)와 살풀이춤 등 많은 춤들이 있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기예능에 눈 돌려

 

12게때까지 통권을 마친 이동안 선생은 마을에 들어 온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그렇게 무작정 가출한 이동안 선생은 황해도 한 장터에서 부친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재인의 끼를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줄타기,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30여 종에 이른다

 

 

이동안 선생의 4대 세습 도대방 근거없다

 

1920년대 재인청이 폐청 될 당시 전국에는 4만 여명이 넘는 재인청 소속의 재인들이 활동을 했다고 하니 당시 재인청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동안 선생은 경기도의 한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본인이 4대째 도대방으로 이어진 집안의 마지막 도대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오산 부산리 이용우 선생의 집에는 경기도 재인청에 관한 4책이 전해지고 있었으며 이 책 내용에는 대방들의 명칭이 보인다. 하지만 폐청 될 당시 아키바다까시가 쓴 <조선무속의 연구>에도 도대방이라는 칭호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볼 때 도대방이란 각 도의 대방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재인청의 폐청 될 당시 이동안 선생을 불과 14세에 지나지 않았다. 폐청 당시 3도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4만여명이나 된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 내로라하는 재인들이 속해있었던 예능집단이 바로 재인청이다. 그런 재인청에서 어떻게 14새의 어린 소년이 도대방이 될 수 있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는 말이다.

 

더욱 재인청의 대방선출은 3명을 먼저 선정한 후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선출하는 직선제를 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4대째 도대방으로 계승을 한 것일까? 결국 이동안 선생의 ‘4대 도대방설은 신뢰성이 없다. 선생의 기예능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렇다고 사실과 다르거나 확인이 안된 도대방설을 글을 쓰는 사람마다 인용해 ‘4대 도대방이라는 설은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예능집단이었던 거대한 조직인 재인청이 자칫 이 확인되지 않은 사살 하나만으로 14세짜리 어린소년이 수장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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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기복 선생 흉상제막식 거져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가잔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예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랑집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선조 말기로 보고 있다. 청룡사는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을 비롯하여 각 절기에 사찰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꼭두쇠를 정점으로 뭉친 남사당패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남사당패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안성지역에 전해지는 소리이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꼭두쇠 이원보의 맥을 이은 김기복 선생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 선생(2015년 작고,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돌모루 출생).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2004년 경기도의 한 일간지에 소리연재를 할 때 만나 뵌 김기복 선생은 쇠가치고 싶어 주체를 못했다고 술회하셨다.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는 것이다.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선생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선생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1997930일 안성남사당풍물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지정되자 선생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2년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 창단하여 꼭두쇠를 역임하였다. 2015820일 새벽 420분경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꼭두쇠였다.

 

김기복 선생의 흉상 제막식 가져

 

23일 오후 3. 안성시 보개면에 소재한 남사당공연장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김기복 선생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흉상을 제작하고 그 제막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황은성 안설시장과 이동희 전 시장, 안성시의회 권혁진 의장, 양정평 안성문화원장과 고 김기복 선생의 유족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상철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제막식은 식전행사로 김기복 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광주시립풍물단의 난타공연으로 막을 열었으며 개회선언과 내빈소개, 김기복 선생 약력과 흉상건립취지, 감사패 및 공로패 증정, 남사당보존회장의 기념사와 내빈축사, 흉상제막, 축하공연 순으로 이어졌다.

 

이날 감사패와 공로패는 황은성 안성시장, 김학용 국회의원, 권혁진 의장, 양장평 문화원장이 감사패를, 이동희 전 안성시장, 김종해 봉산탈품보존회부회장, 처음으로 안성남사당을 기록해 저서로 남긴 하주성 등이 공로패를 받았다. 김기복 선생의 미망인과 아들은 인사를 통해 아버지의 흉상을 겅립하고 이런 행사를 갖게 된 것에 무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평생을 안성 남사당의 복원과 전승, 웃다리농악의 보존을 위해 몸바친 김기복 선생. 선생을 기리는 흉상 제막식을 갖는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선생은 영원한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늘 선생이 쇠가락을 치던 남사당공연장 한편에서 선생은 그렇게 제자들의 풍물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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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센터, 수원 22개시장 용인 4개시장 관리

 

저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수원센터는 수원시에 소재한 22개 전통시장과 용인시에 소재한 4개 전통시장 등 총 26개 시장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전국에 약 1,500개의 전통시장을 저희 송상공인시잔진흥공단에서 관리를 하고 수원센터는 그 중 일부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죠

 

5일 오후 7, 수원 화서시장 점포대학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에 만난 장태승 수원센터장은 전통시장의 상인대학과 점포대학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늘 만나고는 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다. 졸업식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기 때문에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장태승 센터장과 자리를 함께 했다.

 

상인대학을 마치고 나면 점포대학을 운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국에 워낙 많은 전통시장들이 있기 때문에 상인대학 등을 신청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 중 선별에서 몇 곳만 혜택이 돌아가기 됩니다. 시장진흥공단에서도 신청을 하면 다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요

 

골목상인과 전통시장 소상공인 등 적극지원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는 골목 상권의 상인들이나 전통시장 상인들이 업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책임있는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창업서부터 운영, 마케팅, 홍보 등 다양한 교육을 통해 소상공인들이 내실있게 업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저희 시장진흥공단에서는 골목상권이나 전통시장 등의 소상공인을 위해 창업부터 교육 관리 등 모든 것을 책임집니다. 하지만 창업을 했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장사를 하다가 폐업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럴 경우에도 그들 소상공인들의 재창업 등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죠. 저희들은 소상공인들이 경영개선교육은 꼭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태승 수원센터장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16년 째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8년을 수원센터에서 수원과 용인의 소상공인들을 위하여 일을 했고 2년 전부터 수원센터장을 맡아 보고 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19992월에 소상공인 지원센터 설치운영을 시작했다. 전국에 13개소를 지방중소기업청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65월에는 소상공인진흥원을 설립했으며, 2010년에는 시장경영진흥원으로 전환하고 재래시장전통시장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1년에는 소상공인 진흥원과 소상공인지원센터를 통합했다.

 

 

상인들 스스로가 뭉치고 단합하는 길만이 정답

 

201411일 구 소상공인진흥원과 구 시장경영진흥원을 통합하고 4개본부 13개부서 520여명의 직원을 둔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을 발족시켰다. 장태승 샌터장은 그동안 수원의 전통시장들이 많은 변화를 했다고 하면서 그 중 수원역 지하도상가는 2년 전부터 은행과 매칭을 시켜 자금지원을 받게하고 경영개선 교육을 시켜 상인회가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수원역지하도 상가의 경우 각종 개선사업 등으로 인해 쾌적한 환경개선과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은 전통시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장이 활성화가 되는 길은 가장 먼저 상인들 스스로가 뭉치고 단합해야 합니다. 또한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장테승 센터장은 상인교육의 가장 중요한 것은 상인들 스스로 단합하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소상공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며 노력하는 장태승 센터장. 그가 있어 소상공인들이 힘을 얻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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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천 시집 빈 주머니는 따듯하다

 

빈 주머니는 따듯하다

손을 넣으면 더욱 따듯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손이 들어오면 더 더욱 따듯하다

 

겨울이 오면

빈 주머니가 그립다

손을 넣을 빈 주머니가 그립다(이하 하략)

 

 

아동문학가 윤수천 선생의 시집 빈 주머니는 따듯하다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시이다. 윤수천 선생은 1942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국학대학 국문과를 특기장학생으로 2년을 다닌 선생은 1974년 소년중앙문학상 동화 당선(산마을 아이)197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동시집 <아기넝쿨> <겨울 숲>과 동화책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 <나쁜 엄마> <멋진 춤을 보여줄께> 80여 권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쓸쓸할수록 화려하게>가 있다. 윤수천 선생은 한국아동문학상과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시집

 

우편물이 수원시청 공보관실로 와있다는 연락을 받고 우편물을 수령하러 시청을 찾아갔다. 아주 작은 우편물 하나를 건네준다. 얼핏 보면 초대장 한 장 들어있을 만한 크기의 우편물이다. 그런데 봉투 안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들어있다. 열어보니 휴대폰 크기 만한 책자이다. 제목을 보니 윤수천 시집이란다. 그런데 이 작은 책자에 도대체 몇 편의 시가 실린 것일까?

 

작은 시집은 110쪽 정도로 모두 4부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1부는 슬픈 립스틱으로 21편의 시가, 2부는 파도는 왜 아름다운가22편의 시가, 3부는 들꽃의 사랑16편의 시가, 4부는 빈 주머니는 따듯하다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총 8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저 슬픈 세월을 감히 누가 달래랴

기다림도 달빛에 젖으면

저리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을

 

1부 슬픈 립스틱에 수록된 갈대라는 시의 전문이다. 윤수천 시인의 작은 시집에는 이렇게 단 세 줄로 된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윤수천 선생을 뵌 것은 몇 번쯤인가 보다. 뵐 때마다 선생이 거주하고 계신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골목에 시를 쓰는 자리였다. 지동에 마련한 시인의 골목에는 선생의 시가 두 편이 적혀있다.

 

 

시골목에서 만난 윤수천 시인

 

윤수천 선생은 1975년 수원 지동으로 이주한 후 40년에 넘는 세월을 거주하고 있다. 윤수천 선생의 집 담벼락에는 꺼벙이 억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누구나 싶게 찾을 수 있는 선생의 집은 꺼벙이 억수의 집으로 유명하다. 꺼벙이 억수는 2007년 제4회 전국 초등학교 및 청소년 독서 감상 발표회에 선정되기도 했다.

 

<꺼벙이 억수>는 한국의 창작동화 5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초등학교 2학년 말하기듣기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읽기교과서는 <쫑쫑이와 넙죽이>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5학년 교과서에는 시 바람부는 날의 풀이 수록되어 있으며 <엄마와 딸>은 중국과 대만, 태국에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은 일본에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윤수천 선생은 꿈이 있는 어린이는 기죽지 않는다. 책은 밥이다라면서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윤수천 선생의 작품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꽃피울 수 있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시집을 선물로 보낸 윤수천 선생의 더 많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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