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전 굴뚝, 아미산 굴뚝은 아름다움의 정점

 

요즈음에 짓는 집들은 무엇인가 하나가 허전하다. 집을 아무리 줄러보아도 이가 빠진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요즈음 집의 구조상 예전과 같이 집 뒤 켠 처마에 맞닿아 있는 굴뚝이 없기 때문이다. 굴뚝은 아궁이나 화실(火室)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불연성(不燃性)의 연결체이다.

 

연소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고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온 연기나 가스 등을 하늘 높이 뿜어내게 만든 구조물로써 독입굴뚝과 벽붙이굴뚝이 있다. 구조재에 따라 분류하면 토관류굴뚝·벽돌굴뚝·철재굴뚝·철근콘크리트굴뚝 등이 있다. 굴뚝은 원형으로 하는 것이 공기학상으로도 바람직하고, 정사각형도 많이 쓰이며, 직사각형은 정사각형보다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므로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 굴뚝에는 다른 열기구가 접속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집은 대개 온돌을 사용한다. 하기에 적당한 산소 공급과 연소가 원활하게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기가 아궁이로 새어 나오기 때문에 굴뚝을 높게 만들어서 연기를 위로 올려 보내야 한다. 연기는 기체이며 기체의 성질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부는 원리와도 같은데, 태풍은 기압이 매우 낮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경복궁에 잇는 자경전 굴뚝은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물 81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해··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보물 811호인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었던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1394)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1867)에 재건되었다. 고종 13(1876)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1888)에 복구되었다.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가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2벌 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석(怪石)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2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 평면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闢邪像)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이 굴뚝은 우리나라의 축조물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참조)

 

주변 벚꽃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찾아가다

 

그동안 문화재답사를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정작 꽃이 만개하는 봄철을 이용해 다닌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봄철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보니 정작 문화재답사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철 이른 3월이나 봄꽃이 다 지고난 후 돌아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모처럼 꽃이 만개한 안양 중초사지를 찾아갔다고 벚꽃이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의 모습을 보고 문화재답사도 꽃이 만개할 때가 제대로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절이다. 2012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유유산업이 문을 닫았을 때인데 414일 찾아간 이곳은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을 하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중초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중초사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의 중초사지 당간지주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보력 2(신라 흥덕왕 1, 826)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 2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고 적고 있다.

 

당시 중초사에는 다양한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다양한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서 8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1일 중초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흥지도서(興地圖書), 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배경으로 한 당간지주 작품이네

 

보물 제4호인 당간지주와 함께 서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주변에 꽃이 만개한 나무에서 벌써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벚꽃과 함께 서있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은 어느 방향에서 사진을 촬영하던지 예전과 다르다. 흡사 차디찬 석재가 생명을 얻은 듯하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그동안 담아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 가을. 꽃이 피거나 단풍이 물들 때 문화재답사를 해야 제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아름답다. 어느 곳에서 촬영을 하던지 벚꽃이 핀 가지가 조금만 들어가도 분위기가 다르다. 바븐 일정 중 잠시 시간을 내어 찾아간 안양 중초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두 점. 기분 좋은 답사를 하면서 앞으로는 주변 환경을 먼저 생각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가장 아름다운 문화재를 만나기 위함이다.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정조의 뜻 담겨있어

 

정조대왕이 도성의 궁을 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과 동작 - 사당 - 과천을 가쳐 수원으로 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노량진을 거쳐 시흥 -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향한 길이다. 그 당시 주로 행행을 하는 길은 사당 -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지만 동작에서 사당을 거쳐 과천의 길은 워낙 가파른 고개가 있어 어가행렬이 많이 지체되고는 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찾아가는 행행길을 한강 배다리를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행하는 길을 이용했다. 이 길에는 안양천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능행길의 다리는 목조로 가설했다가 왕의 어가가 지나면 다시 철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효심이 남다른 정조대왕은 부친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당시 경기관찰사인 서유방에게 안양천에 석교를 놓을 것을 명했고, 서유방은 안양천에 3개월의 공사 끝에 7개의 홍예가 있는 석교를 완성했다. 정조는 이 다리를 만안교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백성을 어여삐 여긴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라는 이름을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 만안교

 

12일 오후 안양으로 향했다. 안양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함이지만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안양천에 다리를 놓았다는 만안교(萬安橋)’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679 삼막천 위에 소재하고 있다.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를 건너 수원 화성행궁으로 오곤 했는데 이 다리는 석조로 조성했지만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만안교의 길이는 31.2m, 폭은 8m로 당시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말은 탄 기마병들이 지나기에 충분하도록 축조한 것이다. 현재 이 만안교는 1980냔 국도의 확장공사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460m 떨어진 안양교 사거리의 교차지점에 소재하고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안안교 곁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을 쓴 만안교비가 서 있다. 효심이 남다르던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내를 건너기 위해 축조했다는 만안교. 다리 위에 올라서면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진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얼마나 다니고 싶었으면 가교(假橋)인 목교가 아닌 단단한 셕교를 축조할 것을 명했을까?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돌다리 만안교

 

만안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교(무지개다리)로 알려져 있다. 만안교의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살펴본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하단부를 삼각형으로 조성한 돌을 유속방향으로 놓아 큰 물살에도 교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성하였다. 홍예를 받치고 있는 교각 역시 정교하게 조성해 짜임새가 독특하다.

 

상판에 놓은 석재도 큼직하게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하나하나가 정조대왕의 치밀함을 그대로 들어낸다. 화성을 축성할 때도 일일이 돌아보고 문제점을 해결하던 정조대왕이다. 백성을 아낀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 시 원래의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살폈던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만안교. 봄날 찾아간 안양시 소재 만안교에서 다시 한 번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는다. ‘만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다리혹은 모든 백성이 편안한 다리라는 만안교는 7칸의 홍예를 가진 아름다운 석교의 모습을 20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용인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은 수원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성IC로 나가면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멀리 문화재답사를 나갈 수 없을 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찾아간다. 호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전시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작품과 아름다운 경치, 어찌 이곳을 자주 찾아가지 읺겠는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에 소재한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422일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호암미술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 창조의 꿈을 심어주고 민족문화의 산 교육장이 되는 장소이기를 원했던 창업자의 설립취지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한다.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1997년 개원한 전통정원 희원이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안 1층에 유명화가들의 작품과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민화와 국보와 보물 등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기에 난 안에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희원에 서 있는 석탑과 석조조형물 등을 더 좋아한다.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희원에 늘어선 석조물과 가을의 만남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2주 연속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가을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 정원을 둘러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시기 때문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50% 할인이 된다. 요즈음은 문화재를 감상하기 위해 전시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나이 먹은 덕을 톡톡히 보고 산다.

 

전통정원이라는 희원은 들어가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양편으로 늘어선 석인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옛 전통문양을 떠서 만든 보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석탑들이 서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조성된 이 석탑들은 문화재 지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탑 그대로가 주변 단풍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곳 전통정원인 희원에서 만나는 국보를 묘사한 탑도 눈길을 끈다. 국보 제101호 모조현묘탑은 2012년도에 경복궁내에 서 있는 실제탑을 촬영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갈 때마다 정감이 가는 탑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라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수난의 세월을 지내온 문화재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현묘탑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경복궁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 정정을 해야 할 듯하다.

 

정원을 돌다보면 우리 전통정원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아름답게 물든 단풍으로 인해 최고의 멋진 정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감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 호암미술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삼만육천지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인공호수가 있다. 그곳에도 가을이 깊었다. 호암호수로 불리는 삼만육천지는 1970년대 자연농원 개발 시절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면적이 3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만육천지 주변에 조성된 700m 길이의 벚꽃터널과 호숫가 벚꽃 산책로에는 왕벚나무를 비롯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 등 1만 그루나 식재되어 있다.

 

이곳 삼만육천지를 끼고 걷는 산책길은 가을을 느끼기에 최적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상쾌해진다. 이런 가까운 곳에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우리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 30분이면 찾아갈 수 있는 이곳은 지금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가을이 그립거든 이곳을 찾아가보라.

고성 정수암 산신각 점안식이 열리던 날

 

4월 초파일은 부처님 탄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또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하는 초파일은 불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여기며, 이 날은 기념법회를 비롯하여 연등놀이, 관등놀이, 방생, 탑돌이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초파일은 각 절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각 사찰에서는 법당과 경내,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이날은 육법공양을 행하는데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물로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법공양물은 쌀, , , , 과일, 차 등으로 이러한 공양물을 부처께 바치는 의식이다.

 

4월 초파일에 다는 연등은 그 의미가 깊고 오래되었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파일 법회를 위해 찾아간 고성 정수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소재한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을 찾았다. 벌써 다녀온 지가 며칠이나 지났다. 지난 1일 찾아갔다가 3일에 돌아왔으니 4일이나 지난 셈이다. 다녀오고 나서 수원 화성연극제며 많은 행사로 인해 제때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나 바로 글을 써야 감이 잡히는데,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 때문이다. 지난해 정수암을 찾아가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다가 법당 옆 바위에 마애불을 보았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순간 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 사람과 의논 끝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지난 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정수암은 큰 불사를 했다. 절 입구에 일광보살과 원광보살 상을 마련해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인법당 뒤편에 큰 바위를 세워 산신각을 조성했다. 원래 계획은 마애불과 신신각을 부조로 각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성을 맡은 여주시에 거주하는 김원주 작가의 일정으로 인해 산신각은 부조로 조성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인들이 지켜 낸 산신각바위

 

원래 저 산신을 그린 바위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돌이 워낙 좋으니까 조경업자가 저 바위를 산 후 쪼개서 가져가려고 했나 봐요. 바위를 쪼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분들이 막았데요. 저 바위가 예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위하는 바위였다는 거예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있어 마을에서 신령한 바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바위를 쪼개 가져간다는 소식에 여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위는 일부 쪼개서 가져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운 면의 높이가 2m가 넘는다.

 

그 바위가 마을에서 위하는 산신바위예요. 그런데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 그 비위에 산신도 그림을 저렇게 멋지게 그려놓아 이제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파일에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양할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을 다듬고 있던 신도 한 분이 하는 말이다. 정수암 신도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초파일이 되면 고성군 산학리만 아니라 속초와 서울, 구리, 남양주, 수원, 전주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신도들까지 모두 찾아오기 때문에 1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단다. 그동안 정수암은 초파일이라고 해도 50여명의 신도들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올해는 연등을 100개 넘게 달았어요. 초파일에 찾아올 순 없어도 많은 분들이 등 값을 보내주셨거든요

 

모든 이들이 마음을 합한 산신각 점안식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다들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하셔야하는데 신신각 점안식까지 다 마치고나서 공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초파일 예불을 마치고난 뒤 신도들이게 시간이 조금 걸려도 신신각 점안식을 마친 후 공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날 정수암을 찾아 온 신도들은 어림잡아 70여명, 그 모든 사람들이 산신도가 그려진 바위 앞에 나아가 점안식에 동참을 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동안 산신바위를 대우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이제 산신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의 인도로 점안식에 참석한 신도들은 모두 손을 오색실을 잡고 산신바위를 에워쌓았다. 점안식 의식을 마치고 난 뒤 한 신도가 하는 말에 공감을 한다.

 

부처님이 어디 큰 절에만 계시겠어요. 난 우리 절에 참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교가 제 몫을 못하고 있는데, 이 작은 정수암은 날마다 작은 불사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 산신바위는 정말 영험한 바위예요. 이 금강산 자락에 자리한 절도 그렇고 저 바위도 그렇고,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이 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도들이 하나같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절에 부처님이 계신것이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 “인연이 닿으면 누군가 불사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강원도 고성군 작은 암자 정수암은 늘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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