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 큰 명절입니다. 설날과 추석, 동지와 함께 4대 명절로 정하기도 하죠. 그런 대보름에 기억나는 아름다운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이런 행사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에, 늘 마음이 허전하기도 합니다. 한 지역의 문화는 사실 그 지역의 지자체장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지자체장이 문화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그 지역의 문화는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가 있지만, 지자체의 장이 문화를 잘 모른다거나 편협 된 사고를 갖고 있다면 그 지역의 문화는 그저 멍멍하니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아름다운 남한강 대보름 한 마당

 

벌써 한 3년이나 지났나봅니다. 4대강 정비인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아름다운 남한강을 공룡과 같은 중장비들이 한창 파헤치고 있을 때, 남한강 둔치에서는 대보름 한마당이 열렸습니다. 민예총 여주지부에서 준비를 한 대보름 한마당. 사람들은 그때까지 대보름의 많은 행사가 이렇게 아름답게 행해진다는 것을 모르고 참가를 했습니다.

 

여주 흔암리에서는 보름에 줄을 당기고 난 뒤, 그 줄을 얼어붙은 강에 갖다 놓습니다. 그것이 해동이 되면 남한강으로 떠내려가죠. 그런데 이 줄에는 액송기(厄送旗)’라는 것이 꽂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모든 액을 적은 작은 깃발이죠. 이 액송기를 꽂은 줄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면, 자신의 우환 등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렇게 아름다운 의식이 3년 전, 대보름날에 남한강 둔치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는 우리민족의 대보름 때 보이던 많은 놀이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행사였습니다. 날이 추웠지만 많은 사진작가들이 횡재를 했다고 즐거워 한 행사였죠. 두레싸움, 줄다리기, 장치기, 다리밟기, 액송의식, 강고사, 달집태우기 등, 우리민족의 대보름에 행해지던 놀이가 총 망라된 복합적인 놀이였기 때문입니다.

 

 

대보름의 놀이 중 압권은 액송 줄 띄워 보내기

 

그랬습니다.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탄성을 지르며 연신 셔터를 누른 것은, 바로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액송기에 이름과 나이, 그리고 자신에게서 사라졌으면 하는 나쁜 것을 적어 기에 꽂고, 그것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의식이죠.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3년 전 대보름날에 남한강에서 행해진 뒤, 그 다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우리만의 대보름 놀이였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행사가 멈추어진 것이죠. 이런 아름다운 대보름의 놀이는 지자체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도 일조를 합니다. 그런 대보름 놀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죠. 대보름 놀이 자료를 정리하다가 찾은 자료입니다. 사진으로 설명을 해볼까요.

 

액송기를 꽂은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줄다리기를 하고 난 후 줄은 남한강가로 옮겨집니다. 줄에 꽂힌 액송기들입니다

 

액송기를 꽂은 줄을 보내기 위해 살풀이 춤을.  

 

춤을 추다가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대단한 퍼포먼스죠. 그 추운 정월 보름에 

 

액송을 하기 위해 작은 볏집에 불이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떠내려 보냅니다.

 

액송기를 꽂은 줄도 함께 강물에 띄워보냅니다.

가끔 좀 색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속이 확 풀리는 음식이거나, 아니면 정말 정신없이 매운 그런 음식 말이다. 어제 점심에 우연히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을 들렸다가, 정말 땀 깨나 뺐다. 이 식당은 ‘장치봉의 맵꼬만 명태찜’이란 상호를 달고 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 음식에는 손을 들어버린다고 한다.

 

자극성 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딱 먹기 좋은 ‘맵꼬만 명태찜’은 1인분에 5,000원이다. 가격도 착한데다 밑반찬도 깔끔하다. 밥은 한 공기에 1,000원을 별도로 받지만, 밥이 부족하면 인심 좋게 더 퍼준다. 2인분을 시키면 항상 한 사람 몫은 남을 정도로 푸짐하게 나온다.

 

 

감기도 떨어질 것 같은 매운 맛

 

‘장치봉의 맵꼬만 명태찜’ 집은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에 소재한다. 초행길인 사람도 찾아가기가 쉽다. 동수원 사거리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1번 국도를 따라 서울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팔달구 지동과 우만동을 경계로 한, 못골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 신호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에 자리한다.

 

아마 큰 길에서 20m 정도를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골목길이 4사리가 되는데, 그 한편에 간판이 보인다. 난 매운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 늘 이 집을 소개한다. 그저 보통으로 달라고 해도 혀가 얼얼한데, 정말 매운 맛은 아직 먹어보질 못했다. 그냥 호기로 먹었다가는 경을 칠 정도라니 말이다.

 

 

맛 좋은 식당은 주인이 바뀌어도 맛이 있어

 

환절기에 잃기 쉬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란 생각이다. 예전에도 이 집은 식당이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맛이 있는 식당자리는 주인이 바뀌어도 맛이 있다. 인심 좋은 식장자리는 주인이 바뀌어도 인심이 좋다. 전국을 다니면서 음식 맛을 보고는 하지만, 어느 곳에 가던지 식당조차 자주 바꾸지 않는 성격인지라 맛집 하나는 꼭 기억하고 다닌다.

 

이 맵꼬만 명태찜 집은 지난 번 식당도 음식 맛도 일품이지만, 주인의 심성이 정말 착한 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안에 공사를 한다고 써 붙이더니, 주인까지 바뀌었다. 물론 그 전 식당의 음식과도 달라졌다. 이렇게 맛 좋은 식당에 주변에 있다는 것도, 작은 행복이란 생각이다.

 

 

참 재미있는 식당이네

 

한참 땀을 흘리며 밥을 먹다가 보니, 옆에 문구가 적힌 작은 표지가 보인다. 무엇인가 해서 들여다보았더니 ‘신문고를 울려라’라고 제목을 달고 <칭찬, 개선점, 격려, 충고, 감동 전하고 싶은 말씀을 문자나 이메일로 해주세요>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친절하니 전화번호까지 적어놓았다.

 

그저 맛있는 밥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작은 재미를 주다니. 이 식당 앞으로 자주 이용할 것만 같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원한 ‘맑은 명태탕’도 있으니까.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반계정. 소나무에 둘러싸인 이 정자는, 반계(盤溪) 정상규 선생이 지은 정자라고 전한다. 반계선생은 자신도 생활이 어려웠으나, 남을 돕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남의 어려움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선생이기에, 어려움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정자를 개울 위에 짓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고 한다.

 

장수군의 답사를 하면서 우연히 찾아간 반계정. 반계정은 비지정 문화재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4호인 창원정씨 종가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정자이다. 반계정 주변에는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어 고풍스런 모습이다.

 

 

 

축조한지 100년이 지난 반계정

 

반계정은 1909년에 지어진 정자로 전해진다. 100년이 조금 지난 세월이다. 일각문 앞으로는 밭이 있고, 뒤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꽤 많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만큼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반계정은 몇 년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한다. 담은 기와와 돌, 황토를 섞어 쌓았는데, 정자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이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반계정이 있다. 반계정은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측 편에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마루는 누마루를 깔고 밑으로는 네모난 돌을 주초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반계정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것이 눈에 띤다.

 

 

모서리에 붙은 한 칸의 방

 

우선은 반계정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정면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한데 반해, 뒤편으로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다. 그리고 뒤편 우측으로 방을 몰아서 붙여놓았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측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은 정자의 마루를 접한 부분에는 두 짝 문을 두고, 외부로는 한 짝 문을 옆으로 뉘여 달아냈다.

 

정자의 앞부분은 누마루를 깔고 방의 우측 한 칸에도 마루를 깔았는데, 앞쪽의 누마루보다 약간 층이 지도록 하였다. 계단과 벽면을 뺀 남은 부분에는 모두 난간을 둘러놓았다.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 한 겨울에도 이곳에서 지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계 정상규 선생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도난당한 선생의 일생

 

반계정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알고 싶었으나,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반계정 옆에서 나무를 심고 계시는 분에게 말씀을 드려보았더니, 마침 반계선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저 반계정은 언제 지어졌나요?”

“100년이 조금 지났어요. 정 상자 규자를 쓰시는 어르신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사셨죠.”

정자 주변 경치가 아주 좋아요

예 저 소나무들이 저희가 어릴 적에는 흔들고 놀던 나무였는데, 그동안 저렇게 큰 고목이 되어버렸네요

어르신 춘추가 어떻게 되셨나요? 죄송합니다.”

올해 여든 여섯이 되었네요.”

반계정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반계집이란 선생님의 문집이 세권이 있었는데 도난을 당했어요. 그 책에는 반계정에 대한 내용도 다 들어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죠

 

 

더 이상 어르신께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말씀을 하시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괜히 종가집 핑계를 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알 수 없는 반계선생의 일생이 더욱 가슴 아프다. 뒤돌아보는 반계정 담 너머로 선생의 송서(誦書)가 들리는 듯하다.

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이런 날도 있는가 싶다.

그저 열심히 돌아다닌 것 밖에는 없는데

한 마디로 상복이 터져도 너무 터졌다.

지난 22일 오마이뉴스 명예의 전당 오름기자상에 이어 25일 수원시청 시장실에서 또 다시 상과 다름없는 위촉장을 받았다

수원시에서 운영하는 e수원뉴스 시민기자가 받은 것은 '특별기자'란다

명함까지 받아 든 상복, 올 초부터 무슨 복이라냐 이것이....

수원시장실에서 e수원뉴스 으뜸기자들과 함께 서 있는 온누리 - 으뜸기자는 일년동안 가장 많은 기사를 쓴 기자 중에서 4명을 선정해 주는 상입니다. 제가 받은 상은 특별시민기자고요

 

염태영 수원시장께 특별시민기자 위촉장을 받는 온누리

 

위촉장을 받고 염태영 수원시장님과 기념촬영 한 장

 

 으뜸기자들과 함께 기념사진 한 장

 

어제 밤에 여주로 내려왔습니다. 반가운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를 하느라고요.

얼른 올라가 일을 해야하는데, 이 분들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네요

아직도 어제 겁나게 마신 술이 깨지를 않아 노트북으로 대충 정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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