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년 일 년 동안 참 무던히도 수원의 곳곳을 누볐습니다. 때로는 새벽 6시에 쓰레기 소각장을 뒤지기도 했고, 때로는 불볕더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화성을 따라 걷기도 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장맛비가 쏟아지는 성 밑 길을 돌면서, 카메라가 젖을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인가를 수원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그것을 수원시의 홍보지인 ‘e-수원뉴스’에 기사를 올렸습니다. 아마도 지난 한 해의 몇 달 동안 그렇게 열심히 취재를 한 적은 흔치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한 달이면 20건이 넘는 기사를 쓰면서 수원시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벽화골목을 돌면서 그 숱한 사연을 블로그와 e수원뉴스 등에 글로 남겼습니다.

 

 

파워소셜러 팸투어가 근간

 

그러다가 2012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통영으로 시민기자 팸투어를 다녀왔습니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의 자격으로 다녀 온 팸투어로 인해, 11월에는 8도의 파워소셜러 팸투어를 수원에서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 팸투어에는 내로라하는 블로거들이 함께 참여하여, 수원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그런 열심을 보아서인가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에서 12월 초에 연락이 왔습니다. 수원시 시민기자로 뽑혀 12월 31일 종무식에 수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나보다 기사를 잘 쓰고 일 년 동안 더 열심히 한 시민기자들이 많은데, 왜 그 상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으라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상금이 있거니 없거나를 떠나서, 지금 내가 생활을 하고 있는 곳에서 그만큼 입지를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월 31일 오후 3시에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좀무식에는 수원시의 각계각층의 수상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단 2명에게 주어지는 시민기자상

 

수원시에는 현재 180명 정도의 시민기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출동 시민기자’와 ‘사는 이야기’에 진솔한 이야기들을 올립니다. 저야 물론 늘 쓰는 것이 현장을 다니기 때문에 ‘출동 시민기자’에 글이 올려집니다. 때로는 e수원뉴스 편집주간의 부탁으로 현장을 나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런 점이 가산점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각 분야별로 나가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그 틈에 끼어 상을 받는다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0명의 시민기자 중에 단 두 명 만이 받는 상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린 옛날 상을 받고난 뒤에, 잊고 있었던 까마득한 생각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고요.

 

호명을 받고나서 무대로 올라섰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줍니다. 머쓱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상을 받고나서 제 자리로 돌아와 상장을 봅니다.

 

표창장 제2129호

수원시팔달구 지동

시민기자 하주성

 

귀하께서는 수원시 시민기자로써 인터넷신문을 통한 활발한 시정참여와 홍보활동 등 시민과의 소통과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 노력함으로써 『사람이 반가운 휴먼시티 수원』 만들기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2012년 12월 31일 수원시장 염태영

 

 

이제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지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수원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블로그와 오마이뉴스, e수원뉴스 등에 꾸준히 기사를 썼기에 이런 상을 수상했나 봅니다. 그저 혼자 지나쳐버려도 될 일이지만, 그동안 여러모로 함께 해 준 이웃 블로거님들(파워소셜러) 덕분에 이런 상을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소식을 전합니다.

 

2013년 한 해 모든 이웃님들의 생활에 날마다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빕니다. 그리고 팸투어에 달려와 주신 이웃님들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2013년 설을 맞이 하기 전, 또 다시 만나뵐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다시 길 위에 선다

다행이다 햇살들은 천지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리하여 ‘헛제삿밥’으로 산 자들 제사 지내고

돌아오기 위해 이 길을 간다.

 

어디더라? 여기가

만난 듯한 구름, 저 산꼭대기의 잘생긴 소나무

바람과 함께 산중에 들어

있는 듯 있는 듯 내 돌아갈 근원을 본다.

 

가쁜 호흡 뒤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들이 숨어 있지만

어쩔거나! 이 또렷한 경계(境界)들을

무량수전, 안양루 오르는 계단 가운데 앉아

나 아직 적멸을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오늘은 무애(無碍)

스스로의 빛남

막을 길 없다

 

 

김우영 시인의 ‘부석사 가는 길’이란 시이다. 12월 28일 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소재한 ‘장호원 숯불갈비’라는 식당 안 한편 방안에서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벽에는 ‘제2회 <수원시인상> 시상식 / 수상자 김우영 시인’이란 글귀가 보인다. 이날 모임은 수원시인협회 회원 25명 정도가 모여 송년회 겸으로 마련한 시상식 자리였다.

 

시상식이라고 찾아 간 자리가 식당

 

이날 수상을 한 김우영 시인은 벌써 안지가 20년이 훌쩍 지났다. 한참 동안이나 보지 못하다가 수원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후 조우를 했다. 그리고는 곧잘 함께 어울려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는 한다. 그러다가 시상식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바로 식당이었다. 시인들이라 그런가? 역시 시상식장도 좀 특이하다.

 

 

송년회를 겸했다고 하는데, 식당을 빌려 시상식을 한다는 것은 꽤나 생소하다. 사실 김우영 시인은 고등학생 때 시집을 낼 정도로, ‘시의 신동’이란 칭찬을 들었던 시인이다. 1957년 화성시 봉담 출생으로, 1978년에 원간문학 신인상 시 부분 당선으로 등단을 했다. 그리고는 지역 언론에서 문화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수원사랑의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중부일보의 문화체육부장을 거쳐 늘푸른 수원의 편집주간, 그리고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경기시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수원시 인터넷 홍보지인 ‘e-수원 뉴스’의 편집주간이다. 그동안 수원문학상, 경기문학상, 오늘의 경기시인상, 한하운문학상, 수원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시종일관 잔치집 같은 시상식

 

이 날 시상식은 수원시인협회 임애월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이 되었다. 먼저 임병호 회장의 선정경위 발표 및 인사에 이어, 세종대 석좌교수인 정순영 시인의 축사, 그리고 수상자인 김우영 시인의 약력보고와 시인상 시상식으로 이어졌다.

 

수원시인협회 임병호 회장은 선정경위를 통해 “김우영 시인은 한국문단에서는 물론 수원문학을 위해서도 큰 일을 했다. 김우영 시인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영이 높았지만 잘 나서지를 않는 과묵한 사람이다. 약관에 전국 동인지인 ‘시림(詩林)을 주재한 사실에서도 잘 입증된다. 김우영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했다.

 

시상식을 마친 후 김우영 시인은 수상소감을 “부끄럽다. 창작활동에 소홀한 요즘이라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더는 게으르지 말라고 주는 상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앞으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시상식 후에는 시인들의 시낭송까지 곁들여졌다. 식당에서 열리는 시상식도 놀랍지만, 술 한 잔에 취흥에 겨워 시낭송까지 이어지는 시인들의 시상식. 그동안 숱한 시상식을 다녔지만, 이런 시상식은 또 처음이다. 아마도 앞으로 이런 시상식을 볼 기회는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시 한 줄 못 쓰는 위인인지라 그런 자리가 조금은 버겁기 때문이다.

동휘스님의 해피만다라 이야기

 

만다라의 그림을 보면 무엇인가 그 안에 심오한 깨달음이 있는 듯 보인다. 만다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둥근 원을 의미한다. 이 만다라는 진리와 우주를 형상화한 그림을 의미한다. 만다라는 현재 불교미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원 등의 벽에 장식하여 장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만다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나무갤러리에서 1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12월 27일에 찾아간 나무갤러리 전시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휘스님의 ‘부처님이 주신 선물, 불꽃. 옴 해피만다라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명상 뒤에 오는 공허함으로 시작

 

티베트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색을 물들인 모래로 그린다. 정교하게 모래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만다라를 그릴 때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참여를 하여, 3박 4일 이상이 걸려 그려낸다고 한다. 만다라는 예술적 감각과 모래로 그리는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마치 명상과 같은 수행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참여하여 만다라를 그리고 있으며, 그 모래그림을 그리는 동안 명상과 함께 심오한 부처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고도 한다. 초기 불교당시의 만다라는 주로 탑에 조각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기본적으로 법당에 만다라를 그려 수행자들에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뒤늦게 출가한 동휘스님의 만다라

 

이번에 비구니인 동휘스님이 마련한 ‘행복한 대한민국, 옴 해피만다라 전시회’에는 동휘스님과 티벳,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만다라 50여점이 소개되었다. 만다라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우주의 진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로, 동휘스님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만다라 전문화가이다.

 

 

동휘스님은 38세의 나이로 뒤늦게 출가를 했다. 부친이 화가였던 집안 내력 때문인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동휘스님은, 1998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뒤늦게 출가한 후, 출가하기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만다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휘스님은 직접 만다라를 그릴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다라를 모아 강원도 홍천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하는 불사를 펼치고 있기도 하다.

 

'만다라 성지'는 2008년 가톨릭 수도원이 내놓은 땅 1만여 평에 조성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네팔의 스완부와 버드낫은 황량한 땅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해, 국제적 명소로 만들었다. 홍천에 들어설 만다라 성지에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수집하고 기증받은 2천여 점의 만다라를 전시한다는 것.

 

전 세계의 만다라를 만나보다

 

티베트의 만다라가 색조가 어둡다면 동휘스님의 만다라는 맑게 표현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그 만다다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고 밝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전시가 되어있는 만다라는 여러 가지 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가 없다.

 

하지만 굳이 만다라를 통해 심오한 부처의 경지에 달하는 깨달음을 얻지 많아도 좋을 듯하다. 그 만다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을 한창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즉 ‘마음이 원하는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동휘스님의 만나라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414 - 4에 소재한 이주국 장군 고택. 집안을 돌아보면 안채에 붙은 부엌과 광을 손본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민속자료를 넘을 그런 집이다. 꾸밈도 그렇고 집안의 조경 수법이나 채의 구성, 공간의 사용 등이 매우 뛰어난 집이다. 더욱 사랑채 하나만 놓고 본다면, 얼마나 고쳤는지는 몰라도 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주국 장군 고택

 

이주국 장군은 조선 영조와 정조 때의 무신이다. 이주국(1721∼1798) 장군은 조선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다. 조선조 경종 1년인 1721년에 원삼면 문촌리 현재의 고택에서 태어났다. 원삼면 문촌리에 전하는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 생가, 정자 터 등이 전한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군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정병하씨 소유의 가옥이다.

 

 

고택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자로 길게 늘어섰다. 대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바로 꺾인 담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다. 이런 집의 형태를 볼 때 과거에는 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안담이 있고, 중문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안채는 좌측으로 퇴를 달아낸 건넌방과 세 칸의 대청, 안방 그리고 꺾인 날개채에 부엌과 광을 두었다. 현재는 날개채를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부엌은 부엌방으로 개조를 하고, 맨 끝에 광도 방으로 개조를 하였다. 이주국 장군의 생가는 안채의 망와(望瓦)에서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乾隆十八年癸酉日 造作)'이란 글씨가 발견이 되어 영조 29년인 1753년에 최초로 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다락방이 정말 좋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사랑채는 - 자형 네 칸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앞에서 바라보면서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청방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은 방과 마루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좌측의 맨 끝은 다락방과 부엌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방문은 모두가 이중의 겹문으로 되어있다. 안쪽의 문은 모두 범살창으로 구성이 되어 단조롭다.

 

사랑채는 청방을 전체적으로 놓고, 가운데 두 칸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툇마루가 끝나는 곳에 한 칸의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으로 올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툇마루에 접한 부분은 간단한 문이지만, 양편의 창문은 모두 띠살문 네 짝으로 달았다. 이렇게 띠살문을 달아 열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 다락방을 사랑채의 주인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양편으로 열어젖힐 수 있는 문. 이 다락방이 누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정말 작지만 아름다운 누정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만한 공간이다.

 

사랑채의 다락방 밑으로는 개방된 아궁이가 있고, 그 위는 다락이다. 그런데 이 아궁이 역시 특이하다. 한편 다락방의 밑이 광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짜임새 있게 제 각각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네 칸으로 꾸며진 사랑채. 앞쪽 끝의 다락방은 양편을 띠살문으로 했다. 정자의 기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주국 장군 고택의 모든 문은 겹문으로 되어 있다. 안쪽의 문은 범살창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아궁이 다락방 뒤에 다락을 두고, 그 밑을 개방된 아궁이를 조성했다. 다락방 밑은 광이다.

 

날개 잃은 공(工)자 형의 안채

 

안채는 ㄱ 자형의 집이다. 전체적으로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세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안방과 꺾인 부분에 두 칸의 부엌과 광을 들였다. 현재는 부엌과 광은 개조를 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의 특이함은 바로 이 안채의 구성에 있다. 건넌방의 앞으로는 반 칸의 퇴를 냈다. 높은 마루를 깔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 문 위에 편액이 걸려있어 다가가 보니 '사당방(祠堂房)'이란 글을 적었다. 안채 안방의 뒤편에 한 칸을 달아내어 사당으로 꾸민 것이다. 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묵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주국 장군의 후손들이 떠나고, 현재의 주인이 이 사당도 묵는 방으로 사용한 듯하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공(工)'자의 한 날개가 잘린 형태로 볼 수 있다.

 

이주국 장군의 고택은 기단이 모두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마감을 했다. 건물의 주춧돌도 마름모형의 다듬은 돌이다. 이런 기단이나 주추로 보아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지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집에 거주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문채와 사랑채는 손을 보았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높게 한 중문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반칸을 달아내어 높은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드렸다.

 
안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한칸을 달아낸 방이 있다. 방문 위에는 사당방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세칸의 넓은 대청. 기단이나 툇돌, 주춧돌 등이 모두 잘 다듬어진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메주가 익어가는 집

 

이주국 장군의 고택을 돌다가 안채의 건넌방 옆으로 돌아가니, 벽 앞에 메주를 만들어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만난 할머니에게 '집을 좀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청소를 잘 안 해. 시골집은 다 그렇지 머'라고 하셨는데, 이런 메주를 보니 정말 시골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무에 걸린 메주들을 보면서, 고택과 딱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정감이 가는 집들이 우리 가옥인데, 우리는 점차 생활의 불편함만 늘어놓으면서 멀리 한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너무나 시골스러운 모습이다. 건넌방 옆에 메주를 달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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