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 만 명 이상이 민족의 대이동을 했다는 계사년 설 연휴.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설은 명절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다. 명절 때가 되면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명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절이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직업 때문에 고향을 찾아가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것은 자신이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설날인 10일 하루 동안 찾아 본 그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이다.

 

 

3년 째 보지못한 가족, 체취라도 맡고싶어

 

서울을 올라가려고 수원역을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고행을 찾아 기차를 타려고 역사 안이 시끌벅적하다. 그 한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보따리를 하나 곁에 두고 하염없이 기차를 타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눈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이 보인다. 곁에 가서 괜히 이야기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씨가 추울 거라고 하더니 좀 풀렸네요.”

담배 피우세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시죠.”

 

흡연구역으로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지를 않는다. 가만히 보니 담배가 없는 듯하다. 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고향이 어디세요?”

“......”

그런데 고향에 안 가세요?”

벌써 가족들을 보지 못한지 3년이 넘었네요.”

 

고향조차 말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부도를 내고 말았다는 김아무개() 고향을 갈 수도 없고, 전화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역에 나와 이렇게 사람들이 고향을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면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체취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란다. 그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나 역시 한 때 가족들과 떨어져 수많은 날을 그리움으로 지새보았기에,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맞는 어르신은 왜 혼자였을까?

 

명절 전인 8일 재래시장을 취재하러 나갔다. 취재를 마치고 일부러 남수문을 돌아 화성을 좀 걷고 싶었다. 창룡문 쪽을 따라 성 밑 길을 걷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 어르신 한 분이 성 밑돌에 앉아계시다. 이 추운데 왜 저곳에 계신 것일까?

 

어르신 이 추운데 왜 거기 계세요. 고뿔드시겠어요.”

갈 데가 없어

집이 없으세요?”

아니 잔 집은 있어. 그런데 장에 나온 사람들 구경하느라고

그럼 장으로 가서 보셔야죠.”

장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더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시는 어르신. 혼자 생활을 하시는 홀몸어르신이라고 하신다. 아들딸이 있지만, 벌써 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다고. 어쩌다보니 혼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어르신, 더 이상을 물을 수가 없다. 언제인가 방송 일을 할 때 양로원에 계시던 분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주소도 모른다. 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들의 이름도 모르신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무엇인가 방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쓰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손가락 글씨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귀여운 손자손녀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절이 되면 더 슬픈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명절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정부가 들어서고 최우선이 서민들의 복지라고 한다.

 

과연 이 새 정부가 온전한 복지를 이루어낼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올 계사년 추석에는 제발 이렇게 혼자서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설날 한국민속촌의 모습입니다.

가을이 무척 좋아서

밝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메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용인시 기흥읍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고택의 담 밖에 세운 문학비에 적힌 시다. <추월(秋月)>이라는 이 시는 민족문화추진위원 이필구 역으로 적혀있다. 음애 이자(李자)는 성종 11년인 1480년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자는 정치가며 도학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5대손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이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홀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에 선봉에 섰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낙향한 이자는 음성, 충주, 용인 등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용인 지곡리에는 고택과 유택이 있고, 조광조 등과 함께 노후를 생각해 지은 사은정이 있다.

 

음애 이자의 시문은 3656편이라는 대단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이 남아있다. 1533년 54세로 운명하니,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 시에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팔각형의 기둥이 있는 사랑채

 

이자 고택은 부와산을 마주하는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동향으로 앉아 있다. 처음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부엌으로 연결이 되어 ㄷ자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자형의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튼 ㅁ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 지금은 행랑채는 없어지고, ㄷ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좌측 남서쪽 모서리에 마루로 놓은 신주를 모시는 청방을 두었다. 이 방이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이 아닌 것은 창호에서 나타난다.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을 모두 창호로 내는데 비해, 이자 고택의 마루방 측면의 문은 판자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방이 사당 역할을 하는 청방임을 알 수 있다. 과거 집의 규모가 크지 않은 중류 주택에서는 사당을 별도로 짓지 않고, 사랑채나 안채에 일부를 사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출이 된 청방의 옆으로는 두 칸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두 칸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청방과 사랑방의 사이는 전체를 문으로 해달았다. 사랑채의 우측 맨 끝에는 부엌을 들였는데, 위는 다락방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우측 끝에는 문을 달아 높은 다락을 만들었다. 이 다락은 사랑방 앞에 놓은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이 기능하다. 이자 고택의 사랑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방 전면에 있는 기둥이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긁어 팔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런 팔각기둥은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자 고택만이 갖고 있는 멋이다.

 

간결한 안채의 꾸밈이 돋보여

 

이자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간을 별도로 했으며, 이어지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한 칸 건넌방이 있다. 이어서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다시 두 칸의 부엌을 두었다. 한 칸의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을 했다.

 

 

안방은 길게 두 칸으로 만들었으며, 부엌 위 한 칸은 다락을 꾸몄다. 그런데 그 다락을 올려다보면 굽은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굽은 목재를 이용했다는 것은, 집을 지은 목수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이자 고택은 치목 수법이 뛰어나며, 평면과 입면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 조선조 후기 경기도 지역 중류주택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안채 대청의 뒤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툇마루가 또한 일품이다. 길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두터운 통나무를 그대로 툇마루로 이용을 하였다. 그 옆에 연도를 놓아 올린 굴뚝도 낮게 만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자 고택을 돌면 주춧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지 않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집안의 주추를 놓았는데, 그러한 흐트러짐이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이라니.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데 있다.

 

 

이자 고택의 안채 부엌에는 아궁이 옆에 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아궁이 곁에 광을 둔 것도 이자 고택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안의 여인들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졌다. 안채의 부엌과 사랑채의 부엌 사이에 놓인 우물을 보아도, 이 가옥이 여인네들의 동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나타난다. 

 

흰 눈이 녹지 않아 설원으로 변한 이자고택.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자 고택은 운치가 있다. 눈을 밟고 집안 구서구석을 돌아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크지 않으면서도 멋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짜임새가 돋보인다. 대문으로 사용하는 일각문을 나서면 담장 모서리 위에 올린 기와가 눈길을 끈다. 눈이 덮인 담장의 기와는 모두 감추어졌는데, 한 장의 기와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이자 고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024-14에 소재한 <송가네 빈대떡 집>. 이 잡을 찾아가면 언제나 푸짐한 빈대떡 한 접시에 술 몇 잔을 마시고는 한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만, 이 집처럼 푸짐함을 느끼는 집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각종 전을 주문대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송가네 빈대떡집의 대표인 오범석 사장은 이른 저녁부터 준비를 한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낯모르는 분들과 합석을 하기도 한다. 합석이라고 하기보다는 한 테이블을 나누는 정도이다. 이 집의 빈대떡은 주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부쳐주기 때문에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

 

다양한 빈대떡을 취향에 맞게

 

 

 

설이 이틀이 남았다.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다니다가 가까운 지인들과 송가네 빈대떡집에서 함께 자리를 했다. 요즈음 들어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선은 음식이 푸짐하기 때문이다. 푸짐하게 한 접시 가득 내오는 전을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송가네 빈대떡집의 전의 종류는 세 가지로 구분이 된다. 녹두빈대떡류와 파전류, 그리고 기타전류가 있다. 가격은 10,000원에서 15,000원 정도로 그저 세 사람이 찾아가 푸짐하게 전 두 접시를 먹고 술 몇 병 먹으면 4~5만원 정도의 가격이 나온다. 그레도 언제나 기분좋게 요금을 정산하고 나올 수 있는 집이기도 하다.

 

 

벌써 몇 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인가? 이 집은 늘 손님들로 만원이다. 조금 늦게 찾아갔다가는 자리가 없어 낭패를 당하기도.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바로 이 집의 장점이다.

 

서비스로 주는 어묵국도 푸짐해

 

빈대떡 두 접시를 시켜 먹고 나면, 서비스로 내놓는 어묵국이 있다. 이 어묵국 역시 푸짐한 편이다. 그저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좋게 마련이다. 8일 저녁에 찾아간 송가네 빈대떡집에서 처음에 시킨 것은 고기파전’(13,000) 돼지고기와 파가 적당히 어우러져 한 접시 그득하다.

 

 

맛을 낸 양념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 향과 맛이 일품이다. 술을 몇 순배 돌고나니 한 접시 그득하던 빈대떡 접시가 바닥이 났다. 다시 모듬전(15,000) 한 접시를 시킨다. 그리고 또 다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서비스로 내어주는 어묵국까지 상 위에 먹을 것이 그득하다. 원래 맛집 소개를 해도 일일이 과정을 사진을 찍지 않는 인사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늘 소개를 한다.

 

맛집 전문 블로거라면 하나하나 다 찍겠지만, 그도 답사를 다니거나 가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먹는 음식만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아 놓기도 했다.

 

 

앞으로는 제대로 일일이 과정을 담아 소개를 해주시고. 약도 좀 함께 넣어주세요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다. 음식을 먹을 때 기본으로 사진을 찍기는 하지만, 전체를 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은 내가 음식을 먹을 때 만족스럽지 않으면, 일체 소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른데 내 입맛에 맞는다고 해서, 그 집이 맛이 있다고 소개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 보다는 분위가나 착한 가격, 아니면 특이한 집만을 골라서 소개를 하는 것이 나에게 맞는 듯하다. 송가네 빈대떡집은 바로 그런 집이다. 우선은 주인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먹을 수가 있고, 그 자리에서 먹는 따끈한 전이 좋기 때문이다. 수원 인계동을 들릴 깅회가 주어진다면, 이 빈대떡집을 찾아가 푸짐한 빈대떡을 즐겨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주소 /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1024-14

전화 / 031-225-9563

험상궂은 괴수의 얼굴을 하고, 머리의 양 옆 귀 뒤에는 물고기 지느러미와 같은 형상을 한 용머리. 그리고 몸은 거북의 몸체에, 발톱은 용의 발톱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는 보물 제78호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이 탑비는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소재 사적 제168호 거돈사 터에 자리하고 있다.

 

거돈사지를 찾아가면 우측 한편에 서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의 고승인 원공국사(930 ~ 1018)의 행적을 적은 탑비이다. 비문은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라는 김거웅이 써서, 현종 16년인 1025년에 세웠다.

 

왕사를 지낸 원공국사

 

원공국사(930∼1018)의 법명은 지종(智宗)이고, 속성은 전주 이씨인데, 자는 신칙이다. 비문에는 그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 국사는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8세의 어린나이에 동진출가를 하여,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승려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광종 6년인 955년에는 오월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광종 21년인 970년에 15년 만에 귀국하여 대선사, 왕사가 되었다.

 

 용머리에 거북이 몸을 갖고 있는 탑비의 받침돌

 비문에는 원공국사의 일대기가 적혀있다. 최충이 글을 지었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현종 3년인 1012년에 왕사가 된 원공국사는, 1016년 병을 얻어 현종 9년인 1018년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다. 이러한 원공국사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이 비는 형식적으로는 신라비의 형태를 취했으나, 세부적인 기법이나 고려초기의 비 받침에서 나타나는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조각 솜씨에 절로 감탄이

 

받침돌 위에 네모난 돌을 올려 비를 받치고 있다.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시대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연곷문양과 만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비문을 적은 비의 몸돌이 받침이나 머릿돌보다 적다.

 

한 겨울에 찾아간 거돈사지. 눈이 쌓인 빈 절터에는 탑비와 반대편에 석탑 1기,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석조물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원공국사승묘탑비이다. 받침돌인 거북의 잔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문 안에 '만(卍)'자와 연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눈이 쌓인 거북의 뒤편도 눈을 치워놓고 보니, 육각형 안에 똑같이 만자와 연꽃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비몸은 머릿돌인 이수와 받침에 비해 작은 편이다. 거북의 몸에는 사각형의 편편한 돌을 얹어 비 받침을 장식했는데, 안상을 새겨 넣어, 고려 때의 탑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겨 넣었다. 탑비는 전체적으로 높이가 499.7cm, 폭은 비신의 폭이 123.8cm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탑비이다.

 

비의 머릿돌에는 구름위에 요동치는 두 마리의 용이 가운데 놓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밑 부분에도 꽃잎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머릿돌의 뒤편 역시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머릿돌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반대로 하고, 뛰쳐나갈 듯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있다. 아래편 비 받침의 용머리가 전설 속의 괴수와 같은 모습이라면, 머릿돌에 조각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머릿돌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보주를 자기 위해 다투고 있는 형상이다.

뒤편에도 두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했다.

 

탑비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이 탑비의 머릿돌인 이수를 옮기려고 수 십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어 움직이려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머릿돌을 움직여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근처 농가에 가서 소 한 마리를 빌려와 끌어보았더니, 바로 움직였다고 한다.

 

머릿돌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뜻일까? 탑의 주위를 돌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정말 답답하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전설 하나로, 이렇게 꽤 오랜 시간을 눈밭에서 서성이다니. 오후의 햇살이 흰 눈에 반사가 되어, 눈이 부시다. 저녁 햇살을 받은 탑비의 용머리가 더욱 괴이하다. 또 몇 날인가 이 해답을 얻기 위해 골이 아플 듯하다.

여주군 가남면 본두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조기울이란 본두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조선조에는 조개울면 또는 소개국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본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본두 1리는 묘촌 조기울, 본두 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해촌 조기울은 일제 때에 농촌의 식량증진을 위해 마을마다 농촌진흥회를 만들었는데, 이 마을에는 중앙에 괴목인 해나무가 있어서, 해촌진흥회라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을 위한 오래된 대보름 의식

 

28일 오후에 길을 나서 본두2리를 찾아 나섰다. 매년 이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낙화(落火)놀이'라는 의식을 보기 위해서다. 길을 잘못 들어 몇 번을 주변을 돌아서야 겨우 도착을 한 조기울 마을. 낙화놀이를 하는 논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논을 가로질러 줄을 매어 놓고 그 곳에는 등이 달려 있다. 등을 달아 맨 줄에는 길게 순대처럼 생긴 것들이 달려 있는데, 그것들이 연신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낙화놀이는 마을의 제의식이다. 딴 곳에서는 산신제나 목신제, 장승제, 서낭제 등을 지내는 것처럼, 이 본두리 마을에서는 낙화놀이라는 특별한 놀이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던 것이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해, 불꽃이 떨어지는 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정의 안녕과 만복이 깃들기를 빈다. 이 낙화놀이는 영동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르고 지나면서 조기울 마을이 갈라진 후에는, 홀수 해에는 본두 1리에서 지내고, 짝수 해에는 본두 2리에서 의식을 거행한다.

 

 

 

마을에서 전해진 전통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낙화 

  

낙화와 등을 매단 줄을 흔들고 계신 본두리 마을 신동유(남, 77세) 노인회장은 이 대보름 의식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우리 평산 신씨가 이 마을에서 살아 온 것이 벌써 14대인데, 마을에 정착하면서 이 낙화의식이 전해졌다고 하니까 500년은 족히 넘은 전통이지."

"낙화놀이는 왜 시작을 했을까요?"

"예전에는 마을에 병원도 없고 하니까 병이 들면 큰일이지.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이렇게 낙화놀이를 해서 병이 걸리지 않고, 자식들이 잘 크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리는 것인데, 지금은 예전 같지가 않아. 예전에는 대단했지."

"낙화는 어떻게 만드세요?"

"낙화는 집집마다 정성을 드리려고 만드는 것인데, 소나무 껍질을 말려 숯가루와 함께 곱게 빻은 다음, 메밀짚 잿물에 담갔다가 말린 창호지에 잘 싸서 만들지"

 

연신 줄을 당기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신동유옹. 이렇게 전해지는 마을의 전통 대보름 의식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집집마다 만드는 등과 낙화

 

논을 가로질러 걸린 줄에 매달린 등은 30여 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등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마침 등을 매단 곳에 계신 주민들이 있어 내용을 들어보았다.

 

"등은 집집마다 만드시나요?"

"그럼요, 정성인데요. 집집마다 만들어서 등에다가 이름과 소원을 적어 걸어요. 그래서 등이 못 생겼잖아요."

"파는 등을 사다가 하셔도 될 텐데."

"정성이잖아요. 매년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일 년 동안 집안이 편안해지죠."

"마을 주민 전체가 다 등을 만들어 거나요?"

"전에는 집집마다 걸었는데 요즈음은 빠지는 집이 많아요."

 


낙화는 불이 폭포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숯가루가 불에 타면서 아름답게 불꽃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 불꽃이 날려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는 바람이 없어 아래로만 떨어져 내린다. 마을을 못 찾아 헤매는 동안 많은 불꽃은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아름답기만 하다.

 

길이 30 ~ 40cm, 굵기가 5cm 정도인 낙화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는 불. 정월에는 불을 놓아 액을 방지한다. 달집태우기나 횃불놀이 등도 다 불로써 일 년의 액을 태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불로써 액을 막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를, '낙화놀이'라는 본두리 마을 특유의 의식으로 바꾼 것이다. 단지 액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함께 창출해 낸 조기울 낙화놀이는 또 다른 대보름의 아름다움이다.

 

"기자양반 우리 마을 소개 좀 잘해서, 많은 사람들이 낙화놀이를 보러 올 수 있도록 해줘. 이렇게 아름다운 놀이가 자꾸 사라지는 것이 아쉽잖아."

 

본두리 마을을 떠나는 기자에게 당부를 하시는 노인회장의 말씀이다. 밤새 그렇게 불꽃이 떨어진다는 조기울 낙화놀이. 정월 대보름 액막이의 특별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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