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 요즘 무당들 문제 심각하다 한탄

 

무당이란 정말 어려운 것이야. 대층이란 없어

22일 아침,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거주하는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 명인이 봄맞이 상차림을 준비하면서 신제자에게 한 말이다. 고성주 명인은 요즈음 무당노릇하기 정말 편하다고 하면서 음식하나까지 다 배달을 시켜서 굿상을 차리는데 그런 상을 받은 신령이 무슨 정성을 받았다고 무당들이 도와달란다고 해서 도움을 주겠느냐?”고 한다.

 

무당이란 제사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고성주 명인은 음력 37일과 107일 벌써 43년 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두 차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과 수양부리(자신의 신도)들을 위한 맞이굿을 올린다. 진적굿이라고도 하는 맞이굿은 무당들에게 가장 큰 굿으로 일반적인 무당들은 2~3년에 한 번씩 올리거나 아예 올리지 않는 무당들도 있다.

 

 

 

“일부 무당들 이야기지만 무당이 신령을 모시면서 마음을 올바로 쓰지 않으면 그건 무당이 아니죠. 남을 비방이나 하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이 어찌 신의 제자라고 할 수 있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신령 무서운 줄 모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무당들 말로를 보세요. 그들이 말년에 얼마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지. 정말 신령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무당들 이젠 정신 차려야 해요

 

요즈음 무당들이 신령 무서운 줄 모르고 나쁜 짓을 하다가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고성주 명인은 일반적인 무당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100(할머니 - 고모 - 최영옥(고모의 신딸이자 고성주 명인의 신어머니) - 고성주) 넘는 세월을 가계로 전해진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주 명인의 전안(신령을 모신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기물들도 적게는 수십 년에서 100년이 되어가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음식을 일주일 전부터 직접 준비해

 

고성주 명인은 맞이굿을 하기 1주일 전부터 준비를 한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전안에 있는 유기그릇을 닦는 일이다. “신령을 위하면서 더렵혀진 그릇에 제물을 담아 올리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는 것이 고 명인의 말이다. 그렇게 그릇을 닦은 후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성주 명인의 맞이굿에는 200명 이상의 손님들이 찾아온다. 모두 수양부리들이지만 그 중에는 일부러 굿을 보기위해 무속연구가나 관련학과 학자들도 상당수 찾아온다.

 

고성주 명인의 원칙은 과일이나 육고기 등을 제외하면 모든 제물을 집에서 직접 준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주일 전부터 전통약과와 다식, 그리고 제물로 사용할 열 가지가 남는 각종 전, 수양부리들에게 복은 건네준다는 백여 개의 시루, 200명 이상이 먹을 음식 등을 모두 집에서 장만한다.

 

 

 

그동안 많은 신의 제자들을 두었지만 그들 스스로 큰 그릇이 되기 전에 곁을 떠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고 명인은 맞이굿을 하는 당일 아침까지도 앞치마를 두르고 제물을 차리기에 바쁘다. 그렇게 집에서 수양부리와 신의 제자들과 함께 차린 제물을 올린 후 정성스런 마음으로 맞이굿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 전통 굿을 그대로 전승해가고 있는 고성주 명인. 자신이 섬기는 신령을 위하는 맞이굿을 준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정성으로 준비하는 고 명인은 굿상의 제물을 차리는 데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굿 그대로 이어가는 고성주 명인

 

무당이 점을 잘 본다거나 굿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선하야 해요. 절대로 남을 피해 입히는 짓을 해서는 안 되죠. 그런 악한 마음을 갖고 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걸어요. 신의 벌이 만만치 않거든요.”

 

고성주 명인은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신을 섬기는 제자들이 악한 마음을 먹는다거나 악한 짓을 하면 반드시 그 대가의 신벌(神罰)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이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고성주 명인은 제자를 가르칠 때도 굿에서 알아야 할 각종 의식은 물론 음식 차리는 법과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 굿 음식의 조리법까지 일일이 가르친다.

 

 

굿은 신성한 의식이죠. 굿상을 차리면서 음식점에서 주문해 사용한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물론 편리하고 좋겠죠. 원하는 장소에 배달까지 다 해주니까요. 하지만 굿은 정성이 반이라고 하는데 그런 음식을 신령들이 좋아할까요?”

 

고성주 명인은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이나 걸리고 힘들지만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22, 음력 37일의 고성주 명인의 맞이굿은 고 명인과 수양부리 대표, 고성주 명인의 신제자들이 함께 신령들께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상왕산 개심사 내 나혜석이 살았다던 돌집

 

정말 여기서 나혜석이 몇 달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게 상왕산 개심사를 방문했지만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아무리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거주했다니 정말 맘이 아프네요

 

4일 찾아간 충청남도 서산시. 서산을 찾아가면 꼭 빠트리지 않고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에 소재한 개심사다. 개심사를 이 계절에 찾아간 것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봄꽃인 자목련과 매화,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는 왕벚꽃을 보기 위함이다. 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이런 꽃들을 만난다는 것은 시기를 잘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운도 따라야 한다.

 

시기를 잘못 잡아 너무 일찍 개심사를 찾았다. 5일 전화로 대화를 나눈 개심사 스님은 “25일쯤에 왕벚꽃이 만개하니 그 때 찾아와 시잔 한 장 멋지게 찍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이른 아침에 전화를 건 것은 바로 개심사에서 나헤석이 몇 달간 묵었다고 하는 돌집 때문이다.

 

 

이 건물은 개심사 경내 입구 주차공간에서 계단 위 해탈문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향하면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돌을 이용해 만든 건물이 한 채 있다. 마른 담장이 넝쿨 줄기가 널려있는 이 돌 건물은 현재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 돌집에서 나혜석이 얼마간의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서산 개심사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주지로 재임했던 시기에 중흥을 이른 절이다. 만공스님은 1933년 예산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스님에 사미계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나혜석도 출가할 뜻을 비쳤으나 만공스님이 거절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나혜석이 개심사에 거주했을 때는 바로 일엽스님이 견성암에서 사미계를 받을 당시 전후인 1932~1933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개심사에서 출가한 뜻을 비친 나혜석의 의사를 만공스님이 거절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일엽은 1931년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경성에서 나혜석을 만나,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았을 때 나혜석은 일엽에게 "현실 도피 방법으로 종교를 택해서는 안 된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일엽은 나혜석에게 함께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될 것을 권고하였으나 나혜석이 거절했고, 후일 1935년 나혜석이 승려가 되려 하자 이때는 일엽스님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아 나혜석이 상왕산 개심사에 거주했던 시기는 1932~1933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5년에는 견성암을 찾은 나혜석이 일엽스님에게 출가할 뜻을 전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로 들어가 ()’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덕사, 해인사, 다솔사 등 산사를 전전하다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등 방황을 거듭한다. 시대를 앞서간 여인 나혜석은 이런 와중에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는데 해인사 석탑, 해인사 홍류동, 학서암 염노장, 다솔사 등의 작품이 남아 있다.

 

삶이 고단해지자 출가할 뜻을 가졌던 나헤석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돌다가 반신불수로 양로원 등지를 떠돌았다. 나혜석은 194612월 눈보라치던 날, 거리에서 한 행인에게 발견되어 시립자제원(지금의 서울시립남부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분류된 채 생을 마감한다. 관보에는 그의 사망 연월일이 19491210일로 되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나혜석이 사망시기가 1946, 1948년 등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남매 아해들아!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나혜석의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라는 시이다. 하지만 나혜석은 꽃 한 송이 자녀들에게 받지 못한 체 그가 어디 묻혀있는지조차 알 길 없다. 그런 나헤석이 살았다고 전하는 개심사 돌집. 한 옆에는 매화가 망울을 맺고 있고 진달래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개심사에 온지 3일 밖에 되지 않아 알지 못한다는 스님은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개심사 돌집과 나혜석. 언제쯤이면 누구를 통해 그 명확한 이야길 들을 수 있을까?

 

용담 안점순 할머니 시민사회장 장례식 열려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모인 300여명의 추모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비장하다. 평생을 여자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여성인권평화운동가로 살아오시다가 33090세로 영면하신 할머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숨소리조차 크게 나지 않는 추모제장은 그저 안타까운 사람들의 모습만 가득할 뿐이다.

 

"소중한 우리 수원시의 시민인 안점순 할머니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셨지만 끝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할머니가 받지 못한 사과를 반드시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점순 할머니의 영면으로 이제 29분의 성노예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실 뿐입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로 인한 할머니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조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가끔 목이 메는 듯하다. 이날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추모제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인 아주대 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서 거행되었으며 개회선언에 이어 묵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향 대표의 약력보고, 고 안점순 할머니의 추모영상, 조사(염태영 시장, 수원시의회 김진관 의장, 국회의원 김진표 의원), 정수자 시인의 추모시 등으로 이어졌다.

 

 

평화로 귀향 하소서

 

황의숙 수원평화나비 공동대표가 조사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자 누군가 황 대표는 끝까지 못 읽고 울 것이라고 한다. 황의숙 대표는 울지 않겠다고 했지만 끝내 목이 메는 듯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추모제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은 듯 사람들의 입에서 가는 숨을 토해내고 있다.

 

평화로 귀향 하소서

입이 없는 듯 귀가 없는 듯 혼자 떨며 지내오다

이제 더는 못 참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석순희라는 이름으로 실은 안점순 님의 이름 석 자 새로 받은 양 힘주어 펼쳐들고

무덤까지 잠그려던 입술을 뜨겁게 뜨겁게...

 

정수자 시인의 추모시 평화로 귀향 하소서를 낭송할 때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듣고 있다. 간간히 운이 끊어지는 추모시가 오히려 더 가슴을 싸하게 만든다. 수원시민사회장례위원회 이성호 집행위원장은 추모제가 처음이라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했지만 추모제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의 일생을 되새기면서 슬픔을 달래고 있다.

 

 

이제 모든 슬픔 내려놓고 영면하소서

 

용담 안점순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복사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14세가 되던 1941년 서울 마포구 복사골에서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일본군에게 끌려 내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일본군성노예 생활을 시작했다. 18세인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이 되자 8개월간 북경에서 체류하다 다음 해 천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23세가 되던 1950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내려갔으며 65세기 되던 1992년 수원에 정착했다. 다음해인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한 후 2014년부터 수원평화나비 여성인권평화활동가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시다가 33090세로 영면에 드셨다.

 

 

지난해 12월 고 용담 안점순 할머니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청춘은 돌아올 수 없다. 피해자들 곁에 와서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게 원칙 아니냐. 이제라도 사죄 한마디 하면 다 끝날 일이다"라며 일본 정부의 사과를 거듭 요구했다.

 

슬픔과 고통을 정의로 승화시키고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 채 떠나신 고 안점순 할머니. “다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고 싶어요라는 생전에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얼마나 그 말속에 진한 아픔이 있는 것일까? 이제라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영연에 드시기를 두 손 모아 간구한다.

 

굿은 한풀이이다. 그리고 굿은 살아남을 자들의 희망이다

 

엄마!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

딸들과 외손녀 등 가족들이 방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붙들고 용서하라며 통곡을 한다. 흡사 어머니가 생전에 잘 사시다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손발을 주무르며 울고 있는 두 딸과 외손녀의 용서하라는 통곡소리로 방안이 떠나갈 듯하다.

 

26일 오전, 경기도 하남시 산곡동에 소재한 굿당 산신당. 이곳의 특실에서 열린 망자 파평 윤씨()49제 진오기가 열렸다. 이날 진오기굿은 성남시에 거주하는 남무(男巫) 지현준의 주관으로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굿상을 마련하고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 회장은 2017121일자로 문화체육관광부 인정 ()한국토속문화진릉협회 1호 명인으로 지정을 받았다)을 주무로 수원시 연무동에 거주하는 만신 임영복, 그리고 고성주 명인의 신딸인 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서유리 등이 굿꾼으로 참여한 진오기굿이다.

 

 

 

진오기굿이란 지노귀굿이라고도 하며 죽은 망자의 넋이 극락으로 가도록 일정한 기간 안에 행하는 굿을 말한다. 서울 등 기전지방에서는 진오기라고 하며, 남도 지방에서는 오구굿이라 고 한다.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씻김굿;, 이북인 평안도지방에서는 다리굿이라고 부른다. 죽은 망자의 혼을 극락왕생시킨다는 뜻에서는 같은 맥락의 굿이다.

 

이날 망자는 경기도 하남시 덕품동에 거주하던 망자 파평 윤씨와()와 망자의 남편인 고 김해 김씨, 그리고 망자의 사위인 고 밀양 박씨 등이며, 제가집(망자의 가족)은 파평 윤씨의 큰딸과 작은딸인 김아무개 씨와 밀양 박씨의 딸, 그리고 망자 밀양 박씨의 사위인 남무 지현준 등이었다.

 

 

굿은 망자 가족의 한풀이인가?

 

방안 가득 차려놓은 굿상과 한 옆에 마련한 망자의 상, 그리고 문 밖에는 사자상 등 두 개의 상이 차려졌다. 이날 아침 7시경 부터 준비한 상차림이 끝나고 망자의 가족들이 도착하곡 난 후 고성주 명인의 앉은부정으로 진오기굿이 시작되었다. 부정을 마치고 난 고성주 명인이 큰머리를 쓰고 상산과 별상굿을 진행한 후 망자의 옷을 걸치고 조상굿을 진핼하다가 갑자기 도약을 하기 시작한다.

 

고성주 명인의 굿을 20년 넘게 보아왔지만 이렇게 높게 도약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바닥에 쓰러진다. 머리가 방바닥에 무딪치는 소리가 하고 날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놀라 주변으로 모여든다. “얼른 잘못했다고 비세요라는 임영복이 알려주자 순간 방안은 울음바다로 변한다.

 

 

고성주 명인의 신아들인 지현준이 머리를 잡고 망자의 두 딸과 외손녀가 팔과 다리를 주무르면서 통곡을 한다. 망자 파평 윤씨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엄마를 부르며 통곡하는 두 딸은 그동안 망자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 것일까? 울음이 그치질 않는다.

 

족히 10여분은 지나 찬물을 먹이고 손발을 주무르니 숨을 내쉬며 고성주 명인이 눈을 뜨고 하는 첫 마디가 망자의 가족들을 더 슬프게 만든다. “내가 살아서는 가는 길조차 아무도 없이 혼자 보내더니 이제 와서 울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고인을 혼자 쓸쓸히 보낸 두 딸은 그 말에 통곡을 한다. “엄마! 잘못했어요. 용서하세요라고 아무리 크게 소리치며 빌어보지만 이미 세상을 하직한 망자가 아니던가?

 

 

명인 고성주의 굿은 달랐다

 

진오기굿 중에서도 49제에 맞춰 하는 굿이 가장 어려워요. 자리걷이나 진진오기(망자가 세상을 떠난 뒤 49일 안에 하는 진오기굿)와는 달리 49제에 하는 굿은 망자의 가족들이 첫 번째 영적인 이별을 하는 날이기 때문에 가장 슬픔이 클 때죠. 49제를 마치면 망자와 이별을 한다는 생각에 망자의 가족들이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거든요

 

굿을 몇 거리 마치고 난 뒤 잠시 숨을 돌리며 고성주 명인이 하는 말이다. “머리 다쳤는지 알고 걱정했다는 말에 갑자기 전율이 오더니 자신도 모르게 뛰어오르게 되었다는 고 명인은 온 몸의 뼈가 다 물러난 듯하다고 한다. 자신도 스스로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도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도 집안에 상이 나 진오기굿을 했는데 오늘 굿과는 영 달랐다는 제가집의 한 사람은 진오기굿을 했는데도 마음이 영 편치 않고 무엇인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고성주 명인의 진오기굿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는 것이다. 딴 사람은 불과 4~5시간 만에 끝나버렸던 굿을 이날은 준비부터 꼬박 12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이다.

 

 

무당(巫堂)은 아픔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자 희망을 전하는 사람

 

무당은 배우가 돼야 해요. 무당이 굿을 하면서 제기집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한다면 무당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죠. 왜 돈을 들여 굿을 하나요? 무당이 굿판에서 제가집의 막힌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면 훌륭한 무당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굿을 마친 시간은 오후 6시가 넘었다. 굿을 마친 후 고성주 명인은 무당은 영적 치료사이자 희망을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당이 굿을 하고나면 굿을 한 제가집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맺힌 한이 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당은 배우가 돼야 해요. 그냥 정해진 굿거리 제차만 진행하면 되는 것이 아니죠. 무당은 굿을 당부한 사람들이 어떤 아픔이 있는지 그런 것까지 풀어줄 수 있어야 큰무당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은 그저 편하게 굿들을 하는데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굿은 있어도 굿할 무당이 없다고 한탄을 하는 고성주 명인은 두 명의 신아들과 한 명의 신딸에게 굿을 전수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지만 올바른 무당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을 걷는다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지금 자신에게 경기안택굿 전수를 받고 있는 신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굿을 배워 경기안택굿을 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굿당에 들어온 제가집 사람들. 진오기굿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실컷 울면서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버렸기 때문이란다. “무당은 배우라는 고성주 명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흡사 한편의 드라마를 본 듯한 망자 파평 윤씨 진오기굿. 제가집 가족들의 얼굴이 편해졌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기 때문이다.

 

지동 고성주씨 올해도 백가반이웃과 나눠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백가반(百家飯)>제삿밥을 나누어 먹는 옛 풍속을 답습한 것이라 하였으며 오곡밥(, 보리, , , 좁쌀을 넣어 지은 밥)5라는 길수(吉數)가 무한대의 긴 것을 나타내고 밥이 인간의 수명을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양식인 만큼 여러 집의 밥을 먹음으로써 여러 사람의 명을 빌려 수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생긴 행위로 보고 있다.

 

정월 대보름 아침이면 아이들이 조리나 작은 소쿠리를 들고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오곡밥을 한 숟갈씩 얻는다. 속설에 타성 백 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기 때문이다. 백 집 밥을 먹지 않으면 어린아이가 봄에 발병하고 몸이 마른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도 봄을 타서 살빛이 검어지고 야위는 아이는 백가반을 빌어다가 절구에 올라타 개와 마주앉아 개에게 한 숟갈 먹인 다음에 자기도 한 숟갈 먹으면 다시는 그런 병이 도지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정얼 대보름의 행사는 일 년의 많은 절기 행사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행사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이루어지는 것은 새해를 시작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수원의 각 주민센터나 단체, 전통시장 등도 보름을 전후해 각종 행사를 펼침으로써 일 년의 평안을 도모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매년 <백가반>을 나누어 주는 사람

 

팔달구 지동에 거주하는 고성주씨는 매년 정월 보름이 되기 며칠 전부터 분주해진다. 정월 대보름에 백가반을 지어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지난해는 200명분을 지어 나누었는데 올해는 150명 분 정도를 준비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경제가 어렵기도 하지만 백가반을 나눌 수 있는 어른들 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28, 고성주씨 집안이 온통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로 찼다. 백가반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9가지의 나물과 각종 김치 등 모두 13가지나 되는 대보름 음식을 준비한다. 그것도 자신이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기 위해 준비를 하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물을 무치고 볶고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정성을 필요로 한다.

 

대보름에는 나물 9가지와 각종 김치 3가지 그리고 김과 오곡밥 등을 용기에 담아 전해드리죠. 대보름 음식인 백가반을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요. 이웃과 나눌 것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해야 하거든요

 

고성주씨가 나물을 무치면서 연신 맛을 보며 하는 말이다. 말이 150명분이지 그 양을 보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 많은 것을 척척 무쳐내는 모습을 보면서 40년 넘게 이웃과 나눠왔기 때문에 그 손에 얼마큼의 정성이 깃들어 있을지 가늠이 간다. 그렇게 준비한 것을 용기에 담는 일만해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오곡밥은 일일이 시루에 쪄내

 

일반적으로 오곡밥은 대보름에 먹는 시절음식이다. 하지만 고성주씨는 매년 대보름 하루 전에 오곡밥을 시루에 찐다. 오곡밥은 시루에 쪄야 제 맛이 난다는 고성주씨의 고집 때문이다.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고성주씨의 고집을 막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밥통에서 쪄낸 오곡밥과 시루에 쪄낸 오곡밥은 맛의 차이가 난다. 시간이 걸려도 고집스럽게 시루에 오곡밥을 쪄내는 이유이다.

 

준비를 마치면 일일이 용기에 나물과 김치, 오곡밥을 담아낸다.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을 먹어야 추운 겨울동안 허해진 체력을 보강하고 이렇게 오곡밥을 지어 먹어야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해요. 그래서 매년 이렇게 오곡밥과 나물을 준비해 이웃과 나누는 것이죠나눔에는 뜻이 있어야 한다. 그 전해지는 오곡밥과 나물에 대한 전통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란다.

 

오곡밥에 대한 설화는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기이 사금갑조>에 보이고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경주 남산기슭의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행차를 하던 중 까마귀가 날아와 봉투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다. 봉투를 열어보니 "금갑을 활로 쏘라"고 적혀있었다. 왕이 궐로 돌아와 글대로 금갑을 쏘니 금갑 안에서 왕비와 역모를 꾀하고 있던 신하를 발견한 것이다. 소지왕은 까마귀를 만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까마귀 제삿날로 정하고 오곡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오곡밥을 지어먹게 된 유래라고 한다.

 

설화와 어떻게 전해지던지 정월 대보름이 되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새로운 한해를 열어가기 위해 많은 행사와 백가반이라는 시절음식으로 한해를 시작한다. 그 한해를 이웃과 나누기 위해 음식을 준비한 고성주씨가 있어 지동의 어른들은 올 한해도 건강을 잃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