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춘궁동 이성산 남쪽 고골저수지 옆으로,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한 고려 초기의 대규모 절터가 있다. 이곳을 동사지라고 하는데, 발굴 당시 명문에서 ‘동사(桐寺)’라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 금당지의 초석이 발굴이 되었는데, 이 초석의 넓이로 보아,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의 금당에 버금가는 크기였다는 것이다.

 

이 고려 때의 절인 동사는 10세기경에 새롭게 지어진 절로, 현재 동사지 안에는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인 춘궁동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2011년 첫 번째 답사일인 1월 3일에 눈길을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춘궁리 동사지. 그 한편에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삼층석탑

 

춘궁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동사지 안에 남동향으로 서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이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세웠다. 아래층 기단부의 밑 부분은 눈이 쌓여 있어 자세히는 볼 수가 없다. 상륜부는 사라져 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당당하다.

 

하층 기단은 조각이 나 있기는 하지만, 아래층 기단부에 눈 모양을 한 안상이 한 면에 3구씩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은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버팀기둥인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탑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만을 새겨 넣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다

 

 

 

이 탑을 보면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일 수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의 지붕인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이층 이상의 몸돌이 일층에 비해 급격히 낮아지고 있는 형태나, 지붕돌의 형태 등에서 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여기저기 상당한 부분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당함은 고려 초기의 석탑에서 보이는 국권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렇게 석재로 조성을 한 석탑 하나에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북벌을 하여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열망이 보인다.

 

 

경기도에서 보기 힘든 춘궁동 오층석탑

 

삼층석탑 옆에는 보물 제12호로 지정된 춘궁동 오층석탑이 서 있다. 남동향으로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높이가 7.5m에 이르는 탑으로, 경기도에서는 이렇게 큰 탑을 보기가 힘들다. 이 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는데,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다.

 

사각형의 석재를 여러 장을 이용해 조성한 춘궁동 오층석탑.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고, 일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탑신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탑의 형태는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오층석탑 역시 고려 초기에 조성을 하였으나,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층마다 석재를 사용한 것이 달라

 

이 오층석탑은 층마다 사용한 지붕돌의 석재의 숫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층은 1장, 사층은 2장, 3층 이하는 4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지붕돌을 조성하였다. 또한 일층 탑신의 하단은 4장의 방형 석재를 시용하였으며, 상단은 1장의 석재로 만들었는데, 이곳에도 모서리 기둥인 우주가 마련되어 있다.

 

춘궁동 오층석탑의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면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석만이 남아있다. 동사지에 남아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을 돌아보면, 이 동사지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이렇게 공을 들여 석탑을 조성한 이유도, 고려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동사지에서, 옛 고려의 강성하고자 했던 기운을 느낀다.

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전북 장수군 대곡면 주촌에는 의녀 논개의 성역으로 조성이 되어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논개의 동상과 조부모의 묘, 그리고 논개의 생가를 복원한 초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날치 차가운 12,, 눈발이 날리고 있는데 찾아간 논개 생가지. 2만 여 평의 땅에 논개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있고, 그 한편에 초가로 지은 논개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논개는 조선조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이곳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주촌마을에는 생가가 있었으나,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복원된 집터는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와, 이곳에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4칸 초가, 평범한 시골집

 

논개는 선조 26년인 1593년 6월 남편인 현감 최경희를 따라, 2차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논개 자신이 싸움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인 최경희를 따라 진주로 옮겨왔을 것이다. 남편 최경희는 중과부족으로 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을 했다.

 

논개는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스스로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장들의 승전연에 참석을 한다. 이 자리에서 논개는 왜장 ‘모곡촌육조’를 유인하여, 의암으로 함께 투신을 한 의녀이다. 논개의 복원된 생가는 4칸의 초가이다. 돌담을 두르고 사립문을 단 안으로, 넓은 마당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네 칸 초가가, 그리고 우측으로는 세 칸 광채가 자리한다.

 

 

의녀가 태어난 초가, 그 안에서 상념에 잠기다.

 

1986년까지 논개가 태어난 생가가 있었다고 했으니, 복원된 현재의 생가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되어있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에 한 칸의 부엌을 돌출하여 지었고, 남은 세 칸은 방으로 조성하였다. 들어지은 집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맨 끝 방은 앞에 한데 부엌을 들였다.

 

측면 두 칸인 초가는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봉화처럼 생긴 굴뚝이 눈길을 끈다. 안채를 돌아 광채를 둘러본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채의 구성이다. 아무래도 400년 세월이 지나다가 보니, 복원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지 않을까? 그저 논개의 집을 보겠다고 들린 관광객들의 왁자한 소음이, 신경을 거슬리는 것도 복원된 집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인가 보다.

 

 

잠시 돌아보던 발길을 쉬려고 툇마루에 앉아본다. 안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는 친절하게도 ‘안방’ 등 알림 패를 달아 놓았다. 안에 있는 기물들이야 옛 것일망정, 논개 살아생전의 것은 아닐 테니, 나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 당시의 분위기만 알고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많은 시인들이 논개를 칭송한 것도, 그만큼 당시의 여인들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구국의 행동 때문은 아니었을까?

 

논개여,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실 논개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서에서 기록을 하고 있지만, 정작 당시가 아닌 100여년이나 지난 뒤였다. 『호남절의록』『호남상강록』『호남읍지』『동감강목』『매천야록』등의 문헌에서 논개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다.

 

논개를 기억하다.

 

주촌에서 출생한 논개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난 ‘사갑술’의 사주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주를 타고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하는데, 여인이기에 나라를 위한 충절을 그렇게 행동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뒤편 장독대를 돌아본다.

 

 

장독대 앞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고, 그 물이 넘치면 작은 물길 옆으로 빨래터를 마련하였다. 물론 조형을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저 맑은 물에 세파에 찌든 속내를 빨아버리고 싶다. 오늘 비록 이 초가를 떠나지만, 논개를 기억해 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시(時)’라고는 담을 쌓은 문외한이니 무엇이라 칭송을 할 것인가? 다만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담아낸다.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이 마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인 탑동 삼층석탑이 마을 뒤편에 서 있다. 이 탑 뒤로는 건장산으로 오르는 산책길이 나 있고, 옆에는 최근에 지은 절인 듯 대웅전이 보인다. 이 탑동마을에 있는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에 소재한 국보인 탑과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탑동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상징인 삼층 석탑에서 연유가 된 명칭이다. 탑동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으로,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때 조성된 탑이다. 이 탑에는 전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탑동에 사는 여자장사와 장자골에 사는 남자장사가 서로 내기를 하여, 탑동마을 여자장사가 이기는 바람에 탑동 삼층석탑만 남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이 탑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난 후, 익산 금마지역에 미륵사지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절 서로 연모하던 총각장군과 처녀장군의 정이 두터웠으며,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탑골 삼층석탑을 쌓고 총각장군은 익산의 왕궁 탑을 쌓았는데, 처녀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그렇게 내기를 한 후 처녀장군이 보니, 총각장군의 탑을 쌓는 실력이 어설펐다는 것이다. 처녀장군은 총각장군에게 실망을 하여, 총각장군에게 인연을 끊겠다고 말을 했다. 총각장군과 결별을 한 처녀장군은 수절을 하며,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탑을 ‘여장군탑’이라고 불렀다.

 

 

미륵사지 탑이 무너진 것도 이유가 있었다.

 

전설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붙게 마련이다. 여자장사가 시합에 이긴 연후에 노모가 심한 피부병을 앓아, 전국을 다니면서 약을 구하려다 건장산 약수를 먹고 나았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효(孝)’를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장군과 여장군의 이야기는 그와는 사뭇 다르다.

 

여장군이 삼층석탑의 수호신이 된 후 남장군도 미륵사지 5층 석탑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이 두 탑이 서로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또 여장군이 이기자, 남장군탑은 부끄러움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설의 재미가 발견이 된다. 남장군은 미륵사지 오층석탑을 쌓았는데, 그 탑이 부끄러움에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이야기는 이렇게 꼬리를 물고 반전을 계속한다.

 

 

탑동마을의 탑은 경사가 있으면 탑신이 열린다.

 

탑동 삼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하여 탑을 쌓았다. 그런데 이 탑동 삼층석탑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일층의 탑신은 여러 조각을 합하여 몸체를 만들었는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 탑신이 열린다는 것이다. 가로로 길게 조성을 한 몸돌의 틈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8,15 광복절에 이 탑의 몸돌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또 이탑이 열릴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층석탑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바로 기단부의 받침돌 한편에 맷돌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기 이 삼층석탑의 기단석에 맷돌을 만든 것일까? 단층 기단에 삼층석탑, 그리고 상륜부 일부가 남아있는 탑동 삼층석탑. 그 기단부 초석에 새겨진 맷돌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곳에서 맷돌을 갈아 음식을 해먹으면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8,15 광복에 이곳에서 떡이라도 한 것일까? 많은 탑을 다니면서 이렇게 기단부에 맷돌처럼 조형을 한 것은 처음으로 본다.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아도 정확한 것을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래저래 탑동 삼층석탑은 사람에게 궁금증만 한 아름 안겨주었다.

지난 2011년에 51회 봉사에 30,000여 그릇, 2012년 12월 20일까지 64회 35,000 여 그릇. ‘사랑실은 스님짜장’의 주인공인 운천스님이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짜장’으로 봉사를 한 회수와 그동안 봉사를 한 짜장면과 짜장밥의 그릇수이다. 2년 동안 115회 봉사에 65,000 그릇 정도를 급식공덕을 했다.

 

운천스님의 짜장봉사는 날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처음에는 노인복지관과 군부대, 그리고 장애자들이 있는 복지재단 등에서 활종을 하더니, 이제는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남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불산누출 사고마을이나 섬까지 들어가 봉사를 한다.

 

 

봉사는 나의 운명이라는 짜장스님

 

운천스님의 짜장봉사는 천년고찰인 남원선원사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부터이다.

 

“선원사 주지 소임을 맡아 왔는데, 우연히 짜장면을 만들어 공양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군부대가 있어 장병들에게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짜장면’이라는 것입니다. 몇 날을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했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 속으로 들어가 실천을 하자고요.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 마음에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가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짜장면을 들고 가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사랑실은 스님짜장'을 시작했다. 지금은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보다, 오히려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운천스님의 행보가 요즈음은 종교의 벽을 뛰어 넘었다. 시류가 그렇게 변하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이미 종교의 벽은 하나도 가치가 없다고, 어떤 종교에서 필요로 하던지 망설이지 않고 달려간다.

 

 

처음 불교와 관련 된 곳을 찾아다니던 운천스님은, 이제는 스님짜장 한 그릇으로 갑갑하고 꽉 막혔던 종교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데 일조를 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경비가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그 또한 많은 부담이 된다고 한다. 더구나 장비를 싣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적은 차로 이동은 불가능하다.

 

“짜장 한 그릇에 원가를 따져보니 1,400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물론 자재 값만 그렇습니다. 인건비면 운송비 등을 합치면 원가는 더 들어가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저희를 필요로 한다면 달려가야죠. 지금은 그것이 제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껄껄 웃으면서 밀가루 반죽을 한다. 내일은 또 멀리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일 년이면 60회 정도를 봉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니, 함께 봉사를 하던 봉사단들이 모두 치쳐 있다는 것.

 

 

스님짜장의 특별함, 그 비밀

 

스님짜장이 사람들에게 왜 인기가 있을까? 물론 무료로 나누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매달 두 번씩 찾아가는 부산 구서 전철역의 무료급식소에는 800여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자리가 모자라 항상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 중에는 이런 곳에 와서 드시지 않아도 될 법한 어르신들도 눈에 띤다. 왜일까?

 

“스님짜장의 맛이 달라요. 우선은 정성이 가득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고기를 쓰지 않아요. 그리고 먹으면 먹을수록 담백함이 느껴져요. 무엇인가 이 짜장만이 갖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스님짜장을 급식하는 날이 되면, 일부러 이곳에 오신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이다. 도대체 스님짜장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짜장 봉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까지 걱정을 하는 운천스님이다.

 

“비밀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저 남들보다 더 좋은 재료를 준비하고 고기보다 비싸다는 콩고기와 콩 햄 등을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짜장을 볶아내고 면을 그 자리에 뽑아서 삶아내기 때문인 듯도 하고요”

 

그렇게 대답을 하는 운천스님이지만, 사실 스님짜장의 맛의 비밀은 딴 곳에 있었다. 짜장을 어쩔 수 없이 사용을 하고 있지만, 짜장을 볶을 때 사용하는 육수를 밴댕이 등의 어류와 멸치를 삶아서 만든다. 그리고 야채의 종류가 7~8가지나 들어간다. 이런 것들이 모여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다. 먹는 사람들의 건강을 최우선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돼지고기를 넣기도 합니다. 외진 곳이나 불산마을, 군부대 등에는 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것이 콩고기보다 더 쌉니다. 그래도 옛날 분들은 그런 것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고기를 넣어 드리기도 하죠.”

 

결국 스님짜장의 비밀은 정성과 재료가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우선 들어가는 야채 종류가 다양해 그것들이 어우러져 느끼한 맛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짜장면을 한 그릇씩 비운 분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것을 보는 짜장스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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