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며칠 후면 정월 대보름이 된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절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 날이다. 정초부터 시작한 정월의 각종 놀이가 이 날로 인해 대부분 끝이 나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정월달에 각 마을에서 지신밟기 등을 하다가 서로 이웃의 기를 만나게 되면 힘을 겨루는 '두레싸움'을 하고는 했다. '

 

두레'란 농촌에서 농사일을 함에 있어서, 공동으로 같은 연배의 구성원끼리 공동작업으로 노동력의 배가를 위한 공동체 조직이다. 예전에는 이 두레마다 풍물패와 두레를 상징하는 기가 있었는데, 대개는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고 두레명칭을 적는다.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러 나갈 때는, 이 두레기를 앞장세우고 풍장을 치면서 이동을 한다.

 


 

두레에 농기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풍장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두레 성원들이 자신들의 농사일을 마치고나면, 공동으로 두레 성원이 아닌 집의 농사일을 해주고, 그 삯으로 받은 돈을 이용해 풍장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레조직은 마을마다 있었으며, 그 두레조직을 상징하는 두레기는 각별한 위함을 받는다.

 

두레조직의 상징 두레기

 

막고 밀치면서 서로 먼저 장목을 뺏는 두레싸움

서로가 기를 뺏기위해 밀치다가 넘어지기도. 보는 사람들도 난리다.


두레기는 두레조직이 이동을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세운다. 이 두레기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만일 마을에 지체가 높은 양반이 살고 있으면, 그 마을의 두레기를 만나면 가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안성 남사당'의 농기에는 옥관자를 달고 다녔다. 이는 바우덕이 패가 경복궁을 중수 할 때 참가를 하여, 많은 노역자를 위한 즐거움을 주었다고 해서 대원군이 특별히 옥관자를 내린 것이다.

 

안성 남사당의 기를 '옥관자 기'라고 불렀으며, 모든 기는 안성 남사당 기를 만나면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했다. 두레기는 농사일을 할 때는 논두렁에 꽂아 놓는다. 만일 이 기를 쓰러트리면 마을이 불상사가 생긴다고 하여, 여간 조심을 하지 않았다. 두레기를 함붕로 다루거나 눕힌다던가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정월 곳곳에서 벌어지는 두레싸움

 

심하게 서로가 몸을 부딪기 때문에 때로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정월이 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장을 치고 나간다. 지신밟기며 정월 보름을 기해서 하는 많은 민속놀이에는 풍장을 곁들이게 되고, 그 풍물패의 앞에는 두레기가 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두레기를 앞세우고 길놀이를 하던 마을의 풍장패들이 서로 만나면, 먼저 상대방에게 길을 비키고 기수를 숙이라고 난리를 피운다.

 

길을 먼저 비켜주고 자신들의 기를 먼저 숙이며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이렇게 승강이를 하다가 급기야는 상대방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꿩 장목을 뺏는다. 장목은 두레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이 장목을 뺏기면, 큰 수치로 안다. 한번 꿩 장목을 뺏기면 그 해 일 년 동안은, 장목을 뺏어간 마을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강 둔치에서 재현된 두레싸움

 

보는 이들은 생동감이 있다.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장목을 뺏기면 일 년동안 뺏어간 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한다.


두레싸움을 할 때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기에 달라붙어 기를 쓰러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막는 자와 뺏으려는 자가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보면, 부상자가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월 27일 오후 여주 남한강 둔치에서 열린 대보름 한마당. 이곳에서는 군인들이 시범을 보인 두레싸움이 벌어졌다.

 

양편에 황룡기와 흑룡기가 서고, 그 앞에 각 마을 20명의 군인들이 서로 상대방 기에 꽂힌 장목을 뺏기 위해 두레싸움을 벌인 것이다. 젊은 군인들이라 서로 상대방의 기에 쫒아가고 막는 두레싸움은 보는 사람들조차 함성을 지르고 난리를 편다. 다칠 것을 염려해 손은 뒷짐을 지고 어깨로만 상대방을 밀고 들어가도록 했으나, 서로 부대가 달라서인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는 사람들까지 열광케 한다.

 

기를 지키려고 막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병사. 얼른 쫒아가 장목을 뺏어 승리를 하겠다고 달려가다가 제풀에 미끄러지는 병사. 거기다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두레기마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젊은 병사들이 보여 준 우리 전통 민속 한마당으로 인해, 대보름 한마당은 흥이 최고조에 달했다.

 

정월이 되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두레싸움. 이제는 그러한 아름다운 놀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전통은 구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면서 발전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던 놀이들. 이제는 새롭게 조명이 되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나라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이죠. 한 때는 한 해 1조원이 넘는 외화를 벌어들이는 공산품 수출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배에서 잠을 자고, 배에서 먹고 사는 항숙자(航宿者)일 뿐입니다. 노숙자와 다를 것이 없죠.”

 

219,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몸을 옴츠리게 만든다. 평택항은 바람이 딴 곳마다 조금 더 부는 듯하다. 12시 전에 도착한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늘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대개 우리가 보따리 상이라고 하는 평택항 소무역연합회의 회원들이다. 그들의 평균나이가 65세 정도라고 한다. 오늘 오후 7시 경에 출발을 해 내일 중국 땅을 밟고, 한 두 시간을 그곳에서 머문 뒤 다시 그 배를 타고 평택항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몇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자 매표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우리가 흔히 보따리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소무역연합회 김광석(, 67) 교룡회장이 동행을 하고 있어 물어보았다. 1시부터 승선권을 발매를 하는데, 이렇게 미리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아직도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비좁은 대합실에는 승선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평택항에서 중국으로 오가는 객선은 모두 4. 영성(퉁청)을 오가는 대륭호는 14시간, 위해(웨이하이)를 오가는 교동호 14시간, 연운(렌윈)을 오가는 연운호 24시간, 일조(르지오)를 오가는 일조호 20시간 동안 배를 타며 일주일에 3회를 오간다는 것이다. 이 각 항로를 오가는 배들마다 소무역연합회 회원들은 회장 등 임원을 선출해 자생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현재 평택항 소무역연합회에 소속된 회원은 모두 2,000여 명. 각 배마다 500명 정도의 회원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주에 3회 중국을 왕복합니다. 오후에 출발해 그 다음 날 중국에 도착을 하면, 한 두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배를 타고 평택항을 돌아옵니다. 배에서 먹고 자고 생활을 하는 것이죠. 1년이면 10개월을 배에서 생활을 하고, 한국에서 땅을 밟고 있는 기간을 불과 2개월 정도입니다

 

한 때는 그래도 살만했는데

 

이렇게 중국을 오가며 소무역을 하던 보따리상들이 공산품을 내다 팔아 벌어들인 외화는 년 간 1조원에 당했다. 인천, 평택, 군산을 이용해 소무역을 하던 보따리상은 5,500여명 정도. 그들은 우리나라의 공산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팔고, 그곳에서 농산물을 사와 그것으로 돈벌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2011년 말에 이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것은 한국세관이 중국에서 들여오는 농산물 불법 반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국에서는 한국에서 들여오는 모든 공산품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보복성이긴 하지만 보따리상들은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세관은 한 사람이 중국에서 들여올 수 있는 농산물을 5kg 이내로 줄였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판매를 목적으로 물건을 들여오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5kg의 농산물인 깨, 팥 등 중국에서 농산물을 들여와 팔면, 그래도 한 번 다녀 올 때 5만 원 정도의 이익을 올렸어요. 일주에 3회를 다녀오니까 15만원, 한 달이면 60~70만 원 정도를 벌어왔죠. 그러던 것이 20124월까지이고 그 뒤로는 단속강화를 하면서 한번 다녀오면 22,000~25,000원 정도의 이익을 내죠. 그 돈에서 밥 한 그릇 사 먹으면 한번 왕복에 10,000원 벌이가 고작입니다.”

 

대규모 수입상들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농산물을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수입농산물 가격이 폭락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행법으로는 우리가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와 한국에서 팔면 범법입니다. 집에서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보따리상들을 위해 눈감아 준다는 것이죠. 우리가 세관을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팔면 밀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조호를 타고 중국을 오가면서 소무역을 하고 있는 민양기(, 54) 일조회장은 앞으로 살아가기가 막막하다면서 한숨을 내쉰다. 벌써 10년이나 소무역을 하고 있지만, 지금이 최악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한 때는 우리 보따리상이 농산물을 중국에 수출하는 금액이 년 간 12천억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오는 것이 1,700억 정도였죠. 그 때는 소무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 보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저희들이 밀수꾼이 되어버렸습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농산물에서 발암물질이 검사가 되었다고만 하면, 저희 보따리상들인 소무역연합회가 도마 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정작 대량으로 수입을 하는 무역상들은 늘 면죄부를 받고는 하죠.”

 

평택항 소무역엽합회 최태용(, 64) 이사장은 자신도 중국을 오가지만 답답하기만 하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와도 2만 원 정도 밖에 이문이 없자, 밥값이라도 주리려고 밥을 싸들고 배를 타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비좁은 대합실, 농산물수입 규제 완화해야

 

한 때는 서해안시대를 여는 수출입의 중심에 섰던 보따리상이다. 그러나 한국 세관이 중국 농산물의 반입을 강력히 규제하자, 중국에서도 2011년 말과 2012년 초부터 한국에서 들어오는 공산품인 옷, 화장품, 커피, 벽지 등 모든 것을 막아버렸다. 현재까지도 그 규제는 풀리지가 않아, 중국으로는 아무것도 갖고 갈 수가 없다는 것.

 

생각해 보면

여보게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나

보따리 아닌 적 어디 있었겠는가?

 

배부르고 등 따스했던

그리하여 이번 생애 지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책보 둘러메고 깡충거리며

징검다리 뛰어 건넜던 어린시절

 

내가 업혔고

그 다음 내 새끼 둘러맸던 포대기

무거웠지만 아름다웠던 날들

그것도 보따리였네(하략)

 

김우영 시인의 우리 보따리 인생 아닌 적 있었겠는가?’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사실 우리민족의 상업의 근간은 보따리였다. 예전 보부상이 그랬고, 방물장수가 그랬다. 그들은 소규모 상인이었지만 전국 구석구석 누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던 그들의 후손들이 이제 생계마저 막막해진 것이다.

 

 

저희의 바람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대합실을 좀 넓혀달라는 것입니다. 명색이 국제여객터미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비좁아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습니까? 그리고 고시를 바꿔 소무역상들이 들여오는 농산물을 팔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생계를 이어가는 보따리상들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바람이죠.”

 

보따리상들을 위해서 세관 측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일어서는 평택항 소무역연합회 최태용 이사장은 요즈음 기자들만 왔다 가면 보따리상들이 밀수업자처럼 표현을 한다. 그래서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민감하다라고 한다. 혼자는 카메라를 들고 대합실 쪽으로 가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그만큼 보따리상들이 내일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http://rja49.tistory.com/entry/육송정은-어데-두고-홍교만-남았네라

 

아침에 요런 글을 하나 송고했습니다

연히 뷰에 송고가 되었을 것으로 알았죠

그런데 없습니다. 제 글이

분명히 첫번째 송고를 6시 20분에 했는데

다음에 볓번이고 해 보았지만 그넘 손가락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딴 분들 글이 다 송고가 되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사진들이나 보세요

 

 

요 아래 그림이 화면 캡쳐입니다

틀림없이 있는데 주소를 누르면 삭제된 글이랍니다

맨 아래 글 페이지 숫자 2를 누르면 또 나타납니다

요술방망이처럼....

 

아마 명칭을 육송정 홍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다리 부근 어딘가에 육송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1337호인 고성 육송정 홍교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재지가 두 곳의 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 홍교를 놓은 내가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간성읍에서 고성 건봉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군 훈련장과 같은 곳이 보인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는 다리 옆에 육송정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홍교는 보물인 건봉사 능파교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영조 24년인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는, 이 홍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아 건봉사 능파교보다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 암반을 이용해 축조한 홍교

 

육송정 홍교는 하천의 폭이 12.3m 정도가 되는 곳에, 10.6m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위는 양편으로 네모난 장대석을 줄지어 놓고, 그 위에 황토 등으로 메우는 방법을 택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육송정 홍교는, 동쪽은 그대로 암반을 이용해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을 올렸다.

 

서쪽은 3단의 지대석을 쌓은 뒤, 그 위에 홍예석으로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이 지대석의 1단은 땅 속에 묻혀있어,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단과 3단의 지대석은 커다랗고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각각 두 장의 돌을 붙여놓았다. 그 크기는 2단의 높이가 70cm 정도이고, 3단은 60cm 정도인데, 3단의 가운데는 안쪽으로 파손이 되었다.

 

 

이 육송정 홍교는 축조한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능파교와 함께 영조 21년인 1745년 대홍수 때 붕괴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능파교를 축조한 숙종 30년인 1704년이나 그보다 앞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꾸밈이 없는 단아한 육송정 홍교

 

이 육송정 홍교의 특징은 홍예와 날개벽 사이의 교각 면석을 장대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적인 냇돌을 사용하였는데, 아래편에는 큰 돌을 위편에는 작은 돌을 써서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단칸 홍교로는 보기 드물게 단아한 형태로 축조가 된 육송정 홍교는, 20066월에 홍교를 해체 복원하였다.

 

 

홍예를 구성하고 있는 장대석은 갈고 짧은 것을 적당히 섞어 공고하게 축조를 하였다. 2~3장의 장대석으로 이를 맞추어 쌓은 홍예는 매우 견고하게 보인다. 홍예밑으로 흐르는 물은 암반 위로 흐른다. 하기에 물이 스며드는 것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듯하다.

 

동편 홍예의 지대석을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육송정 홍교는 단아하다. 화려하게 모양을 낸 여느 홍교와는 달리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다. 다리 하나를 놓으면서도, 이런 세세한 면까지 신경을 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할만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육송정 홍교. 아마도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육송정 홍교 위에 서서, 몇 번이고 소리를 내어 감탄을 한다.

화성에서 만나게 된 KBS -2 TV의 버라이어티 ‘12’. 그 복불복 야외취침 장면을 우연히 목격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그동안 12일이란 프로를 보면서, 한 겨울에 밖에서 취침을 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의구심을 갖고는 했다. 왜냐하면 그 추운 겨울에 텐트 하나만 치고 밖에서 자다가는 몸이 성할 것 같지가 않아서이다.

 

하기에 촬영을 어느 정도 하고나면 안으로 잠자리를 옮겼다가, 아침 기상미션에 맞추어 다시 텐트 속으로 들어가는 설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내 의구심을 완전히 깬 현실을 본 것이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침 일찍 바라다보고 있는,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만난 복불복 잠자리였기 때문이다.

 

 

수원에 온 12

 

12일은 철저하게 보안유지를 하면서 촬영을 한단다. 소문이 나다가 보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촬영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인구 115만이 사는 수원 같은 대도시, 거기다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금요일의 화성 일대에서 촬영을 하다가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12일의 촬영 현장을 잠시나마 접하면서 왜 비공개를 촬영을 하는지(물론 비공개라고 해서 순수한 관광객들을 막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화성을 관람하는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12일에 출연을 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오지를 찾아다니면서 제작을 하는지도 이해가 간다.

 

지난 금요일인 215. 날이 많이 푹해진지라 화성을 한 바퀴 돌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화성을 따라 걸었다. 겨울철이 지나고 나면 추위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기왓장 등이 허물어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찾아내어 기사를 쓰고 문화재를 재빠르게 보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란 생각 때문이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에서 장안문을 향해 걷고 있는데, 북동포루 지붕을 보니 지붕을 발라놓은 것이 몇 장 기와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방송카메라를 들고, 멘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장비들이 동원이 되었다면 12일 정도라야 하기 때문이다.

 

12일 수원편이 기대된다.

 

사실 지난 해 11팔도 파워소셜러들을 수원으로 초청해 12일 동안 팸투어를 하면서, 참가한 블로거들에게 수원이 12일에 적합한 곳이라는 글을 올려주기를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 12일이 수원에 와서 제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북수문인 화홍문 쪽으로 자리를 옮겨 기다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12일의 멤버들이 수많은 카메라에 쌓여 화홍문에 도착을 했다. 마침 화홍문 주변에는 인근 고등학교의 학생들과 관람객들이 모여 있어, 그들이 환호를 치기도 한다.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어댄다. 경비를 맡은 일행들이 말려보기도 하지만, 막무가내이다.

 

찍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틈만 보이면 휴대폰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12일의 인기가 실감나는 장면이다. 그들은 자리를 연무대로 옮겨 국궁체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밤 화성 행궁 광장에는 비닐하우스 한 채가 지어졌다. 12일의 유명한 잠자리 복불복 때문이다. 갑자기 밤이 되면서 바람이 세차지고 기온이 떨어지는데 걱정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행궁광장을 나가보았다. 7시가 채 안되었는데 행궁광장에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들도 광장 한 가운데 놓인 비닐하우스가 궁금한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만, 보안 때문에 이내 제재를 당한다. 밤사이에 기온이 떨어져 날이 추웠는데도 바람막이도 없이 비닐하우스 안에 잠을 잔 잠자리 북불복.

 

이번 224()33(), 2회에 걸쳐서 방송이 될 12일 수원편이 많이 기다려진다. 그들은 정조대왕의 화성을 돌면서 어떤 이야기들을 했을까? 밤늦게까지 팔달산 서장대에 올라 무슨 게임들을 하고 왔을까? 그 모든 것이 궁금해 얼른 방송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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