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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2대 정조대왕이 1795년 윤2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인 정조대왕 능행반차도(陵幸班次圖)’. 이 능행반차도는 조선조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가 중심이 되어 그린 것이다.

 

이 능행반차도를 보면 행렬이 장엄하면서도 축제분위기 같이, 반차도에 그려진 인물들의 행색과 거동이 경쾌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반차도에는 모두 1779명의 인물과 779마리의 마필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시흥환어행렬도를 보면 그보다 더 많은 인원이 능행길에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능행반차도 중 정조대왕의 가마 앞 쪽에 두 무리의 고취대가 있다

 

어가의 뒤를 따르는 기마고취대 장엄하다

 

능행반차도는 경기감사가 앞을 서고 그 뒤에 총리대신의 행마가 그려져 있다. 그 뒤편에는 말에 올라탄 고취대가 18명이 따르고, 뒤편으로는 훈련대장이 말을 타고 있다. 훈련대장의 뒤로는 중군(中軍)이 따르며 그 뒤편으로 다시 북과 장고, 해금, 피리, 징 등을 불고 치며 8명의 고취대가 따른다.

 

조금 뒤편으로는 금군별장이 말을 타고 있으며, 조금 뒤편으로는 얼굴을 가린 내인들이 말을 타고 따른다. 그 뒤편으로는 또 다른 정리사 행렬이 따른다. 그 뒤편으로 양편을 기를 든 군사들이 따르고, 정조대왕의 가마가 보인다. 가마 뒤로는 왕을 상징하는 용기가 따르고 있고, 그 용기 뒤편에는 고취악대의 본진이 뒤따른다.

 

 가마 뒤를 따르는 51명의 고취대의 모습. 장엄하다.

 

정조대왕의 가마 뒤편으로는 51명의 고취악대는 맨 앞에 4명의 나각수, 8명의 나팔수, 4명의 고수와 2명의 운라, 4명의 자바라와 두 줄로 늘어선 8명의 태평소, 그리고 3명의 해금과 3명의 저(대금)이 열을 지어 행렬을 한다. 그 뒤로는 6명의 피리와 3명의 장고, 3명의 북, 맨 뒤에는 징수를 포함한 3명이 뒤따른다.

 

그 뒤편에도 두 곳에 기마고취대가 행렬 안에 끼어 있어, 전체적으로 능행반차도에는 다섯 무리의 고취악대가 편성되어 있다.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고취악대는 모두 91명이나 편성이 되어있으며, 이들은 모두 말에 올라타고 있다.

 

 조리를 하는 재료를 실은 우마차 앞에도 6명의 고취대가 자리한다 

 

현대의 고적대 편제와 동일해

 

조선조의 군악편제는 내취라고 명칭을 붙였는데, 영조 때에 편찬된 속대전에 의하면 겸내취와 원내취가 국왕의 거동 때 또는 정전에 출좌할 때 시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겸내취와 원내취의 기록이 병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내취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이라기보다 병조에 속했던 군악대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군악대의 제도는 성종 때 확립된 제도로 국조오례의』 『악학궤범등에 기록되어 있다. 행악인 전부(全部)고취와 후부(後部)고취는 왕의 어가를 중심으로 하여 앞뒤로 배열하는데,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악사가 각 1명이고, 악공은 50명이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에 나타나는 이 기마고취악대의 형태는, 요즈음 군악대의 고적대나 각급 학교 등에서 나타나는 고적대의 악기편성과 동일하다. 인원의 편성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고적대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보면 나각(소라), 나팔, 태평소, 대금, 피리, 해금, , 자바라, 장고, 운라 등 동일한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명절 다음날인 211. 행궁을 찾아 벽에 그려진 능행반차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몇 차례나 보았지만, 그저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를 보다가 중간 중간 말을 타고 있는 기마고취대의 모습에 눈이 번쩍 뜨인다. 정조대왕의 어가 뒤편을 따르는 고취대의 인원이 악학궤범 등에 나오는 인원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편제는 다르다고 해도 51명의 고취대가 어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능행반차도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이기 때문에, 당시의 고취대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능행반차도에 나타난 편제에 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지만, 고취대 하나만 갖고도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시인묵객들이 찬한 화진포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고성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가 간성군에 속해있는 호수였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의지행부록(地行附錄)동계조에 보면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여은포라고도 불렀으며 현 봉포리와 용촌리 사이에 있는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기록하고 있다.

 

이 화진포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서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금구도는 광개토왕의 무덤일까?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왕은, 이름은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일려졌다.

 

이 곳은 신라시대 수군 기지로 해안을 지키던 흔적인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섬의 중심부에서, 19974월 와편과 주춧돌이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200810월에는 현장조사와 함께 2달간의 조사에서는, 건물지 및 우물지 고려시대 청자 유물 등이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왕 3년인 304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다만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들은, 왜 광개토왕이 사망을 한지 2년이 지난 후에 이곳에 안장을 했을까? 초도(草島)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가 혹 초분(草墳)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구도라는 명칭도 왕(=今上)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하는 금구(金丘), 금구(金柩)는 아니었을까? 등 많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에 세운 안내판을 보니, 고성군에서는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확인될 경우 원형복원을 하겠다고 적고 있다.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민족의 웅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 이글은 고성문화원 김광섭 향토사학자님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였습니다. 김광섭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와선정(臥仙亭), 신선이 누운 자리일까? 아니면 경치가 너무 좋아 신선이 내려와 이곳에서 잠을 잔 것일까?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골띠말. 좁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마을 끝 계곡가에 자리 잡은 와선정이 있다. 정자 건너편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쯤 주차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와선정이 돌담에 둘러싸인 채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이는 와선정은 흡사 골짜기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와선정이라고 했을까? 날이 추워서인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와선정은 사철 경계가 다 다르다고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여름철 이 노송들과 함께 주변의 느티나무가 어우러지면, 또 다른 풍광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글이 있다. 2004년도에 이 다리를 축조하면서 곁에 세워둔 비다. 다리에는 오현교(五賢橋)라 적혀있다. 이 정자를 지은 태백오현(太白五賢)을 상징하는 다리다. '병자호란(1636)에 벼슬도 버리고 太白山下 춘양에 은거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지켜 온 태백오현의 덕을 기리고 교유회동의 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다리를 놓고 오현교라 이름 짓다'라고 적혀있다.

 

다리를 건너 와선정으로 다가간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이라 칭하는 손우당 홍석(洪錫, 1604~1680), 두곡 홍우정(洪宇定, 1595~1654), 포옹 정양(鄭瀁, 1600~1668), 잠은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가 이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와선정이란 이름은 주변의 경치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사덕암이라는 바위는 덕을 기리고, 은폭이라 하여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폭포는 은색인데, 그 밑 바위가 신선이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와선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며 와선정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

꾸미지 않은 간단한 현판도 태백오현의 심성을 닮았다

 

태백오현은 모두 이 와선정에서 10리~30리 거리 내에 은거를 하였다. 강흡은 법전의 버쟁이에, 정양은 춘양 도심촌에, 홍우정은 봉성에 은거를 하였다. 그리고 심장세는 모래골에 있었으며, 홍석은 춘양 소도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이곳 와선정에 모여 회합을 갖고, 풍류를 즐겼다.

 

와선정은 계곡 쪽만 놓아두고 돌담으로 둘렀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와선정의 출입구다. 현판은 그저 퇴락한 옛것 그대로 걸려있다. 안은 문을 잠궈 들어갈 수가 없지만 누마루방이다. 아마 여름 한철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두 칸 정도로 지어진 정자는 사방에 문을 내었다. 문수산에서 발원한 초계천이 시원한 산바람을 몰고 들어올 수 있도록, 사방을 모두 열어젖히고는 했나보다.

 

와선정은 난간을 두르고 계곡물이 흐르는 쪽으로는 모두 뮨을 내었다.

  
방은 온돌을 놓지않고 누마루로 깔았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다. 사방에 난 문을 열면 은폭과 사덕암, 그리고 흐르는 물과 늙은 노송, 맑은 물이 흘러가는 모습. 그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다. 태백오현은 이곳에 모여 시름을 달랬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경계에 눈을 떠 스스로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봉화는 군내에만 100여 개가 넘는 정자들이 있다. 와선정은 그 많은 정자 중 빠지지 않는다. 실록이 우거진 여름 철,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발길을 옮겨야겠다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곳이 어디라고 하면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주 거돈사지라고 한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아! 그곳'하고 알 수도 있다. 부론면 소재지에서 정산리로 가는 고갯길은 넓지가 않다. 가다가 큰 차라도 만나면 비탈 옆으로 바짝 차를 붙여야만 할 때도 있다. 어제부터 내린 눈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 명절 때라 고향으로 찾아올 사람들 때문에 도로에 눈은 말끔히 치워졌다.

 

석장승 2기가 길 가에 서 있어

 

삼거리에서 정산1리를 지나 2리로 들어가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우측에 석장승 2기가 마주하고 서 있다. 장승은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게 자리를 잡지만, 정산 2리의 석장승은 길가 우측에 마주하고 있다. 길에서 보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지하여장군이고, 길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천하대장군이다.

 

 

이 석장승의 옆에는 각각 솟대를 세워놓았다. 천하대장군은 사모를 쓰고 눈과 코는 돋을새김을 하였다. 그리고 이빨을 큼지막하게 선각으로 처리를 하였다. 복판에는 네모나게 자리를 내고 천하대장군이라 한문으로 썼으며, 허리 부분을 금줄로 묶어 지하여장군과 연결해 놓았다. 지난해 친 금줄은 낡고 색이 변했지만, 이 마을이 장승제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꽂은 형상이다. 그리고 눈과 코 이빨은 천하대장군과 다름이 없다. 복판에는 지하여장군이라 한문으로 음각을 하고, 허리에 금줄을 묶어 천하대장군과 연결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줄은 각 장승과 함께 있는 솟대에 연결을 했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 두르는데, 한번 두른 금줄은 다음 해에 새로운 제를 지낼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다.

 

천하대장군인 숫장승은 귀가 크고 눈과 코를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지른 형태로 조형을 하였다.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솟대는 위에 기러기를 올린다. 기러기는 멀리 날 수가 있다고 하여. 멀리서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거돈사지 앞에도 장승이

 

정산2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정산 3리가 된다. 이곳에는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가 있다. 신라 때에 창건된 거돈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거돈사를 들어가기 전 우측에 폐교가 된 학교가 있다. 그 담장 밑에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여러 기가 서 있었다. 눈길을 달려 온 것도 기축년을 보내고 경신년을 새롭게 맞는 날에, 묵은 것을 장승에 빌어 다 털어버릴 생각에서다. 그리고 눈이 쌓인 목장승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한 5 ~ 6년 전인가 이곳 거돈사지를 찾았을 때 만났던 목장승군. 아마 7 ~ 8기나 되어 보이는 목장승들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돌무지 위에 서 있었다. 그 목장승군이 그렇게 정겨워보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가니 목장승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 대신 정산 2리의 석장승과 같은 장승이 이곳에도 마주하고 서 있다.

 

매년 해를 거르지 않고 제를 지내는 정산리. 그런데 왜 목장승을 없애고 석장승으로 대체를 한 것일까? 물론 목장승은 매년 새로 깎아서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 바꾼 것일까?

 

정산3리 거돈사지 앞에는 이런 목장승이 서 있었다.

 목장승을 대체한 정산 3리의 석장승

천하대장군. 밑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얹었다.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정산 3리의 장승은 색다르다. 먼저 기단인 네모난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세웠다. 천하대장군은 폐교 담장 쪽에 서 있고, 지하여정군은 길 쪽으로 서 있다. 이곳도 두 장승이 마주하게 놓았는데, 지하여장군은 길을 등지고 서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정산 2리의 장승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 장승들을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솟대가 나무를 깎아 대를 세우고 그 위에 기러기를 올린 것이 아니고, 장승의 머리 위에 크게 기러기를 깎아 올려놓았다.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색 기러기를, 지하여장군의 머리 위에는 붉은색 기러기를 올려놓았다. 허리춤 밑으로 묶은 금줄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몇 년만에 찾아온 정산리. 바쁘게 달려와 목장승 머리에 쌓인 눈을 보고 싶었는데, 그 대신 이렇게 돌로 깎아 색다르게 변한 장승을 보게 되다니.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기러기를 올렸다

지하여장군의 위에는 빨강 기러기를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런 형태를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장승을 세우고 정성을 드리는 것은, 모두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함이다. 이곳 정산리의 주민들과,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모두 평안한 경인년이 되기를 바란다. 눈이 쌓인 곳에 발을 묻고 있는 장승들. 그 차디찬 석장승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계사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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