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 오후 610분에 방송을 시작한 KBS 2TV '해피선데이-12', 시즌2 방송 1주년을 기념하여 시청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 날은 KBS 개국 40주년이 되는 날로, 특집방송으로 치러졌다. 3일 오후 610분에 시작된 '12'에서 멤버들은 화성 서장대에 올라 밤하늘과 수원 야경을 감상했다.

 

김승우, 엄태웅, 성시경, 이수근, 차태현, 김종민, 주원 등 멤버들은 이어 "저희가 방송한지 벌써 1주년이 되어 레이저 쇼를 준비했다"고 말하며, 각자 휴대용 발광도구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고, 제작진은 자막을 통해 "THANK U"라고 시청자들에게 전했다.

 

 서장대에서 휴대용 발광도구로 시즌 2 1주년을 기념해 시청자들에게 감사를 하는 1박 2일 멤버들(1박 2일 방송화면 캡쳐)

 

수원 화성 행궁 앞 비닐하우스 야외 잠자리

 

참 춥다, 그리고 너무 시리다. 입김이 하얗게 서리는 한데 비닐하우스에서 취침이라니. 12일 수원편 둥잔 밑이 어둡다, 33일 오후 610분에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잡았다. 야간에 화성의 가장 높은 서장대로 이동을 한 멤버들은, 서장대에서 수원의 아름다운 아경을 보면서 휴대용 발광도구로 글자를 만들어 시즌 2, 1주년의 감사를 전했다.

 

서장대에서 수원시의 야경을 보고 베이스캠프인 사랑채로 돌아 온 멤버들은, 그 유명한 잠자리 복불복을 시작했다. 이들이 서장대 위에서 바라본 것은 바로 행궁 앞 광장 복판에 마련한, 12일의 잠자리 복불복의 취침장소인 비닐하우스였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닐하우스는 보기에도 춥게만 느껴졌다.

 

야외취침 복불복 잠자리인 화성 행궁 앞 비닐히우스

 

비닐하우스에는 이날 잠자리 복불복에서 야외 취침이 확정된 성시경, 차태현, 이수근의 사진과 함께, ‘연예인이 자고 있어요’, ‘먹을 것을 주지 마세요등의 문구가 적혀 있어, 다음 날 아침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들기도.

 

이날 멤버들이 잠자리 복불복을 하는 모습도 평소와는 남달랐다. 주사위, , 김종민의 레몬먹기 맞추기, 차태용과 이수근의 고음내기 맞추기, 김승우의 바늘에 실궤기 알아맞히기, 그리고 엄태웅의 제기차기 등으로 실내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이 김승우, 김종민, 엄태웅, 주원으로 확정되었다.

 

야외취침을 장소인 비닐하우스로 나온 성시경과 차태현, 이수근은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했다. 밤새 비닐하우스에서 자고 일어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지나가던 20여명의 행인들.

 

생일을 맞이한 김승우와 이수근의 생일잔치도. 야외취침 장소인 비닐하우스안(방송화면 캡쳐) 

 

또 하나의 재미 아침 수라상 복불복

 

아침에 행궁 앞 신풍루에서는 이들의 아침 복불복 미션이 전해졌다. 행궁 안을 돌면서 여러 곳에 분산된 기념 스탬프를, 준비한 종이에 찍어 빙고를 만들라는 미션이었다. 그 중에 재미는 바로 한방이다. 돌아다니다가 숨겨 논 한방 직인에는 바로 <수라상><>의 글자가 있었던 것. 김승우는 용케 한방에 수라장을, 아들에게 전화까지 해서 두 개 중 무엇을 택할까를 알아 본, 12망했어요의 아이콘 차태현은 꽝을 잡았다.

 

남은 멤버들은 행궁 안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면서 스탬프를 찍었다. 다시 찍기도 하고, 엄테웅은 행궁이 아닌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으로 뛰어가기도. 결국 이날 아침 수라상은 김승우, 이수근, 김종민, 주원이 받았고, 남은 차태현과 성시경, 엄태웅은 물림상을 받았다. 물림상이란 임금이 먹고 남은 것을 먹는 것.

 

1박 2일 멤버들이 아침을 맞아 비닐하우스 앞에 자리하고 있다.(위) 지나던 행인들이 몰려들었다(방송화면 캠쳐) 

 

화성열차와 퇴근 복불복

 

아침 임금님 수라상을 물린 멤버들은 팔달산 산책로를 올라 화성열차에 탑승을 하고, 서장대까지 화성을 돌면서 즐거워하기도. 동장대 앞 국궁체험장에서 하차를 한 일행은 다시 한 번 국궁체험에 나섰다. 바로 퇴근복불복을 시작한 것. 과녁에는 멤버들의 이름을 적은 색색의 풍선을 달려있고, 그것을 쏘아 터트리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운전을 해 멤버들을 다 퇴근시켜 주기로.

 

한 사람씩 풍선이 터질 때마다 멤버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결국 이수근의 풍선이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멤버들을 퇴근시켰지만, 과녁판에는 400발이나 되는 화살이 꽂혀 고슴도치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끝난 12등잔 밑이 어둡다수원편이 2주에 걸쳐 방영이 되었다.

 

아침 임금님수라상 복불복에 빙고게임을 한 스탬프지에 멤버들이 사인을 해주고 갔다(복사본) 

 

12일로 인해 몰려 든 인파

 

33일 방송된 해피선데이 12은 지인들과 만남이 있어, 술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곁에 자리한 손님들 중 한 분이 12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12일이 나가고 난 뒤 지난 토요일(32) 손님들이 찾아오셨는데, 강원도, 부산, 목포 등에서 12일을 보고 수원 화성을 돌아보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희 가게는 이제 시작한지 6개월 밖에 안됐는데도 손님들이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왔대요. 손님들이 몰려와 평소보다 많이 팔았죠.”

저희 가게에도 울산에서 올라오셨다고 하시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아왔대요,”

 

12일이라는 대단한 방송프로그램과 함께, 블로그 등과 같은 인터넷 검색의 힘을 알만한 이야기들이다. 어디를 가든지 요즈음 여행객들은 인터넷 검색을 생활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원에는 지난 주말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화성을 걷기 시작했다. 33일 방송이 나가고 난 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 올 것인지. 기대가 된다

지난 2월 24일 오후 6시 10분에 KBS-2TV를 통해 방송이 된, 리얼 버라이어티 ‘1박 2일’의 효과는 얼마나 될 것인가? 그동안 1박 2일이 방송된 곳들을 몇 곳 다녀보았지만, 눈으로 보기에도 그 변화를 실감하고는 했다. 실제로 1박 2일이 지나간 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 수원편인 ‘등잔 밑이 어둡다’가 방송이 나가고 난 후, 1주일이 지난 3월 2일(토) 아침 일찍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과연 1박 2일이 공중파를 통해 방송이 나가고 난 뒤, 그 효과는 얼마나 눈에 띠게 달라진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화성 동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람객 급증


화성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 동북공심돈 위를 보니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심돈 출입구 쪽으로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 평소 주말과는 확연히 다르게 사람들이 많이 화성을 걷고 있다. 남수문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았다. 주말에도 이곳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줄을 이어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낮 시간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과 함께 다시 한 번 회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시작해 지동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 주말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못골 시장을 지나 미나리광시장, 지동시장을 거쳤다. 한 가지 색다른 것은 야채를 파는 장사치들마다 무를 수북이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1박 2일 수원편 전편에서 재래시장에 들어간 성시경과 차태현, 주원이 무를 싸게 사서 가장 무거운 물건을 사온 사람에게 수원왕갈비로 저녁을 먹었는데, 그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쌓여있던 무들이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에는, 거의 다 팔려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실감한 1박 2일 효과

            

남수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오르면서 보니, 확연히 많아진 관람객들을 볼 수가 있다. 적게는 두 사람, 많게는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성안을 걷고 있다. 성을 걸으면 성 밑을 바라보니,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 밖 길을 걷고 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 쪽으로 다가가자, 연신 동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동북공심돈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심돈 밑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으면, 주말과 휴일에는 안전요원이라도 배치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공심돈은 위로 오르기 때문에 안전사고에도 유념을 해야만 할 듯하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1박 2일 방송이 나가고 난 뒤, 그들이 올랐던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이 되는 ‘1박 2일’의 효과가 이 정도 일 줄이야.


“날씨 따듯해지면 또 오자. 내일 저녁에 1박 2일 또 보고”


아이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 온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지나가는 사람들 입에서 ‘1박 2일’이란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가 있다. 그들 모두는 1박 2일을 보고 난 뒤 화성을 찾아 온 것이다. 조금 더 걸어 방화수류정 방향으로 다가섰다. 연신 밀려드는 사람들로 방화수류정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평소에는 한 두 사람 있을 듯 말 듯한 적대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1박 2일에서 멤버들이 이곳에 들어와 홍이포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방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루 종일 화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끝으로 장안문을 거쳐 행궁으로 다가갔다. 마침 오후 3시가 되어 행궁 신풍루 앞에서는 무예 24기 시연이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을철 관광 성수기에나 모일 듯한 인파들이 모여 있다. 화성 관람을 하고 난 후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요즈음은 어디 관광을 가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주변 관광지를 검색하기 때문이다. SNS의 효과를 함께 실감하게 된다.   

 

 

3월 3일(일) 오후 다시 1박 2일 수원편의 후편이 방송이 된다. 과연 그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1박 2일의 효과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1,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수원에 모였다. ‘12로 수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려 수원을 홍보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한 마디로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역시 파워 블로거들이라는 것이 실감나게 만들었다. 결국은 그런 연유로 인해 KBS-2TV 리얼 버라이어티 ‘12이 수원을 오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또 다시 수원으로 모인다. 이번에는 인원이 지난번과 많이 교체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크다. 또 다른 ‘12의 코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그 중에 화성과 무예 24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수원을 상징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대가는 돌아오기 마련

 

31(), 모처럼 맞는 쉬는 날이지만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SNS팀 박사승 팀장과 조남진 주무관, 그리고 본 기자가 10시에 수원시청을 나섰다. 8도 파워 소셜러들이 12로 관람을 할 동선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번 KBS-2TV 리얼 버라이어티 ‘12의 수원편을 유치하는 데는 박사승 SNS팀장의 활약이 대단했다.

 

당시 e홍보팀장인 박사승 팀장은 5일간이나 12일의 작가들과 '새피디(본명 최재형PD)' 등과 함께 수원의 여기저기를 수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촬영 중에도 눈길에 팔달산으로 차가 올라가지 못하자, 이리저리 뛰면서 안전한 길로 인도를 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물론 숙소인 사랑채의 수원문화재단 식구들도 함께 고생을 했지만.

 

그러고 보면 무엇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합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수원을 홍보하기 위해 정책홍보담당관실의 모두가 마음을 더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다른 ‘12동선을 다녀보니

 

첫날의 일정은 화성에서 이루어진다. 316() 오후 1시에 수원시청에 집결한 8도 파워 소셜러들은, 버스로 팔달산 남측에 있는 수원중앙도서관으로 이동. 그곳에서 산길을 오르면서 경기도 문화재 자료인 고인돌군과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떼어 낸 흔적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용도 남쪽 끝에 있는 화양루(서남각루) 밖에서 성 밖을 따라 서장대 쪽으로 걷다가, 관광안내소 앞에서 화성의 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서남암문을 들어서 용도를 따라 화양루까지 갔다가 돌아 나와, 팔달문 방향으로 내려가게 된다.(지난 해 파워 소셜러 화성 답사 때와는 반대편을 걸었다) 중간 화성열차가 다니는 성신사까지 걸어 참례를 한 후, 행궁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 24기를 관람한다.

 

무예 24기 시연을 보고 난 후, 일행은 행궁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는 행궁의 9곳에 마련되어 있는 관람 스탬프를 찍어, 담당자에게 먼저 갖고 오는 2명에게 수원문화재단 라수홍 대표이사가 직접 기념품을 전달하게 된다. 이 또한 지난번과는 달리 관람과 재미를 두 배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했다.

 

 

재래시장과 야경도 일품

 

행궁 미션을 마친 일행은 지동교를 거쳐 재래시장으로 이동을 한다. 이곳에서는 한 시간 정도를 각자가 재래시장의 이모저모를 촬영을 한다. 이번 8도 파워 소셜러들은 여행 전문 블로거들이 대거 참여하여, 질 높은 사진으로 수원을 홍보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지동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에 올라 수원 야경을 다시 한 번 관람한다.

 

일몰과 야경을 관람하고 나면 수원왕갈비로 저녁을 먹게 된다. 그리고 화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의 야경을 구경한 후 서장대에 올라, 수원의 또 다른 야경을 보는 것으로 첫 날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둘째 날은 만석거와 노송지대, 해우재로 이동

 

둘째 날인 17()에는 아침을 먹은 후 만석거로 이동을 한다. 만석거에서는 영화정과 수문을 답사 한 후, 수원미술관에서 차에 승차 노송지대를 거쳐 해우재를 관람한다. 해우재에서는 또 다른 재미를 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래저래 수원은 어딜 가나 볼거리 천지이다. 이렇게 8도의 파워 소셜러들이 수원을 한 번 다녀갈 때마다 수원을 홍보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오게 된다.

 

그저 아침에 내려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수원이 아니라, 오밀조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잔잔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수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12시에 지동시장 순대타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되는 ‘8도 파워 소셜러 수원 팸투어’, 이번에도 기대가 큰 것은 지난 번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꽃샘추위가 몰려와 바람도 불고 기온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318도 파워소셜로 들이 돌아 볼 동선을 따라 걸으면서 생각을 한다. 지금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할 수 있는 SNS, 일시에 많은 시청을 할 수 있는 방송이라는 매체가 대세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역할을 함께 하는 파워 소셜러들의 공존이 정말 필요할 때라는 것을.

한 무예인이 자신이 그동안 연구하고, 직접 시연하던 무예 24기 중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써냈다. 이 책은 288쪽 분량으로 임진왜란기의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특성부터, 19세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쇠퇴기까지를 시대별로 정리를 하였다.

 

책의 저자인 최형국은 실제 조선시대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다. 자신이 연마해 온 무예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온 몸으로 마상무예를 연마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마음 속에 응어리를 풀지 못한 저자는 이 책속에 모든 것을 다 담아냈다.

 

 

특히 본 서의 주제인 마상무예 뿐만 아니라 전통무예 전반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실기사를 바탕으로 한 무예사 연구의 시초를 연 조선시대 군사, 무예 전문가다. 현재 수원 화성행궁에서 매일 시범 공연되고 있는 무예24상설공연(수원문화재단 주관)의 수석단원 및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朝鮮後期 騎兵馬上武藝 硏究>(중앙대학교 2011, 8)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안타까운 무예인의 현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인(武人)’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마치 현재 학계의 흐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에 대한 연구나 군사(軍史)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듯이 국가는 문()과 무()가 균형을 이뤄야만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학문에서도 이러한 문무균형의 원칙은 산산조각 나버린 지 오래고, 안타깝지만 거의 문 중심의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무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연구해서 생기는 조금은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경우 쉽게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기에, 생계유지도 막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임진왜란기부터 19세기까지의 체계적인 마상무예 연구

 

10년 이상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펴내고, 그것을 보완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기까지 오직 무()와 무인(武人), 마상무예에 몰두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최형국 박사는 본 저서에서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실제 무예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이론에 실기를 함께 병행해 역사학으로서의 무예사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가 위기를 겪은 뒤,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무예사적 특성과 이에 따른 전술적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저자는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주변 국가의 군세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왔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중 특수한 병종(兵種)인 기병과 기마무예라는 군세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을 통해, 조선시대의 무예사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또한 당시 전술의 변화와 정치, 사회적인 변화들까지 확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기병에 대한 제도사적 접근의 한계와 연구 시기의 협소성을 뛰어넘어, 기병의 전술사적 연구와 더불어 기병이 훈련했던 마상무예의 실기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조선후기 전반에 걸친 기병의 마상무예 변화와 특성을 살펴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 역력해

 

기마무예는 한 시기를 정점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정조대에는 장용영(壯勇營)을 중심으로 한 기병 강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사도세자가 만든 보병무예 중심의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추가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여 중앙군영과 지방군에 보급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편찬된 병서인 '병학통(兵學通)''이진총방(肄陣總方)' 등에는 기존 병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의 다양한 진법들이 실려 있어 기병전술 강화를 의도했다. 이러한 기병 강화 정책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함께 정조대에 완성된 거··(車騎步) 통합전법에서 기병의 역할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화약무기 연속 사격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양한 전술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불어 기병의 마상무예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마상편곤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기병의 필수무예로 정착되었다. 마상편곤은 적에게 깊숙이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빠르게 적을 타격할 수 있어 기존의 환도나 기창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정비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훈련대장 박종경이 편찬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화약무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변화하는 전술사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병의 핵심 업무가 국왕 원행 호위나 궁궐 숙위 부분으로 한정되었으며, 마상무예의 경우도 기병의 쇠퇴현상에 따라 점차 궁궐 숙위병 위주로 한정되어 훈련되었다. 이러한 기마무예의 쇠퇴는 화약무기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그 실효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도서출판 혜안 펴냄, 지은이 최형국(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288, 26천원, 신국판

판서 김세균(1812~187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익(公翼)이고 호는 만재(晩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헌종 7년인 1841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고동 8년인 1871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후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수원유수가 되었다. 왕명으로 <기년아람>의 속편을 편찬하였으며, 저서에 <완염통고(琬炎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리를 옮기면서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

 

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뒤로 덕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세균 판서고가는, 원래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던 고가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집은 본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현재 집은 사랑채고, 안채는 이전 시 딴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이전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들은 워낙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일반적인 문화재들처럼 한 부분씩 떼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을 전체로 옮기는 기술이 발달이 되었지만, 아마 1983년경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니, 집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도 다 해체해 옮긴 후 다시 조립을 했을 것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사랑채만 남은 김세균 판서고가

 

김세균 판서고가는 몇 번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사람이 없어, 매번 주변을 돌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지 속 시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면 답답하다. 김세균 판서고가 역시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보아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월장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밖에서만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많은 고택을 돌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김세균 판서고가는 사랑채와 광채만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이집은 돌계단을 올라 일각문으로 마련한 대문이 있고, 대문의 우측에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본 광채는 세 칸 정도로 지어졌으며, 두 개의 판자문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앞으로 ㅡ자 형 네 칸으로 되어있고, 뒤로 날개를 붙여 세 칸을 달아내었다. 이 날개채의 끝은 사랑방으로 제사의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한 끝에 놓은 개방된 대청이 특별해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개방된 대청을 한 끝에 놓았다는 것이다. 안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겨우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축대 위에 발끝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안의 사랑채는 그래도 특별함이 있다. 대문간에서 바라다보는 사랑채는 좌측 끝에 툇마루를 더하여 뒤로 길게 대청을 드렸다. 이 대청은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을 내어 개방이 되어 있고, 밖의 벽으로도 전체를 문을 내어 누정과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는 두 칸의 방을 드렸는데, 그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깔았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툇마루에 연결해 판자벽을 달아 마감을 하였다.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은 이곳은,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는지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곳의 뒤편엔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아마 부엌의 용도로 지어진 구조물인 듯하다. 앞으로 보면 방인데, 뒤로 돌아가면 부엌인 이 방은 이 집의 구조가 특이함을 알게 해준다.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사랑채가 안채의 구실에 제몫을 다하는 집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사랑채이면서도 안채의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ㅡ자 형의 공간 네 칸에 두 칸의 방이 있고, 뒤편에 꺾인 부분에도 두 칸의 방을 두어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마 이 집이 원래의 안채와 사랑채를 그대로 다 옮겨왔으면, 지금보다도 더 품위가 있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고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으면 손을 보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고 조금씩 변해가는 고택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난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사고를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김세균 판서고가를 돌아보면서, 툇마루에 놓인 메주뭉치가 보기 좋아 혼자 웃는다. 남들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 다닌 적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만큼 고택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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