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박물관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이 된 두 기의 비가 서 있다. 그 하나는 보물 제107호인 <보광사대보광선사비>이교, 또 한 기는 당나라 장수인 <당유인원기공비>이다. 이 두 기의 비는 층이 진 곳에 서 있으며, 두 기의 비 모두가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가 따로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명국사의 유언에 의해 몸돌만 세우다.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보광사 터에 소재하고 있던 비를 옮겨 국립부여박물관 경내에 세워 놓은 보물 제107호인 <보광사대보광선사비>는,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부흥시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기록한 비이다. ‘보광사 중창비’라고도 부르는 이 비는 부여 성주산 보광사 터에 서 있던 것을, 1963년 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비는 몸돌인 비만 남아있다.

 

이 비문의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뒷면에는 조선 영조 26년인 1750년에 비문을 새겼다. 이 비에 적힌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인 1351년에 입적을 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기의 단조로운 비

 

원명국사는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는데, 이 비는 국사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난 후에야 세워졌다. 이 비는 고려시대 후기의 간략한 석비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편마암으로 조성한 대보광선사비는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비의 가장자리에는 넝쿨문양을 띠 모양으로 둘러놓았다.

 

머릿돌인 이수가 없는 비는 몸돌만 남아있는데, 윗면은 양편을 비스듬히 깎아내었다. 비의 위편에는 고려시대 대보광선사비임을 적고 있으며, 앞면과 뒷면에 원명국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뒷면의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비를 모셔놓은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석능일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당나라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

 

대보광선사비 아래쪽에는 전각 안에 또 하나의 보물로 지정된 비가 서 있다. 이 비는 보물 제21호인 유인원기공비이다. 당나라 장수인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로, 원래는 부여 부소산성 안에 세 있었던 것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 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신높이 3.35m, 이수높이1.14m이며 해서체로 몸돌의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으나, 뒷면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 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당나라 전기의 조각수법을 보이는 유인원기공비

 

이 비는 유인원의 출생과 가문, 생애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당태종에게 유인원이 발탁이 되어 645년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새웠으며, 660년에는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 유민들의 백제부흥운동을 평정하였다는 내용들이 적혀있다. 이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인 문무왕 3년인 663년으로 밝혀졌다.

 

 

이 비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아픔을 안고 있는 비이다. 그러나 그 비문 중에는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명이 당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에 고나한 내용, 그리고 폐허가 된 당시 부여 도성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에 소중한 문화적인 사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몸돌과 머릿돌을 하나의 돌로 꾸미고, 여섯 마리의 용이 세 마리씩 양편에서 올라오면서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유인원기공비. 그러나 이런 해설이 없었다고 하면 머릿돌 부분에 조각이 되어있는 것이 용이란 사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이 두 점의 비에 얽힌 부분적인 사연에 마음이 아프다. 전쟁 통에 지워진 기록과 외침에 의해 망가져버린 국토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의 아픔도 서러운데, 거기다가 수많은 문화재들이 개발이라는 허울을 쓰거나, 종교적인 이질감 등으로 훼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이래저래 마음만 미어진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천도한 후(538~660) 백제의 중심사찰이었다. 정림사지의 발굴에서 찾아낸 기와의 명문 중에는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글귀가 발견이 되어,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에는 이 절을 정림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정림사의 건물배치는 일탑식 가람배치로, 이러한 일탑식 가람배치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세련된 솜씨를 보이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정림사지 안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오층석탑. 국보 제9호인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짠 것들이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이 탑에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몸돌에 자신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전국에 이렇게 많은 탑들이 전란을 통해 얼마나 많은 훼손을 가져온 것일까?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갖는 슬픔이기도 하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 이후 충청남도 지역에는, 흡사한 형태의 탑이 많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이 탑의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탑을 돌아보다가 절로 탄성을 지르다.

 

장중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마당에 가득 쌓인 눈이 땅을 질퍽이게 만들어 신에 가득 흙이 묻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무겁다는 것도 잊은 채 탑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좁고 낮게 만든 1단의 기단위에 오층의 탑신을 세운 정림사지 석탑. 소정방의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 때문에, 한 때는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지를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이 탑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돌을 끼워 놓는 방법을 택했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는 불룩한 것이 목조건물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몸돌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네 면의 귀가 날아오르듯 솟아올라, 그 귀퉁이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단 두기의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귀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절제된 조형미, 그리고 배흘림기둥을 모방한 석조 조형의 편안함. 지붕돌 밑을 받치고 있는 돌들의 한쪽 면을 비스듬히 경사지게 조성해, 석질의 딱딱함을 없앤 조형미.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얼마나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돌로 쌓은 석탑이지만, 석탑에서 느끼는 차가움이 없다. 그리고 정리마지 오층석탑에는, 딴 시대의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석조(石槽)’란 돌로 만든 물을 담아두는 용기를 말한다. 꼭 물을 담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돌로 만든 물을 담아 목욕을 하는 용기도 석조라고 한다. 예전에는 욕조를 돌이나 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석조는 주로 절에서 많이 사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에 남아있는 석조의 대부분이 절터에서 많이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여에서 발견된 수많은 석조를 보면, 대개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 일반 가정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하는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는 많은 백제시대의 석조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석조를 하나 쯤 갖고 있는 것이 신분의 고하를 상징하는 것이나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많은 석조들이 현 부여읍 일대에서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지에서 발견이 된 석조들

 

우리나라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조는 대개 옛 절터에서 많이 발견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석조가 절에서 사용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다. 보물 제102호인 서산 보원사지 석조 역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는 용기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절에서 많이 사용한 물을 담아두는 석조는 장방형, 원형, 팔각형 등 다양하다. 공주 중동 석조처럼 특이한 석조도 있다. 보물 제148호인 공주 중동 석조는 공주 대통사 터에서 보물 제149호인 반죽동 석조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석조는 원형으로 물통을 만들고, 중간에 간주석을 놓고 밑에 받침을 두었다. 연꽃을 담아 장식을 하던 용기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부여에도 보물로 지정 된 석조가 있다. 부여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194호인 부여 석조이다. 이 석조는 ‘공(工)’자 형태로 되어있는데,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즐겼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보물 제1523호인 경주 불국사 석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법주사 석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인 도갑사 석조,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인 보문사지 석조 등이 있다.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백제인들

 

부여국립박물관 경내에 전시가 되어있는 석조들은 그 모양이 그리 크지 않다. 원형이나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들도 있으나,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석조들이 눈에 띤다. 백제시대인 6~7세기경에 현 부여읍 일대에서 발견이 된 석조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석조를 만들어 사용한 백제인들은 뛰어난 석조물을 조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석조 중에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한 것들이 눈에 띤다. 아마도 당시 백제인들은 자연을 사랑했던 것이란 생각이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조형을 한 석조들. 부분이 깨어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그 안에서 백제인들의 자연사랑을 알아볼 수가 있다면 너무나 비약적인 생각일까?

 

부여국립박물관 야외에 전시가 되어있는 석조들을 보면서, 다양한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자연을 사랑한 백제인들. 그 작고 볼품이 없어진 많은 석조에서,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비록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오랜 시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석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모셔져 있다. 현재 이 전각을 세운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곳이 백제시대 절터의 강당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다.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림사라는 명칭도 고려시대의 절 이름이다.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명문을 통해 고려시대에 백제 때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석불좌상.

 

날씨가 차갑다. 지난 날 온 눈이 녹아 정림사지 안은 온통 질퍽하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어 걷기조차 힘들다. 전각의 계단 위에는 온통 진흙투성이다. 달라붙은 흙을 이곳으로 털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을 들여 정림사지를 정비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신발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흙이 달라붙지 않도록 마당정비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전각은 7칸으로 짓고, 중앙을 위시해 좌우로 문을 내었다. 대개 절의 대웅전 등은 가운데 문은 ‘어간문’이라고 하여 일반인들은 출입을 삼간다. 좌우 문을 통해 출입을 하는 것이 예의지만, 정림사지 전각은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 안도 온통 흙투성이이다. 날씨가 이러하니 괸람객들도 별 도리가 없겠지만.

 

전각 안에 모셔진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 올려다보는 순간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고려 때 조성이 된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거대석불의 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나 석불 등은 크기에서 어느 시대의 것보다는 거대불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가 보관은 머리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제작이 되어 얹혀 있다.

 

 

심하게 파괴가 된 석불좌상

 

이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가 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는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대좌 등의 솜씨로 보아 당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다시 만들었다고 하지만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형태는 왼팔을 가슴께로 끌어올렸으나, 오른팔은 어깨서부터 떨어져나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다만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를 통해 당시 이 석불좌상의 위엄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다. 이 대좌는 남원 만복사지 경내에 남아있는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된 대좌는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대좌의 아름다움으로 마모된 불상을 기억하다

 

대좌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각을 하였으며, 가운데 중대는 좁고, 상대와 하대가 넓은 ‘공(工)’자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대좌도 많이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석불좌상에 비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팔각 받침돌로 구성을 하고,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겨 넣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을 했다.

 

여러 단의 돌을 놓고, 그 안에 갖가지 조각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대좌. 그 대좌 하나만으로도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위상을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아마도 백제 때의 중심사찰이었던 이곳에 정림사를 세운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강성한 나라를 꿈꿔왔을 것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내 눈이 열리고 있기 때문인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경내 한편에 눈에 발목이 묻혀있는 석불 한기가 보인다. 날이 추워서인가 박물관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한 듯하다. 이런 추운 날 밖에서 저리 서 있다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다가 괜히 웃고 만다.

 

석불입상을 보고 웃은 이유는 그 모습이 균형미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 추운 날 만난 석불입상의 입가에 흘린 엷은 웃음 때문이다. 돌이다가 어떻게 저리도 따듯한 미소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웃음 하나가 세상 온갖 고통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하다.

 

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지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인근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이 거대석불 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석불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석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크다. 전체적인 모습은 굴곡이 없이 일직선의 신체로 표현을 하였다. 어깨와 하체가 일직선으로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살이 올라 풍부한 느낌을 준다. 반쯤 감은 눈과 입술 등의 윤곽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밋밋한 장식의 표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린 법의는 아무런 무늬가 없이 발밑까지 내려져 있다. 법의는 가슴께까지 깊게 파여져 있으며, 어깨부터 팔을 따라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표현한 주름이 이 석불입상에서 가장 표현을 강하게 한 부분이다. 두 손은 가슴께로 올렸으며, 그 아래ㅔ로 법의가 U자의 주름으로 발목까지 내려가고 있다.

 

 

손은 투박하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이유도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 때문으로 보인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트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손가락의 표현도 어디인가 멋스럽지 못하다.

 

충청도 일원에서 보이는 고려불의 특징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일원에서 발견이 된 고려불의 특징이다. 중앙의 장인들이 아닌,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된 석조여래입상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석불의 특징은 거대불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실내에 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래 기단부가 눈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봄철 눈이 녹으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받침돌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균형미는 떨어지는 석불입상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런 위로 덕분에 이 추운 날에도 길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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