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전설을 가진 미륵과 암구멍

 

마을에 들어가 이야기를 찾다가 보면, 어떤 때는 참 황당할 때가 있다.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한 마을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 위치한 백도해수욕장. 이 곳은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다. 백도라는 섬은 마을 앞 멀지 않은 동해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바위가 하얀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도가 이렇게 흰 빛을 띠는 이유는 수많은 새들이 그 섬에 배설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 백도해수욕장은 민박집들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 이용하기가 수월하며, 백사장의 길이가 400m 정도에 폭이 50m 가까이 되기 때문에, 바다와 모래밭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미륵이야? 아님 문인석이야?

 

백도해수욕장에서 해안가 도로를 따라 동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철문이 있다. 그 안은 군부대이기 때문에 일몰시간이 되면 이 철문을 닫아버린다. 그 철문을 들어서면 동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두 기의 석물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석물을 미륵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석물은 어디로 보아도 묘 앞에 세우는 문인석의 모습이다.

 

이 두 기의 석물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다. 이 두 기의 석물을 문암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아 , 마을에서 위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를 보고 있는 석물은 아주 오랜 옛날 신라의 영토인 백도에 고구려가 침범을 해, 전투를 하다가 전사를 한 신라의 장군이 한을 품고 죽은 자리에서 바위가 솟았는데 그 바위가 솟은 곳을 미륵동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과 연결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미륵불로 모시고 있는 문인석이다. 예전에 삼척부사의 부친이 사망하여, 묘를 쓰고 앞에 석물을 세우려고 하였단다. 그런데 집 앞을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이 고성 문암마을을 찾아가 문인석을 만들면, 가문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삼척부사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문암마을로 찾아가, 문인석 2기를 만들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문인석을 다 만든 후에 배에 실어 부친의 묘가 있는 삼척으로 옮기려고만 하면,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몰아쳐 도저히 갖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삼척부사는 이 문인석을 부친의 묘로 옮기지 못하고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그 문인석은 문암리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기의 문인석 미륵동의 바위로 만들었을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가 자연히 연결이 된다. 즉 삼척부사의 부탁으로 만든 두 기의 문인석은 바로 신라의 장수가 억울하게 죽은 곳에서 솟아난 미륵동의 바위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지 못해, 옮기려고만 하면 바람을 일으키고 풍랑이 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문암리를 지키는 두 기의 문인석을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을 들어보면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은 묘하게 연결이 되어 정리가 된다.

 

이 두 기의 미륵인 문인석이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지고 말았단다. 마을에서는 6,25 한국동란 후에 다방면으로 고생을 하다가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파도에 의해 바닷가 모래밭에서 찾아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미륵불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제 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수탈을 당했기 때문에, 문암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 미륵불이 스스로 몸을 감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구멍들은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22일에 찾아간 문암리. 미륵불 앞에는 누가 치성이라도 드린 듯, 북어와 떡이 보인다. 치성을 마치고 이곳에 두고 간듯하다. 문암리 두 기의 미륵물이 서 있는 옆, 바닷가에 서 있는 바위들도 묘하게 미륵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문암리라는 이곳은 온통 미륵불 투성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륵동이라고 했던 것일까?

 

그곳을 지나쳐 양편에 바위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백도항 쪽으로 나가면 등대가 보인다. 그 좌측 바위를 보면,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싶다. 온통 크고 작은 구멍들로 바위가 요란스럽다. 어찌 저렇게 생긴 것일까? 그런데 이 문암리에는 암서낭에 남근을 깎아 바치는 제의가 정월 초사흘에 있다고 했다.

 

 

남근을 닮은 미륵과 암구멍이라는 무수한 바위들. 참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음양학으로 생각해도 문암리라는 곳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이곳의 이름이 만호가 살 터전이라고 해서 만호리라고 했다던가? 언제 시간이 나면 정초에 치러진다는 문암리 서낭제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 발길을 돌리면서도, 그 희한한 바위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팔달산 중턱에는 성신사(城神祠)’라는 사당이 있다. 바로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일제 강점기에 훼파가 되었던 것인데,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고유제를 지내 온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화성 행궁 뒤편 좌측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서 명문이 적힌 기와편 등을 발견하였다.

 

그런 후에 매년 정월에 날을 정해 이곳 성신사 터에서, 성신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성신사의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지냈으나, 200910월에 성신사가 조금 자리를 옮겨 복원을 마치자 그곳에서 정월에 날을 잡아 고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정조의 지시에 의해 지은 사당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연구회 노력으로 복원 된 성신사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216일 오후 2시에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수원화성 성신사 고유제는 이낙천 이사장, 김이환 명예이사장(이영미술관장)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을 하였다. 제순은 성신의 위폐를 여는 것으로 시작을 해, 행강신례 행참신례, 행전신례에 이여 초헌관이 첫 잔을 성신에게 올리는 행초헌례의 순으로 이어졌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 이게 아쉽다

 

30분 정도에 걸쳐 끝이 난 성신사 고유제. 고유제의 끝은 행망예레라고 하여서 축문을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는 예를 모두 마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고유제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든다. 사당은 어디나 예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다. 그러나 성신사에는 어디에도 축문을 사를 수 있는 예감이 보이지 않았다. 정당 좌측 뒤편에라도 예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정당 안 위패 앞에 향로 하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사당 안에는 기본적으로 향로가 있기 마련이다. 성신사는 화성의 신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따지면 수원을 지키는 신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앞에 방명록이나 향을 사를 수 있는 변변한 향로 하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곳을 들리는 관광객들이 향을 피우고 예를 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옆에는 방명록 등을 비치해 들려간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촛불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켤 수 없다고 해도, 향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화성에 대소 공사를 시작하거니 끝이 날 때는 이곳 성신사에 가서 참례라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담당부서에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하기 바란다.

그 집

뒤뜰에는 상사화가 피곤했지.

여인네 입가

감추어진 미소처럼

늘어섰던 찔레나무들 사이에서.

 

그 날

달빛은 죽음과 흡사했지

덧문을 열고 내다보던 그의 얼굴위로

하얗게 드리워지던 달빛

장독대 뚜껑 위에 몰래 올라앉은 거미줄조차

필사적으로 헐떡였지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무덤 위

나비만 가끔 기웃거리는

그 집

 

 

최자영시인(, 51. 정자동 거주)의 시 나비의 흔적이다. 214일 수원시청 옆 작은 커피숍에서 만난 최자영시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동안이다. 그리고 아직도 호기심 많은 소녀와 같은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써 온 일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늘 일기를 써 왔죠. 젊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20대에는 시를 써 노트 한 권을 꽉 채웠는데 그것을 잃었어요. 그 노트가 있었다면 꽤 많은 시를 갖고 있을 텐데요

 

최자영시인은 지금도 갖고 있는 시로, 한 권에 70편 정도의 시가 필요하다면 두 권 정도의 시집을 낼 수 있다고 한다. 2004년에 한국문인회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을 했으니, 올 해로 10년이 되었다. 시의 소재를 어떻게 찾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보고 느끼는 것이 소재가 된다고 한다.

 

저는 남의 손을 보기를 참 좋아해요.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의 손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거든요. 보고 느끼는 것, 사물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오는 느낌,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그림자 등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순간의 어떤 영감에 의해서 글을 쓰게 되죠.”

 

나를 위해 시를 쓰지만 독자의 느낌은 달라

 

최자영시인은 본인을 위해서 시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독자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전혀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오히려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시를 썼는데, 그 시를 읽는 독자는 슬프다고 할 때도 있죠. 아마 시라는 것의 양면성일 수도 있는 듯해요. 그렇게 독자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때면,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나의 내적 사고를 갖고 시를 쓰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 같아요. 사람마다 느낌은 다른 것이니까요

 

밖은 안개가 그득하다.

안개 주의보가 부슬부슬 내린다.

 

안개를 조심할 것

안개를 뛰어 넘어 다닐 것

절대로 헤매지 말 것

헤매다가 멈추지 말고

멈추어서 서성거리지 말 것

서성이다가 부딪혀도 아는 척 말 것

혹시라도 그저 지나치기

눈물겹게 쓸쓸해도

그리워하지 말 것

 

안개 주의보.

 

안개 속에서라는 최자영시인의 시이다. 조금은 슬픈 듯한 느낌이다. 그저 안개를 보고 지은 시 하나가 괜히 사람을 시큰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제 시가 조금은 슬프다고 해요. 아마 제가 안고 있는 슬픔 때문인가 봐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어느 분이 찾아왔는데, 제 시를 읽고 고마워서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요. 제 시를 읽으면서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복받쳤는데, 나중에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수그러들었데요. 그래서 고맙다고요. 시도 슬픔을 치유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죠.”

 

자신은 슬픔을 표현했는데, 어느 독자는 그 시에서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함부로 쓸 수는 없다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해

 

현재 최자영시인은 수원시인협회 사무국장의 소임을 맡아보고 있다. 그동안 그런 직책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시만 썼지 그런 소임을 맡아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소임을 맡고 보니까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제 나름대로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낯 선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거든요.”

 

대화를 하면서도 연신 질문을 한다.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보면 주객이 전도가 된 느낌이다. 그런 것을 재미있어 하는 최자영시인. 심성이 맑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좋은 시를 많이 써 달라고 부탁을 한다. 올 해는 시집 한 권을 내고 싶다는 최자영시인. 남들에게 많이 읽히는 시집이기를 바란다는 말에 기대를 한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마애불을 찾기 위해 삼방리를 찾았다. 삼층석탑과는 달리 같은 삼방리인데도 그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중간에 마땅한 안내판이 서 있지를 않으면, 문화재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삼방리 마애불을 찾을 때도 몇 번이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다녔다.

 

마을에서 안내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 시골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없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어물어 찾아간 삼방리 마애불. 밑에다가 차를 대고 올라가라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길이 보이기에 그냥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다. 올라가니 길도 없고, 차를 돌릴 만한 곳도 없다. 산길이라 눈은 쌓였는데 후진으로 내려오려니, 가슴이 다 서늘하다. 자칫 조금만 실수만 있어도 계곡으로 처박을 판이니. 

 

바위에 새간 마애여래좌상   

  

엷은 부조로 조각한 마야여래좌상.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엷은 부조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선각수준이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3.7m, 폭 4.1m, 두께 2.4m 정도의 바위의 한쪽 면에 새긴, 높이 3.5m의 마애여래불이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이 마애불은, 앞에 선 안내판이 없다면 주의 깊게 보아야만 한다. 그냥 지나치면서 이 마애불을 보면 거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깊은 산속에 이런 마애불을 새겼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마애불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왜 옛 선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 이렇게 산중에 있는 바위만 보면, 마애불을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길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깊은 산중 암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면서 늘 갖는 의문이다.

 

고려시대에 조각을 한 수많은 마애불들을 보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부처를 새길 만한 바위만 보이면 어김없이 새겨진 마애불들. 이렇게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무엇을 기원했던 것일까? 아마 고구려의 후손들이기에 잃어버린 북녘 땅을 되찾으려는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삼방리마애불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충북지역의 마애불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 마애불들은 모두가 거대마애불로 조성이 되어있으며, 비교적 간결한 선각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놓은 독특한 수인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는 사각형이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몇 가닥으로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의 선과, 도식적인 꽃잎의 형태에서는 조각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마애불들의 대체적인 모습들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단아한 체구와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는 어딘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의 마애불치고는 수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얼굴부분은 대체로 양각이라기보다는 선각에 가깝다. 앞에서 보기에는 선각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조금 도드라지게 조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에는 군의대의 매듭이 보인다.

 

전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 비바람에 씻긴다면, 이런 형태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다. 마애불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덕분에 얼음판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으니 고맙습니다.'라고. 

몇 번인가 찾아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양평의 보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보산정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이,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고려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 무안 박씨의 선조인 간의내부 송림공이 이곳으로 낙향을 하여, 시회장(詩會場)으로 보산정을 지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옛 정취를 잃은 정자

 

보산정은 양평군 단월면 보통리 산33 부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대성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입향조가 14세기 후반에 터를 잡아, 대대(大垈) 즉 '한터'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무안박씨가 25대 이상을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정자는 송림공이 정자를 지은 후, 송림공의 6대 손인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원겸의 수학당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그 뒤에 저명한 유림의 학자들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장으로 활용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 건물은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절경에 자리한 역사가 있는 소중한 정자를, 시멘트로 복원하여 아름답고 고풍스런 옛 정취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보산정이 서 있는 한터는 무안 박씨들이 25대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눈길이 아름다운 보산정

 

보산정이 있는 한터는 역사가 깊은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월면의 면소재지인 이곳은 둘레 6 ~ 8m 는 됨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보산정은 면소재지로 들어가는 길 우측 편 동산에, 부안천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주변으로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다. 입구는 돌담에 일각문을 세워놓았다. 양편으로는 노송이 우거지고, 눈이 쌓인 길을 걸어 올라간다. 돌계단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를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미끄럽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낭패를 당할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을 보니 밑으로는 무안천이 흐르고, 경사진 비탈에 노송이 가지를 뻗고 있다. 여기저기 잔 소나무의 가지들이 부러져 있다. 아마 지난 번 내린 눈으로 인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졌는가 보다.

 

정자 위로 오르니 현판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최근에 새로 쓴 현판들이다. 현판에 쓰인 날짜를 보니, 2006년에 써 붙인 것이다. 아마 그 해에 이곳에서 시회라도 열렸는가 보다.

 

보산정으로 오르는 일각문. 보산정은 무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눈이 쌓여있는 보산정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이 현판에도 용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려의 끝남을 서러워하는 시가 마음을 아프게 해

 

그 현판의 글 중에 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고려 500년 사직을 이별하고, 이곳으로 내려 온 송림공의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500년 도읍터에 날은 저무는데

우러러보던 까마귀는 뉘 집에 머물런가.

임 떠난 외로운 신하는 편한 곳에서

서산 저편 올라 큰소리 외쳐 보고 싶구나.

 

아마 송도를 떠난 송림공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도 늘 임금이 계셨던 송도를 바라보고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60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나그네의 눈에 들어오는 주변은 그 풍광이 그대로 남아있건만, 임을 그리던 마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산정의 안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새롭게 조성한 현판들이다.

보산정의 천정에 단청으로 그려놓은 용.

 

정자의 현판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정자의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있다. 아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이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25대 이상을 살아오는 무안박씨의 문중에서, 입향조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보산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무안천에 내려앉은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찬바람을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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