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인데도 장맛비처럼 비가 쏟아진다. 빗속에서 찾은 오죽헌, 입구에 서 있는 검은 대나무는 이 곳이 오죽헌임을 알려준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별당건축인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본래 1452년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이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이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집으로 대청과 온돌방, 그리고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 윗몸으로부터 쇠서를 내어 결구한 이익공 집이다.

 

쇠서의 밑면은 초각(草刻)되었고 그 끝은 수서로 되었으며, 도리방향으로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두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전면은 띠살 창호를 달았으나 측면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간살은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에 걸고, 이 위에 첨차로 된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다시 이 위에 첨차가 있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밑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조선 초기의 별당 또는 사랑채 건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죽헌은 원래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의 아들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3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경내에는 문성사, 사랑채, 어제각, 율곡기념관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시호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율곡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어제각이 있었으나 어제각을 북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였다.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 이이선생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 소장각이다. 1788년 정조임금의 명으로 건립되었다가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 때 철거되었으며, 다시 1987년에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했으며,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름은 이,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아명은 현룡이다.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의 나이에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어머니의 산소를 지켰으며 이때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율곡 선생은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며 살았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언봉사』 『성학집요』 『시무육조』 『격몽요결』 『자경문』 『율곡전서』 등이 있다.

 

큰 변란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해야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와 '기'라는 두 개의 축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퇴계 이황과 달리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유학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남학파는 남인으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맞섰다. 1548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

 

 

오죽헌 이곳저곳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하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관람을 하러 들어온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었다. 곳곳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정겹다. 비 오는 날의 오죽헌은 또 하나의 풍광을 보이고 있고, 나는 색다른 여행을 즐긴 셈이다.

 

자경전 굴뚝, 아미산 굴뚝은 아름다움의 정점

 

요즈음에 짓는 집들은 무엇인가 하나가 허전하다. 집을 아무리 줄러보아도 이가 빠진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요즈음 집의 구조상 예전과 같이 집 뒤 켠 처마에 맞닿아 있는 굴뚝이 없기 때문이다. 굴뚝은 아궁이나 화실(火室)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불연성(不燃性)의 연결체이다.

 

연소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고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온 연기나 가스 등을 하늘 높이 뿜어내게 만든 구조물로써 독입굴뚝과 벽붙이굴뚝이 있다. 구조재에 따라 분류하면 토관류굴뚝·벽돌굴뚝·철재굴뚝·철근콘크리트굴뚝 등이 있다. 굴뚝은 원형으로 하는 것이 공기학상으로도 바람직하고, 정사각형도 많이 쓰이며, 직사각형은 정사각형보다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므로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 굴뚝에는 다른 열기구가 접속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집은 대개 온돌을 사용한다. 하기에 적당한 산소 공급과 연소가 원활하게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기가 아궁이로 새어 나오기 때문에 굴뚝을 높게 만들어서 연기를 위로 올려 보내야 한다. 연기는 기체이며 기체의 성질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부는 원리와도 같은데, 태풍은 기압이 매우 낮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경복궁에 잇는 자경전 굴뚝은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물 81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해··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보물 811호인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었던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1394)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1867)에 재건되었다. 고종 13(1876)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1888)에 복구되었다.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가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2벌 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석(怪石)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2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 평면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闢邪像)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이 굴뚝은 우리나라의 축조물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참조)

원 화성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관심 없는 사람들은 신경 쓸 일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이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탑비이다. 비각을 보호한 보호각 곁에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기 어렵다.

 

진각국사탑비는 광교산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인 방화수류정 인근으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덮개석은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지 문화재재료 지정 탑비도 창성사에 있어야

 

수원 창성사지는 2017529일 경기도기념물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창성사를 발굴할 때 각존 석재며 와편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창성사지에는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한 때 이곳 창성사지 인근에 농작물을 재매하기도 하는 등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기도 했다.

 

이 창성사지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으로 옮겨져 제 자리를 벗어난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탑비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 탑비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제 자리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지대각국사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으로 옮겼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탑비를 창성사지로 옮겨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 이제는 탑비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고민해야 할 때란 생각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팔달문 동종. 현재 수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팔달문 동종은 원래 만의사의 범종이었다. 현재의 만의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만의사 동종은 고려 문종 34년인 10802, 개성에서 주조되어 수원 만의사에서 사용되다가, 숙종 13년인 16873월 만의사 주지승 도화가 다시 주조되었다.

 

만의사 동종은 정조 때 화성축성과 함께 파루용의 기능으로 전락하여, 화성행궁 사거리(종로)에 종각 설치 후 이전되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정오 및 화재경보용으로 팔달문 누상으로 다시 이전, 설치되었으며, ‘팔달문 동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673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수원시 영통구 창룡문길 443 수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평택 만의사는 비보사찰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무봉산(舞鳳山)의 이름은 만의산(萬義山)이다.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만의사가 산 동남쪽에 있었기에 그렇게 불린 듯하다. 13922, 21일 동안이나 계속된 대법회 때 권근이 쓴 '수원 만의사 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라고 한다. 나라의 복리와 비보를 기구하던 옛 절이다. 파괴되고 폐지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 연간 천태종의 진구사 주지인 혼기 대선사가 옛 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 의선공이 뒤를 이어 절을 주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만의사가 비보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봉산 만의사 사적비>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에 큰 역할을 한 신조대사의 중건과, 사명당의 제자 선화대사의 주석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팔달문 동종의 원 소유사찰이단 만의사를 보기위해 이곳을 찾아갔지만 옛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의사는 수원군 동북면 만의리에 있었다.

 

본래의 만의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다. 그 후 고려 충렬왕 10년인 1284년에 정길과 현묵이 중창하였고, 충선왕 4년인 1312년 당시 천태종 진구사 주지였던 혼기 대선사가 주지로 부임한 뒤 크게 중창하였다. 혼기대선사는 법화도량을 열어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선이 사세를 더욱 키웠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할 때 공이 컸던 신조가 주지로 온 뒤부터 다시 노비를 받았으며 사패지 70결도 함께 받았다고 한다. 서산대사 휴정이 이 절에서 수도를 했으며, 사명대사 유정의 제자 선화도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조 인조 22년인 1644년에 입적하였다.

 

조선조 현종 10년인 1669년 당시 수원군 동북면 만의리(현재 동탄면 신리)에 있던 만의사가 우암 송시열의 장지로 선택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기며 이름을 만의사(萬義寺)’로 바꾸었다. 정조 20년인 1796년 수원화성을 쌓을 때 이 절의 동종을 가져다가 수원화성 안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 달았다.

이 기사는 2010년도에 발행했던 글입니다.
문화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가끔 옛 기사들을 하나씩 재송고 하려고 합니다. 이점 유념해 주시고 오해 없으시기 비립니다. 

 

사람들은 절이 있는 곳은 잘 찾아가지만 사지를 찾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런 사지를 찾아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소중한 문화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철안마을. 청룡사지 입구에 도착하면 주차장이 있고, 우측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청룡사가 있다. 이곳이 예전 청룡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인가는 확실치가 않다. 청룡사는 고려 말 청계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던 것을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국사인 보각국사가 은거하였으므로, 태조가 큰 사찰을 세우도록 했다고 한다.

 


사찰은 간곳없고 문화재만 나란히

주차장에서 앞으로 난 개울가를 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화재들이 있는 청룡사지를 만나게 된다. 당시의 웅장했다고 전하는 청룡사는 사라지고 이곳에는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보물 제656호인 석등, 그리고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 등이 남아 있다.

석등과 사리탑, 그리고 탑비가 나란히 서 있는 청룡사지. 국보 제197호인 청룡사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이다. 보각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고 하였다. 이 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청룡사지에 자리한 보물 제656호 사자석등과 보물 제658호 정혜원융탑비

 

흔히 장명등이라고 하는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보물 제656호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이란 긴 명칭을 갖고 있는 이 석등은 사리탑에 있는 보각국사의 사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조성이 된 듯하다. 석등은 조선시대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정사각형으로, 아랫부분에 한 마리 사자가 힘찬 모습으로 조성이 되어있어 사자석등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는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고려 우왕 9년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기린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융탑 뒤편에 자리한 이 탑비는 윗부분의 장식물인 지붕돌인 개석이 없는 대신에,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보 융탑의 조각 솜씨를 보고 숨이 멎다.

 

국보 제197호 청룡사지보각국사정혜원융탑. 크지 않은 그 탑을 보고 숨이 막힌다. 아래 기단을 부풀려 놓고 그 위에 몸돌을 올려놓았다.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용머리와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이 융탑의 몸돌은 항아리처럼 부풀려 있는데, 팔각의 몸돌을 이용해 많은 조각들을 해 놓았다. 모서리에는 기둥을 놓고 그 기둥마다 용이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사천왕을 새겨 넣어 이 탑이 특이함을 보인다. 사천왕의 모습은 힘이 있고,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다. 조선 초기 석조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도 이러한 조각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 융탑은 몸돌 뒤편에 사리공이 있어 이곳에 사리 및 옥촛대, 금망아지, 금관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 때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문화재들을 수탈을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언제나 온전하게 이 땅에서 지켜질 수가 있으려는지. 절로 한 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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