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가격대비 30% 정도 싸게 구입

 

210일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날이다. 설날에는 조상님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곳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는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용품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날 정성을 다해 차릴 차례상 준비를 위해 장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5일장이나 인근에 있는 전통시장을 주로 이용했다.

 

그렇게 정감이 가는 전통시장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골목상권까지 침입한 대형할인마트 등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전통시장들은 많은 애를 먹기도 했다.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이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대형마트 등을 이용해 제수용품을 마련하고는 한다.

 

 

전통시장을 이용하면 30% 싼 가격에 구입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설 차례상 비용이, 전통시장의 경우 205000~213000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발표했다. 같은 물건을 구입할 때 일반마트는 294000309000원으로 전통시장에 비해 약 30% 정도 비싸다는 것이다. 결국 전통시장을 찾아가 제수용품을 마련하면, 30% 정도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구입할 수가 있다는 것.

 

거기다가 전통시장은 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민족은 물건을 흥정하면서 이 덤이라는 것을 으로 받아들인다. 그저 조금 더, 혹은 듬뿍 올려주는 이 덤으로 인해, 팍팍한 세상살이에서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전통시장은 우리들의 근간이다. 전통시장의 상인들은 이 추운 날에도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원 전통시장을 찾아가다

 

오전에 수원지동에 있는 전통시장을 찾아가 보았다. 지동에는 못골시장, 미나리광시장, 지동시장 등 세 곳의 시장이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고 있다. 지동시장을 들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있는 한 분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영통에서 왔어요.”

멀리서 오셨네요. 왜 이곳까지 오셨나요?”

요즈음 먹거리들 갖고 장난들을 많이 친다고 하는데, 이 곳은 단골이라 믿을 수 있어요. 또 질 좋은 것을 팔기 때문에 저희는 명절만이 아니라 늘 이곳을 이용해요. 가끔은 덤으로 좋은 것도 주시고요

 

이곳에서도 역시 덤이 있단다. 정육점에서 주는 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필요한 육고기 외에 국거리 내장 등을 따로 주는 듯하다.

 

 

미나리광시장과 못골시장 앞으로는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물결로 온통 난리법석이다. 못골시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만큼 명절을 맞아 전통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분들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모레가 설인데 오늘 장에 나오신 이유라도 있나요?”일요일이 설인데 내일은 아무래도 장을 보아서 준비를 하기가 버겁거든요. 오늘 장을 보아야 조금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 있어요.“

오늘 장을 다 보시는 건가요?”

저희는 가족들이 많아서 미리 준비할 것은 오늘 준비하고, 떡 같은 것은 내일 준비하려고요.”

 

정자동에서 왔다는 정아무개(, 49)는 얼굴이 상기된 채 열심히 흥정을 하고 있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지만, 명절잔치를 어쩔 수는 없는가 보다.

 

아무래도 전통시장이 제수용품을 마련하는 데는 제격인 듯해요. 이곳에는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요. 또 가족들끼리 이렇게 함께 장을 보러 나오면, 더 깊은 정도 느껴지기 때문이죠.”

 

덤이라는 정도 있고 30% 정도 싼 가격에 제수용품을 마련할 수 있는 전통시장. 우리 민족의 명절에는 그래도 전통시장을 찾아 흐드러진 인심을 한 번 맛보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형방청이란 조선시대 관아에서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이 묵던 곳이다. 부여군 홍산면에 소재한 홍산현 동헌과 형방청,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홍산객사와 더불어 20077월 사적 제481호로 지정이 되었다. 홍산현은 백제시대에는 대산현이었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조선조 태종 때 홍산현이 되었다.

 

홍산현 관아를 찾아가 중층 누각으로 지은 정문을 살펴보니, 문이 열려있다. 원래 이 관아의 건물은 부소산성으로 옮겨 영월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관아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이 된 홍산형방청이 자리한다. 이 건물을 <이정우 가옥>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홍산형방청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정우 가옥을 몰라?

 

현재 홍산형방청이 왜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리는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한때 이 집에서 이정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부여군의 문화재 안내에는 이정우가옥인 형방청이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183-1>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방청의 관아건물 말고, 또 다른 가옥이 있는 것인지.

 

홍산면에 들려 북촌리를 향했다. 이정우가옥이 있다는 곳을 찾아 아무리 둘러보고,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그런 집은 모른다는 대답이다.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장님 댁을 찾아 물어도 그런 집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일도 있다. 할 수 없이 집을 찾는 것을 포기를 하고 홍산 동헌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산 동헌이 있는 곳은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 187번지>이다. 그런데 이곳을 가니, 관아 앞에 안내판이 있고, 관아 건물 한 편에 이정우가옥이라는 집이 보인다. 어떻게 한 관아 안에 있는 건물이 남촌과 북촌으로 갈라질 수가 있을까? 막상 그렇게 찾으려고 돌아다닌 집을 찾고 보니 허탈감이 든다.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묵던 형방청

 

이정우가옥은 조선시대 홍산현의 관아 건물 중의 하나인 형방청(刑房廳)’이다. 현재는 홍산형방청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고종 8년인 1871년 고쳐 지은 민가풍의 목조건물이다.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이라고 불렀단다. 10칸 크기의 자형 동향집으로, 중앙 대청과 남쪽 날개채는 마루를 깔았었다. 북쪽 안채에는 한 칸짜리 온돌방 2개를 들였다.

 

 

형방청은 자연석 주춧돌에 몸채는 정면 5,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고, 좌우 날개채는 정면 2, 측면 1칸으로 꾸몄다. 몸채의 지붕 용마루를 좌우 날개채보다 높게 놓았다. 몸채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미고, 측면에는 부엌을 두었다. , 우측의 날개채에는 현재는 각각 2개의 방을 드렸다.

 

형방청은 팔작지붕으로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형방청은 그 예가 희소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관아 건물 중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던 것도,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형방청은 건물연대, 중수기록, 형태 등이 온전히 남아있어,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일면을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 건물 한 동에 다양한 쓰임새가 돋보여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렀던 홍산형방청은 단 한 동의 건물이지만,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몸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좌측에 딸린 날개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아마도 이 좌측 날개채를 사랑의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몸채 우측의 날개채는 두 칸을 방으로 들였으며, 끝 방의 밖으로는 다락이 돌출되어 있다.

 

몸채와 우측 날개채의 앞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좌측 날개채의 툇마루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곳은 문을 내어, 출입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부엌문은 양편으로 내어 환기를 돕고, 몸채로 출입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 동의 건물을 이렇게 용도가 다양하게 꾸민 집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던 관리들의 편의를 생각해서인지.

 

 

많은 고택을 돌아보았지만, 홍산형방청과 같은 구조라면, 이 집 한 채만 갖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어렵게 찾아다닌 때문인지, 형방청의 이모저모가 눈에 들어온다. 좁지만 용도가 다양한 홍산형방청. 보존상태도 양호하기에 더욱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천학정(天鶴亭), 동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다소곳이 숨을 죽이고 있는 작은 정자 하나. 밑으로는 동해안의 여울 파도가 암반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겹다. 이 작은 정자를 벌써 너 댓 번은 찾아간 듯하다. 왜 그리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감흥은 달라지는 것인지. 아마도 그 계절이 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으로 향하다가 보면, 길가에 천학정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교암리 마을에서 동해안 쪽으로 낮은 산이 하나 서 있다. 그리고 계단을 잠시 오르면 거기 절벽 위에 납작하게 숨죽이고 있는 천학정을 만나게 된다. 이름 그대로 이 천학정은 하늘과 더 가까이 가려고 뛰어 오를 듯 절벽 위에 자리한다.

 

 

500년 역사, 숨죽이고 있는 정자

 

천학정은 1520년인 중종 15년에 군수 최청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 보면 이미 지금 만나는 정자 이전에, 이 자리에 천학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니 50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바닷가에 서 있는 고성팔경 중 한 곳인 천학정은 기암괴석의 해안 절벽에 정면 2,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천학정 북쪽으로는 능파대(凌波臺)가 자리한다. 천학정과 아우러지는 능파대. 아마도 파도를 굽어보고 있으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능파대 위에 올라 천학정을 바라다본다. 어느 곳에서 바라다보아도 아름다운 정자이긴 하지만, 능파대에서 바라보는 천학정은 그야말로 선계에 있는 정자를 보는 듯하다.

 

 

동해안 일출의 명소 중 한 곳인 천학정. 전학정은 그동안 전해지던 역사가 깊은 옛 정자는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일까? 다만 1884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8년 당시 면장의 발기로 1931년 교암리에 사는 마을 유지 세 사람이 재건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옛 기억을 더듬어 지어냈겠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과 하나가 된 정자 천학정

 

22, 통일전망대를 거쳐 속초로 길을 잡아 내려가다가, 문득 천학정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날, 천학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할 것이지? 교암리 마을 안 천학정을 오르는 길목주변에는 얼음이 가득 얼었다. 미끄러지는 길을 피해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오른다. 천학정으로 오르는 좌측으로는 능파대가 높다라니 솟아있다.

 

 

천학정에 올라 동해를 굽어본다. 그저 절로 글 한 수 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절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랑을 하지 않는 정자라서 더욱 좋다. 멀리 여울파도가 벼랑을 항해 치닫는다. 금새 벼랑에 부딪친 파도는 하얀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이곳에 천학정을 마련했나보다.

 

천학정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서 있다. 정자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정자가 아닐런가? 그 속에 때에 절은 속인(俗人) 하나 앉아있기가 미안하다. 밖으로 나와 능파대로 오른다. 동행을 한 스님이 정자에 앉아 경치에 취한다. 그 또한 자연이다. 그렇게 천학정은 동해를 바라보며, 스스로 동해와 어우러진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정자들이 나름대로 자연과 동화되어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주인의 마음을 닮는다고 한다. 처음 이 천학정을 지은이도 자연과 닮아 살았을 것이다. 천학정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신선이 되어 한 마리 학의 등에 올라 파도치는 동해 위로 훨훨 날고 싶었을 것이다. 2월의 찬바람이 이는 날 찾아간 천학정. 동해안 작은 정자는 그렇게 자연을 닮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여군 홍산면의 면소재지 안에는 남촌리와 북촌리가 섞여 있는 듯하다. 남촌리에 소재한 홍산 동헌과 북촌리에 소재한 홍산 객사의 거리는, 불과 몇 십 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객사란 예전 관리들이나 사신, 혹은 관청에 찾아 온 손님들이 묵는 곳이다. 대개 객사는 동헌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

 

객사는 중앙에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있는 궁을 항해 망궐례를 올린다. 그리도 좌우 양편에는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한다. 이렇게 중앙에 궐패를 모셔 놓은 곳을 정당이라 부르고, 좌우에 묵을 수 있는 공간을 익실이라고 부른다. 즉 정당에 날개를 붙였다는 뜻이다.

 

 

좌우 크기가 다른 홍산 객사

 

현재의 홍산 객사는 불이나 소실이 된지 9년만인 조선조 현종 4년인 1838년에, 당시 군수이던 김용근이 재건을 한 것이다. 대개 객사의 좌우 익실은 그 크기를 같게 하는 법인데, 홍산 객사는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동쪽 익실은 다섯 칸으로 동편 세 칸은 대청마루를 놓고, 남은 두 칸에 방을 뒤로 물려 드렸다.

 

서편의 익실은 동편 익실보다 두 칸이 좁은 세 칸이다. 맨 서편 한 칸을 누마루로 처리하고, 남은 두 칸을 방을 드렸다. 동편 익실의 두 칸 방은 마루방이며, 서편 익실의 두 칸 방은 온돌방이다. 중앙 정당의 지붕은 양편의 익실의 지붕보다 높이어, 맞배지붕으로 구성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홍산 객사를 재건을 할 당시 목수 20여 명이 5개월 동안, 연인원 4,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건립하였다고 한다. 중앙의 정당은 아무런 시설이 없이 세 칸으로 구성한 빈 공간이며, 익실과는 다르게 처마 밑을 화려하게 장식을 해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리고 있다.

 

객사 동편에 은행나무에서 객사의 연륜을 알아

 

객사 동편에는 한 겨울 잎을 다 떨어트리고 가지만 남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750년이 넘은 고목이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 홍산객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부여군 향토유적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15m 정도이며, 밑동의 둘레는 7.5m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이다.

 

 

이 홍산 객사의 은행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마을에 변고가 생기거나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는, 나무가 울거나 불빛이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주민들이 위급한 일이 생길 때,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은 정월 초하룻날 이 나무에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 은행나무의 수령을 보면 최초로 홍산 객사가 지어진 것은, 고려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흔히 객관이라고도 부르는 객사는 고려시대에 지방에 두기 시작하였으며, 고려 때는 객사사(客舍史)’라는 향직을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홍산 최초의 객사는 아마도 고려 때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홍산 객사. 충남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홍산 객사 안을 돌아본다. 동편 익실은 두 칸의 방을 드리고, 남은 세 칸의 대청 주변을 창호로 바람을 막았다. 서편 익실은 개방을 한 형태이다. 겨울이면 따듯한 온돌에서 묵고, 여름이면 시원한 대청에서 바람을 쏘이면 쉬었을 것이다.

 

 

그저 관리들이 공무를 보면서 쉬어가는 곳이지만, 이런 객사 하나도 예술적인 감각으로 지어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마른가지만 남은 은행나무이지만, 그 당당한 모습을 눈에 담으며 뒤돌아선다. 올 여름에는 수령 750년의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보아야겠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 최형국박사를 만나다.

 

연구소 안을 들어가니 온통 검과 창, 등패, 곤방, 월도 등으로 벽을 도배를 했다. 이 정도로 많은 창검이라면 무예 24기 박물관 하나를 차려도 남을 듯하다. 거기다가 중국 청시대의 말안장까지 볼 수가 있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이자 역사학박사인 최형국박사(, 38. 무예 20)의 무예 연습실이다. 7년 전에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421-12에 소재한 한국전통무예연구소. 25일 오후에 연구소를 찾아가 최형국 소장을 만났다. 크지 않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지만, 검을 손에 들면 일당백의 무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최형국 소장은 화성 행궁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에서도 만날 수도 있다.

 

 

몸이 아파서 시작한 무예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공부를 하다가 보니 운동량이 부족했나봅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도, 물리치료 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어요. 운동을 많이 하라는 의사의 권유로 무예를 시작했죠. 그러다가 보니 이제는 무예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몸이 아파서 시작한 무예는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무예동아리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24기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도 오직 무예에만 열중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역사학박사 학위를 무예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을 했습니다. ‘조선후기 기병의 마상무예연구라는 논제로요. 아마 제 인생에 있어서 무예 24기와 저를 떼어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최형국 소장은 늘 우리 전통무예 24기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항상 마음 아픈 것이 일본은 중, 고교 과목에 활쏘기와 검술 등이 정식교과목으로 채택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아파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 25 한국동란 이후 미 군정체제로 들어가면서 우리나라의 체육이 서구화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운동이 필요한 것이죠. 예를 들어 격구나 장치기, 검술 등이 교과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운동이죠. 전국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수원만이라도 무예 24기를 교과목으로 채택을 해야 합니다. 수원은 딴 곳과는 달리 과거 정조대왕 때 이곳에서 장용영 병사들의 신체단련이 바로 무예 24기였기 때문이죠.”

 

입시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무예는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

 

최형국 소장은 입시생들에게 무예를 권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도 무예를 시작하면서 집중력이 생겼기 때문에 입시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

 

무예를 하다가 보면 남들보다 집중력이 뛰어납니다. 입시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집중력이죠. 저는 입시생을 둔 학부모님들께 우리 전통무예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무예 24기는 우리들의 몸을 만들고,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들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 최형국 소장. 인생 자체가 자신과 무예24기와 떼어놓고 말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가늠이 된다. 최형국 소장은 지난 해 12<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라는 책자를 송일훈(용인대 교수), 김산(전북대)과 함께 공저로 출간을 했다.

 

이 책은 누군가 반드시 써야 할 책입니다. 수원에서 이 책을 냈다면 더 바람직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책을 낼 수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그 동안 각자가 썼던 논문 등을 수정, 정리를 했기 때문에, 이 책을 내기까지는 아마 1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듯합니다.”

 

 

무예24기 시범단 시립화 되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무예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괜찮을까 의문이 생긴다. 살아가는 데 부족함은 없느냐고 물었다.

 

제일 걱정은 바로 생계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날을 생각하면 저절로 움츠려듭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죠. 과연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무예24기 시범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시범단 모두가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저희들의 바람은 그래도 수원을 대표하는 것이 화성이고, 그 화성은 장용영 병사들이 수호하던 곳이라고 한다면, 무예 24기 역시 화성의 상징입니다. 시립화시켜서 무예 24기가 온전히 수원에서 전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최형국 소장은 수원은 딴 지자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화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조물이지만, 실제로 그 화성에서 나라를 위해 싸움을 한 것은 장용영 병사들이고, 그 병사들이 익힌 것이 무예 24기였기 때문에 화성과 무예 24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 그래서 무예 24기 시범단을 시립화시키고, 전수관과 공연장 등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무예 24기는 수원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됩니다. 단순히 화성 행궁 앞에서 시범만 보일 것이 아니라, 전수관과 상설 공연장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라도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오면 공연장에 들려 무예 24기 시범을 볼 수 있고, 전수관에서는 시민들에게 무예 24기를 전수시켜 그들 중에서 시범단원을 보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예에 대한 걱정뿐이다. 요즈음처럼 험한 세상에 무예 24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호신술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린 딸을 데리러 간다고 연구소를 나서는 최형국 소장의 어깨가 오늘따라 무거워 보인다. 눈발이 날리는 오후, 그저 아무런 걱정 없이 무예에만 열중할 수 있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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