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다. 물론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그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였다.

 

남한산성에는 원래 4개소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수구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북문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성을 개보수할 때, 새로 신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북문을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패전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전승문’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300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문을 나선 병사 300명이 수많은 적을 기습공격을 한다고 해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을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번을 못해보고 몰살을 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던 병사들. 그들은 45일간이나 남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청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북문의 기습공격이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티거나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군사 300명이 적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최대의 전투로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기록은 아픔 그대로인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은, 왕세자의 스승인 정지호가 쓴 『남한일기』에 잘 묘사 되어있다. 아마도 당시 인조와 세자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묘사를 한 듯하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인조는 일만 삼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을 갖고 남한산성에서 청의 20만 대군과 대치하면서 항전을 펼쳤으나,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게 항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북문의 기습공격의 실패와,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사 유림이 지휘하는 조선군 5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청의 용골대와 마골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승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누각에 오르니 아래로 가파른 언덕이 펼쳐진다. 저 곳을 지나 청의 군사를 공격하겠다고 병사들이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 가파른 언덕 밑에 청군의 군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승문은 성의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성벽은 딴 곳과는 달리 경사가 지게 축성을 하였다. 성문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이 펼쳐진다.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길이 나 있다. 아마 이 북문을 빠져나간 병사들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전승문. 이 문 위에서 지난날을 가억해 본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패전을 했겠지만, 이 전승문의 실패를 거울삼았다면, 이와 같은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문에 덧붙인 철판을 만져보면서, 역사의 아픔은 어찌 그리도 빨리 잊히는 것인지. 오늘 이 북문에 올라서 그 슬픔을 되새겨 본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에 자리하고 있는 청계사. 2012년 첫 답사를 청계사로 정하고, 오후에 길을 나섰다. 청계사에는 조선조 때의 유명한 종장인 사인비구가 주조한 사인비구 동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인비구의 종은 보물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청계사 동종은 보물 제11-7호로 지정이 되었다.

 

경기도 문화재재료 제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계사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창건이 되어 고려 충렬왕 10년인 1284년에 크게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연산군이 도성 안에 절을 폐쇄하였을 때는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의 본산으로도 정해졌던 절이다. 청계사에 소재하고 있는 동종에 보면, 현재의 청계산은 숙종조 당시에는 ‘청룡산’으로 불렀다고 적고있다.

 

 

주종장 사인비구의 독특한 동종

 

사인비구는 18세기의 뛰어난 승려이자 종을 만드는 장인이다.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8구의 사인비구의 범종은, 각기 독특한 형태로 제작이 되어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청계사 동종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사인비구의 동동 중에서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보물 제11-1호인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동종이다. 서운암 동종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물 제11-2호 문경 김룡사 동종과 제11-3호 홍천 수타사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딴 종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 형태로는, 보물 제11-4호인 안성 청룡사동종과, 제11-8호로 지정된 강화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된 양산 통도사 동종은 팔괘를 문양으로 새겨 넣어 딴 사인비구의 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보물 제11-5호인 서울 화계사 동종과, 보물 제11-7호인 의왕 청계사 동종이 있다.

 

사당패의 내력을 적은 시인비구 동종

 

사인비구 동종의 면문에는 사당패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조선조 후기에 사찰의 경제적인 면에 유랑집단인 사당패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랑집단은 조선조 말에는 ‘절걸립’이라고 하여, 절에서 발행한 신표를 갖고 걸립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청계사의 동종을 주조할 당시에도 이러한 사당패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청계사 동종은 청계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서울 봉은사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청계사 동종은 사인비구가 명간, 계일, 여석, 수강, 귀선, 임선 등과 함께 60세 이후에 제작한 종이라고 명문에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인 특징을 벗어난 이 종은 사인비구의 또 다른 주종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쌍룡으로 조성한 용뉴

 

청계사 동종의 특징은 종을 매단 용뉴를 쌍룡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쌍룡으로 용뉴를 조성하는 것은 중국 종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개는 용뉴에 음통을 만들어 함께 붙이지만, 청계사 동종은 음통을 두지 않고 공기구멍을 뚫어 소리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에 굵게 두 줄로 띠 장식을 둘렀는데, 상대에는 당초문으로 하였으며 하대에는 보상화문을 둘렀다. 상대 밑으로는 유곽을 내었으며 9개의 꽃에는 중앙에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곽의 사이에는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유곽의 아래에는 시주자들의 이름 등을 명문으로 적어 넣었다.

 

사인비구의 다양한 주종형태를 볼 수 있는 동종. 그 중에서도 청계사 동종은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종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들을 수 없음이 아쉽기도 하지만, 종의 아랫부분에 깨진 듯한 흔적이 보인다. 오랜 세월 인간의 억압된 영혼을 번뇌에서 구하기 위해 울렸을 청계사 동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나무의 줄기가 흰색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백송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한 나무가 아니다.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지정 해제된 백송들

 

흔치 않은 나무인 백송이 그나마 살아있는 곳도 많지가 않다. 예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던 나무들이 고사를 했거나, 지정 해제를 당했기 때문이다.

 

1990년 7월. 태풍으로 안해 쓰러진 통의동 백송.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었다(인터넷 검색)

 

천연기념물 제4호였던 서울 통의동 백송은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1993년 3월 24일 바람에 쓰러져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년 7월 17일 폭우를 동반한 돌풍에 쓰러져 줄기가 부러져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 7월 19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였으나,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월 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이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5호였던 서울 내자동의 백송은 1965년 10월 15일 고사로 인해 지정 해제가 되었으며, 2003년 7월 4일 지정 해제가 된 원효로의 백송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4가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었던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6호였다.

 

이 외에도 고사나 보존가치를 상실해 지정 해제가 된 천연기념물 재7호였던 서울 회현동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6호였던 경남밀양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4호였던 충북 보은의 백송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81호였던 개성리의 백송은 미수복 지역에 있어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390호이기도 하다.

 

 

조계사 대웅전 앞 백송

 

현재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하고 있는 조계사 대웅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수송동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수령 500년 정도로 추정하는 이 백송은 높이가 14m 정도이며,밑동부분의 둘레는 1.85m 정도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원줄기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한편으로 길게 위로 올라가면서 나 있다.

 

백송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수송동의 백송은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가 나무 옆에는 차들이 주차를 하고 있어, 매연으로 인한 생육에 지장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5그루 밖에는 안된다는 백송. 수송동의 백송은 생육의 환경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에 얼마나 더 오래 살아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 부터라도 백송 근처에 차량을 대어 놓는다거나 하는 것은 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연기념물이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생물학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원 여민각은 상생의 소통과 나눔을 상징

 

12월 31일 자정. 수원 화성 행궁 앞 도로변에 자리한 여민각(與民閣)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밝아오는 2013년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다. 이날 화성 행궁 광장에는 2만 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운집해 제야를 보내고 있었다. 화성 행궁 앞에 세워진 여민각은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배어있는 종각이다.


‘여민(與民)’이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으로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여민락’이라는 아악에서 기인한다. 현재는 관현합주로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이라고도 한다. 오래도록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들과 함께 행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여민각에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 벌어졌다는 것은 남다르다. 

 


 

여민각은 발전과 상생, 나눔의 미학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일부를 노래로 부른 것이다. 사신의 연향이나 임금의 거동 때 쓰이던 음악이 점차 변화되어, 세종 이후 행진을 할 때 연주하는 음악인 ‘행악(行樂)’으로 사용되었다. 여민락은 여민락, 여민락만, 본령(本令), 해령(解令) 등 4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 백성과 함께 더불어 즐긴다는 뜻을 가진 ‘여민’은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의 뜻과 함께한다. 즉 백성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정조대왕이기 때문에, 정조의 효심이 깃든 여민각이 수원에 세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여민각에서 제야를 넘기고 새날을 맞는 타종식이 열렸다는 것 또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수원의 여민각은 발전과 상생, 소통과 나눔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제야의 종을 치면서 모든 사람들은 새해에는 더 많은 소통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행정과 의회,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2013년에 더 발전할 수 있는 수원이 될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빈 것이다.


많은 행사와 나눔이 이어져


화성 행궁 앞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31일 오후 9시 30분부터 많은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편에 마련된 부스에는 뽀얀 사골국물이 끓고 있다. 한국조리사회 중앙회 경기도지회의 회원들이 힘을 합해, 추운 날 제야의 종을 만나러 온 시민들에게 떡국을 끓여주기 위해 모였다.

 


커다란 통에서는 50시간이 넘게 고았다는 사골국물이 뽀얗게 우러나고 있다. 200kg이나 되는 사골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회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김경일 사무국장은, 지난해에는 5천 그릇을 했는데 모자라 올해는 6천 그릇을 준비했다고 한다. 경비도 만만치 않아서 3천 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 경비는 삼성 등에서 보조를 받았다는 것.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여민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 등 수원시의회 의원들과 공무원, 시민 등 수 천명이 여민각 주위를 들러쌓고 있다.

 

 

 

 

2013년에는 모두가 더불어 즐기는 해이길


염태영 수원시장은 새해를 맞이하는 자리에서

 

“수원은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을 할 것이다. 오늘 이 타종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지난 한 해 나쁜 기억들을 버리고, 2013년의 새해를 맞이하자. 소통과 상생, 그리고 더불어 잘사는 수원, 사람이 반가운 휴먼시티 수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당부를 했다.


모두 33번의 종을 울린 이날 첫 타종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 그리고 강성채 수원남부경찰서장 등이 함께 했다. 타종을 마친 염태영 수원시장은 직접 시민들에게 떡국을 배식하기도.

 


 

감자기 뚝 떨어진 기온도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사람들의 바람을 꺾지는 못했다. 2만 여명이 넘는 시민이 운집한 여민각의 타종식. 그 종소리가 뻗어나가듯, 앞으로 모든 이들의 뜻이 널리 펼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여민각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2012년도 다 저물어가는 12월 29일.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소재한 서울노인복지센터 구내식당이 시끌벅적하다. 이른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른 자원봉사자 80여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센터 관계자로부터 봉사를 할 장소와 방법 등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 날 자원봉사자들은 지구촌공생회, 영화사, 남원 선원사와 개인적으로 봉사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오전 11시 20분부터 1시 30분 정도까지 2,000명의 어른신들께 점심을 대접하는 이날 봉사는, 전날 남원서부터 이곳까지 갖가지 채소와 20kg짜리 쌀 15포를 차에 싣고 온, 스님짜장의 주인공인 운천스님이 2,000분의 어르신들께 짜장밥을 봉사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일 년의 봉사를 마무리한 짜장스님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한 운천스님은 2012년 한 해에 60회가 넘는 봉사를 하고 다녔다. 한 해에 만든 짜장면과 짜장밥만도 35,000그릇이나 된다. 2012년 스님짜장의 봉사가 이곳에서 마무리가 지어지는 것이다. 봉사자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자리로 옮겨 어르신들께 짜장밥의 공양을 준비하기에 바쁘다.

 

식당의 문이 열리기 전에 봉사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섰다. 누구는 식탁만 청소를 하고 다니고, 누구는 배식구 안으로 들어가 밥을 푸고 짜장을 담아낸다. 그런가 하면 수저만 나누어주는 봉사자도 있고, 어르신들이 음식을 드신 후 입을 닦으라고 휴지만 준비를 하는 봉사자들도 있다.

 

 

빈 그릇을 재빨리 주방으로 날라다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말끔히 세척을 하는 봉사자도 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식판에 담긴 짜장밥을 식탁으로 옮겨내는 봉사자도 있다. 하나같이 말없이 자신의 맡은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불만에도 웃음으로

 

11시 20분에 식당의 문이 열리고 어르신들이 식탁에 자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은 식판에 담긴 짜장밥과 수저를 어르신들이 앉은 자리로 날라다가 놓는다. 그런데 가끔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계시다. 아마도 밥이 부족하거나 짜장이 부족하다고 그러는가 보다. 양푼에 밥과 짜장을 담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더 떠주는 자원봉사자의 이마에 땀이 맺힌다. 그렇게 식당 안은 왁자하니 소란하다.

 

 

가끔은 듣기에 민망한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자원봉사자 누구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다. 한꺼번에 320명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좁지 않은 식당이지만, 2,000명이면 8번이나 바뀌어야 한다. 이리저리 식탁 사이로 다니면서 식사를 마치고 나간 자리를 열심히 깨끗하게 닦아내는 봉사자들도 몇 차례가 바뀌자 지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웃음으로 시종일관 어르신들을 대하는 자원봉사자들. 그들을 보면서 봉사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 줄을 깨닫게 된다. 노인센터에서 근무를 했었다는 한 분은

 

“처음에는 줄을 서시라고 했다가 소화기를 갖고 등을 맞은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어르신들 스스로가 질서를 잘 지켜주셔서 그래도 참 좋아 진 것입니다. 이 복지센터를 이용하시는 어르신들이 하루에 3,500명 정도가 되는데 그 중에서 2,000명에게 식사대접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는 어르신들이 그런 것도 조금은 이해를 하시고 단돈 500원이라도 성금함에 넣어주십니다. 그것으로 다시 어르신들을 위하는 일에 사용을 하고 있죠.”라고 한다.

 

 

아름다운 미소 자원봉사

 

지구촌공생회에서 봉사를 하러 왔다는 한 자원봉사자는

 

“어르신들이 날도 추운데 점심 한 그릇을 드시겠다고 이곳까지 오셨는데, 행여 그분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되죠. 그저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하다가 보면, 저분들도 언젠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알지 않겠어요?” 라고 되묻는다.

 

1시 30부이 지나자 2,000분의 배식이 모두 끝났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주방에서 나오는 운천스님께 수고하셨다고 말씀을 드리고 2013년 계획을 잠시 물었다.

 

“내년에는 한 4만 그릇 정도를 봉사하려고 합니다. 소록도 같은 곳이나 평택항에서 중국으로 가는 보따리 장사들을 위해서도 짜장면을 만들어 드리려고요. 그분들도 한 천명 가까이 된다고 하네요. 밥 한 그릇 마음대로 사먹지 못하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는 정말 많습니다. 2013년에는 더욱 살기가 팍팍할 것이라고 하는데, 저도 그렇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봉사를 하는 지원봉사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앞으로 좋아지겠죠.” 라며 웃는다.

 

 

봉사가 즐거운 사람들. 그리고 그 봉사를 하면서 마음의 평안과 건강을 찾았다고 하시는 분들. 그 분들이 있기에 어둑하고 침침한 우리사회가 조금은 밝아지는 것은 아닌지. 해가 지날 즈음에 찾아간 노인복지센터의 그 아름다운 미소가 오래도록 가시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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