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 위에 선다

다행이다 햇살들은 천지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리하여 ‘헛제삿밥’으로 산 자들 제사 지내고

돌아오기 위해 이 길을 간다.

 

어디더라? 여기가

만난 듯한 구름, 저 산꼭대기의 잘생긴 소나무

바람과 함께 산중에 들어

있는 듯 있는 듯 내 돌아갈 근원을 본다.

 

가쁜 호흡 뒤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들이 숨어 있지만

어쩔거나! 이 또렷한 경계(境界)들을

무량수전, 안양루 오르는 계단 가운데 앉아

나 아직 적멸을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오늘은 무애(無碍)

스스로의 빛남

막을 길 없다

 

 

김우영 시인의 ‘부석사 가는 길’이란 시이다. 12월 28일 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소재한 ‘장호원 숯불갈비’라는 식당 안 한편 방안에서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벽에는 ‘제2회 <수원시인상> 시상식 / 수상자 김우영 시인’이란 글귀가 보인다. 이날 모임은 수원시인협회 회원 25명 정도가 모여 송년회 겸으로 마련한 시상식 자리였다.

 

시상식이라고 찾아 간 자리가 식당

 

이날 수상을 한 김우영 시인은 벌써 안지가 20년이 훌쩍 지났다. 한참 동안이나 보지 못하다가 수원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후 조우를 했다. 그리고는 곧잘 함께 어울려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는 한다. 그러다가 시상식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바로 식당이었다. 시인들이라 그런가? 역시 시상식장도 좀 특이하다.

 

 

송년회를 겸했다고 하는데, 식당을 빌려 시상식을 한다는 것은 꽤나 생소하다. 사실 김우영 시인은 고등학생 때 시집을 낼 정도로, ‘시의 신동’이란 칭찬을 들었던 시인이다. 1957년 화성시 봉담 출생으로, 1978년에 원간문학 신인상 시 부분 당선으로 등단을 했다. 그리고는 지역 언론에서 문화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수원사랑의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중부일보의 문화체육부장을 거쳐 늘푸른 수원의 편집주간, 그리고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경기시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수원시 인터넷 홍보지인 ‘e-수원 뉴스’의 편집주간이다. 그동안 수원문학상, 경기문학상, 오늘의 경기시인상, 한하운문학상, 수원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시종일관 잔치집 같은 시상식

 

이 날 시상식은 수원시인협회 임애월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이 되었다. 먼저 임병호 회장의 선정경위 발표 및 인사에 이어, 세종대 석좌교수인 정순영 시인의 축사, 그리고 수상자인 김우영 시인의 약력보고와 시인상 시상식으로 이어졌다.

 

수원시인협회 임병호 회장은 선정경위를 통해 “김우영 시인은 한국문단에서는 물론 수원문학을 위해서도 큰 일을 했다. 김우영 시인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영이 높았지만 잘 나서지를 않는 과묵한 사람이다. 약관에 전국 동인지인 ‘시림(詩林)을 주재한 사실에서도 잘 입증된다. 김우영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했다.

 

시상식을 마친 후 김우영 시인은 수상소감을 “부끄럽다. 창작활동에 소홀한 요즘이라 사양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더는 게으르지 말라고 주는 상이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앞으로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겠다.”고 했다.

 

 

시상식 후에는 시인들의 시낭송까지 곁들여졌다. 식당에서 열리는 시상식도 놀랍지만, 술 한 잔에 취흥에 겨워 시낭송까지 이어지는 시인들의 시상식. 그동안 숱한 시상식을 다녔지만, 이런 시상식은 또 처음이다. 아마도 앞으로 이런 시상식을 볼 기회는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시 한 줄 못 쓰는 위인인지라 그런 자리가 조금은 버겁기 때문이다.

동휘스님의 해피만다라 이야기

 

만다라의 그림을 보면 무엇인가 그 안에 심오한 깨달음이 있는 듯 보인다. 만다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둥근 원을 의미한다. 이 만다라는 진리와 우주를 형상화한 그림을 의미한다. 만다라는 현재 불교미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원 등의 벽에 장식하여 장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만다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나무갤러리에서 1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12월 27일에 찾아간 나무갤러리 전시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휘스님의 ‘부처님이 주신 선물, 불꽃. 옴 해피만다라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명상 뒤에 오는 공허함으로 시작

 

티베트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색을 물들인 모래로 그린다. 정교하게 모래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만다라를 그릴 때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참여를 하여, 3박 4일 이상이 걸려 그려낸다고 한다. 만다라는 예술적 감각과 모래로 그리는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마치 명상과 같은 수행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참여하여 만다라를 그리고 있으며, 그 모래그림을 그리는 동안 명상과 함께 심오한 부처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고도 한다. 초기 불교당시의 만다라는 주로 탑에 조각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기본적으로 법당에 만다라를 그려 수행자들에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뒤늦게 출가한 동휘스님의 만다라

 

이번에 비구니인 동휘스님이 마련한 ‘행복한 대한민국, 옴 해피만다라 전시회’에는 동휘스님과 티벳,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만다라 50여점이 소개되었다. 만다라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우주의 진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로, 동휘스님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만다라 전문화가이다.

 

 

동휘스님은 38세의 나이로 뒤늦게 출가를 했다. 부친이 화가였던 집안 내력 때문인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동휘스님은, 1998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뒤늦게 출가한 후, 출가하기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만다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휘스님은 직접 만다라를 그릴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다라를 모아 강원도 홍천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하는 불사를 펼치고 있기도 하다.

 

'만다라 성지'는 2008년 가톨릭 수도원이 내놓은 땅 1만여 평에 조성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네팔의 스완부와 버드낫은 황량한 땅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해, 국제적 명소로 만들었다. 홍천에 들어설 만다라 성지에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수집하고 기증받은 2천여 점의 만다라를 전시한다는 것.

 

전 세계의 만다라를 만나보다

 

티베트의 만다라가 색조가 어둡다면 동휘스님의 만다라는 맑게 표현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그 만다다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고 밝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전시가 되어있는 만다라는 여러 가지 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가 없다.

 

하지만 굳이 만다라를 통해 심오한 부처의 경지에 달하는 깨달음을 얻지 많아도 좋을 듯하다. 그 만다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을 한창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즉 ‘마음이 원하는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동휘스님의 만나라이기 때문이다.

수원시청 청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의 방송인 iTV 스튜디오에서는, 재미있는 토크 한마당이 펼쳐졌다. 염태영 수원시장과 탤런트인 박철이 ‘엄장토크’라고 하여 키워드를 갖고 한바탕 설전을 벌인 것이다. 거기다가 패널로 참석한 시민들까지 시장과 담이 없는 대화의 창구까지 마련한 자리였다.

 

사회자인 탤런트인 박철이 이날 염태영 시장에게 제시한 키워드는, 나는 유재석이다, 일편단심 짝사랑, 올빼미, 스타병이라는 네 가지였다. 그 네 가지 키워드에 대한 염태영 시장의 설명이 이어지고, 이어서 패널로 참가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직접 질문하고 설명을 듣는 그런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소통의 창구가 된 염장토크

 

한 마디로 염장토크를 보면서 정말로 바람직한 시민들과의 소통이란 생각이다. 물론 시장이란 직을 수행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현장에서 그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시정을 맡아 일을 처리하면서, 느티나무 밑 대화 등 다각도의 모임을 갖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는 했다.

 

사실 염태영 수원시장에 대해 처음에는 환경운동가로서, 또는 시민운동가로서 더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시정을 어떻게 끌어나갈 것인가는 늘 궁금했던 차였다. 그리고 그의 솔직한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 염장토크에서의 속풀이라면 일부나마 그가 시장으로서 직함을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염장토크 키워드’, 염장질은 제대로 한겨?

 

네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가는 염장토크는, 지금까지 지자체의 단체장이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을 탈피했다. 2013년 1월 1일 12시부터 수원 iTV(인터넷 방송)를 통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이 방송을 통해서, 수원시민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염태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염태영 수원시장이 사회자인 박철이 제시한 키워드에 대한 딥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유재석이다!’에 대한 답은 수원의 토박이로써 언제까지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국민 MC라는 유재석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 설령 시장의 임기가 끝나도 언제까지라고 시민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것이다. 5기 행정이 들어서면서 ‘사람’ 중심의 시정을 펼쳐나가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며, 수원 토박이로써 당연히 가져야 할 사고하는 것이다.

 

‘일편단심 짝사랑’ 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내가 서울시를 너무 짝사랑하고 있어 서울시의 것을 베낀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우리 수원의 것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마을만들기 등은 우리가 먼저 시작한 시민들이 직접 참여를 하는 거버넌스 행정이다. 우리는 예산도 시민들이 참여를 해서 책정을 한다. 내가 짝사랑을 하는 것은 오직 수원일 뿐이다.“ 라고.

 

‘올빼미!’ 라는 키워드에 대한 답은 염태영 수원시장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올빼미라는 키워드에 딱 맞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염시장은 “시장이란 자리는 솔직히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3D보다 더해 4D가 적당한 표현이다”라며, ”새벽시간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시민들과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결재시간까지도 전자결재로 처리하기가 일쑤이다.“ 라면서 보고절차도 간소화를 시키겠다는 것.

 

‘스타병!’ 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내가 행사장에 늦게 나타난다고 붙인 것 같은데, 너무 많은 일정을 소화하다가 보니 조금 늦는다. 이해를 해 달라”며 웃음으로 넘기기도. 염시장은 솔직히 자신은 스타가 되고 싶단다. 그것은 남들이 알아주는 스타가 아니라, 시정을 잘 처리하고 시민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선진국형 자자체장인 스타가 되고 싶다는 것.


 

 

시민 패널과의 대화와 빠진 이야기들

 

염태영 수원시장과 사회자인 박철의 토크 한 마당은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우선은  시정을 펼쳐나가는 시장에게 있어 개인적인 것보다는 시정의 이슈를 질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토크의 경우 개인적인 사안도 중요하지만, 제작진에서는 그 전에 수원시의 전반적인 이슈를 검토했더라면, 더 좋은 토크가 되었을 것이란 점이 아쉬움이다.

 

방송사처럼 넓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시청 청사 안에 마련한 좁은 스튜디오 안은 찜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화를 열어가는 열기도 높았지만 좁은 스튜디오에서 에어컨을 작동할 수 없어, 몇 차례나 쉬어가야만 했으니 말이다. 11명의 시민 패널들은 각자 자신이 당면한 사안을 질문하고, 그것을 사회자가 정리를 해 시장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시민 패널들의 질문은 다양했다. ‘취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것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취업준비생 이진원), ’기간제 근로자인데 비정규직 문제의 수원시 해결방안은 무엇인가?‘(수원시 산하기관 근무 정양희), ‘수원은 축구의 메카다. 그런데 요즈음 너무 프로야구 10구단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권선축구연합회장 이상대), ‘수원의 밤길이 무섭다. 해결방법은 없는가?’(회사원 김성경), ‘2013년 9월 한 달, 행궁동 일대에서 ‘생태교통페스티벌’이 열린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든다고 하는데, 주민들의 불편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행궁동 주민 도종호), ’도서관의 증설과 공공청사 한편에 북카페 등을 수용하는 것은 어떤가?‘(독서지도강사 김소라), ’공직에서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실버세대에 대한 복지정책은 어떠한가?‘(송죽동 이주섭)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러한 시민패널 들의 질문에 대해 염태영 수원시장은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꼼꼼히 답변을 했다. 그 중 현실적인 사안으로 중요한 취업문제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답변을 보면

 

취업문제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젊은 졸업자들의 문제이다. 수원시는 직장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행정의 경험을 쌓는 동시에 단기적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1일 32,900원을 지급하지만, 이것도 신청을 하는 대학생들이 너무 많아, 기회가 모두 주어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는 우리경제구조의 양극화문제인데, 우리시는 청년창업지원센타를 통해 창업을 배려하고, 기업유치, 취업박람회 등을 통해 기회의 문을 열어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에 소재한 기업인 삼성전자의 협력회사들이나, SKC, R·D광교테크노벨리, 고색산업단지 등에 양질의 고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답변을 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는 “수원시 공무원 2,500명 중 600명 안팎이 비정규직이다. 2013년부터는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다만 그 조건은 2년 근무자에 한해서 만이다. 현재 산하기관도 검토 중에 있다. 이 부분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돼야 한다. 정원과 직급이 국가권한이어서 지자체의 자율권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토크나 패널들 간의 이야기 속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시 공무원들이 제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킨다고 싫다고 한단다. 아마 다음에 제가 다시 시장 출마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절반 이상이 반대를 할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잘사는 수원, 사람답게 사는 수원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우리 수원의 모든 사람들이 살고 싶은 수원이 된다면, 그것은 결국 당신들의 아이들이 그 행복함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일을 좀 더 하자. 그리고 우리 수원이 전국 청렴도에서 꼴찌였다. 하지만 올 해는 25위로 뛰어 올랐다. 내년에는 상위권으로 도약하자. 그것이 바로 휴면시티 수원, 사람이 반가운 수원이 되는 길이다.” 라고.

 

두 시간 반 동안 진행이 된 ‘염장토크’는 이렇게 끝났다. 패널로 참가한 한 시민은 “시장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수원에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 앞으로도 이런 소통의 창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비가비’란 말이 있다. 비가비란 양반가의 사람으로 소리꾼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 비가비는 우리 창극사를 통 털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가중호걸’이라 불리는 권삼득 명창이다. 권삼득명창은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가 처음으로 생긴 후 정조, 숙종 때 활약을 한 권삼득 명창은 전기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권삼득명창에 판소리 일대기에 기억할만한 소리꾼이다. 그러나 오래전의 명창인지라, 그 명성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몇몇 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 서책에는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권삼득명창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박경리의 『토지』(솔출판사, 1993)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곳에서도 권삼득명창을 책에 기술할 만큼 뛰어난 소리꾼이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소리조를 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를 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른 것도 권삼득명창의 소리가 우렁차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하한담(하은담)과 최선달에게서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소리꾼들은 초기소리를 한 명창들로, 우리 초기 판소리는 장원을 한 사람의 사당에 가서 축원을 하는 <홍패고사>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하한담, 최선달, 우춘대 등 초기명창을 지난 후 가장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도 이런 초기소리를 했을 것이다.

 

 

권삼득명창의 흔적을 찾아가다.

 

완주군 용진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를 따라 소양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마을이 보인다. 마을 길 안내판에는 <권삼득명창 출생지>란 작은 안내판에 하나 부착이 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권삼득명창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가 하나 서 있고, 그 안에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 뒤편으로는 ‘충현사’라는 제각이 보인다.

 

철책으로 담장을 친 안에 서 있는 작은 비 한 기. 비에는 <권삼득 선생 출생지>라고 머리말을 쓰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 명창이신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1771년(영조 47년) 안동 권씨 래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41년(헌종 7년)에 별세하였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하여 삼득(三得)이라 불리웠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 출신 광대로 창에 천부적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숲속에서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판소리사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전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된 문화의 거개이다. 하지만 그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가감이 되기도 한다. 하기에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복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콩 서 말을 지고 용소로 떠나다.

 

권삼득명창은 집에서 광대 짓을 한다고 쫓겨난 후,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향한다. 조선창극사에서 정노식은 초기명창의 이름을 들면서 하한담과 최선달, 우춘대 등에 이어 ‘고송염모’라는 네 명을 지칭한다. 고수관과 송흥록, 염계달과 모흥갑이다.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을 이 네 명의 이름밖에 놓은 것이다. 권삼득명창이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내려가 득음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면,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남원 지리산 자락 춘향이 묘가 자리한 맞은편, 용소폭포에서 득음을 위한 소리공부에 전념을 한 것 같다. 이곳에도 <국창 권삼득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뒤편으로는 육모정이 있고, 앞으로는 용소 푸른 물이 바위를 미끄러져 깊은 소 안으로 자맥질을 한다.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이곳에 온 권삼득명창은 소리 한 바탕이 끝날 때마다 콩 한 알을 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구룡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공부에 전념한 권삼득명창. 콩 서 말이 모두 용소로 들어가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대 명창으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오늘 이 두 곳의 소리꾼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바로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요즘처럼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진정한 소리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리는 전주한지문화축제에 가면, 우리 전통의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더욱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 한옥마을이기 때문인가 외국인들도 상당수 보인다. 많은 행사가 있는 축제 초에는 사람들도 붐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없을 듯 해, 일부러 편안한 날로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옥마을을 다녀간다. 하지만 이 전주한지문화축제가 아니라고 해도, 한옥마을을 다니다가 보면 한지로 만든 많은 제품들을 늘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문화축제 때는 더 많은 한지 제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한지 축제 때에 찾아가고는 한다.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벽지는 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다양한 한지 상품 선보여

 

오목대 방향에서 축제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사람들이 열을 지어 축제장을 향하고 있다. 이것저것을 보고 다녀보니 우리한지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빠져들게 된다. 전주한지문화축제는 전주한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전주한지의 산업화 및 관광객 유입효과를 통한 지역경제에 기여를 하고자 하는데 있다.

 

경기전 옆에는 꽃밭과 어우러진 한지로 만든 장승이 서 있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이 모든 것들이 한지를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많은 한지상품 들을 전시해 놓은 곳을 돌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아름다운 화조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꽃과 새, 나비 등이 그려진 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벽지란다.

 

 

<민속한지벽지>라는 우리한지로 제작한 상품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지닥나무와 실물 낙옆, 단풍잎, 녹차임 등을 이용해 제작한다는 민속한지벽지. 그리고 찢어지지 않는 창호지와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한지 썬팅지 등. 그야말로 우리한지에 우리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민속한지벽지는 1933년 초대 오동섭의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한 한지장판지 생산이, 2대 오원석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현재 3대 오기연까지, 대를 이어 한지 장판과 한지 벽지 등의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대째 한지벽지 생산을 하는 오기연 대표 대담

 

- 3대째 한지제품 생산을 하셨다는데?

예. 완주 송광사 앞에서 가내공업으로 장판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오게 되었죠. 아직도 장판을 생산하는 공장은 송광사 앞에 있습니다.

 

- 이렇게 한지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셨을 텐데?

그랬죠. 벽지를 개발하는 데만 17년이 걸렸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이렇게 우리한지로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 민속한지벽지의 좋은 점이 무엇이 있나요?

요즈음은 많은 분들이 건강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우리 민속한지벽지는 친환경적인 상품입니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친환경건자재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요즈음 화학재료를 사용한 벽지 등에서도 발암물질이 있지 않는냐고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저희는 순수한 한지로 제작한 상품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전혀 안하셔도 됩니다.

 

 

-한지벽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우선은 질기고 수명이 오래간다는 것이죠. 그리고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 습도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또한 탈취기능이 있어 실내공기를 쾌적하게 만들어 줍니다. 항균력도 갖고 있어 아토피 알레르기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적외선 방사율까지 있습니다.

 

- 가격은 일반 벽지에 비해서 많이 비쌀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벽지 값은 일반벽지보다 20 ~ 30% 정도 고가지만, 수명이 길어서 오히려 한지벽지를 사용하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 앞으로도 많은 제품을 개발하실 것인지?

그래야죠. 벽지 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만 3년 이상이 걸립니다. 하지만 우리 한지제품을 더 많이 개발해 세계화를 시키는 것이 저희 바람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건강에 좋은 벽지를 만드는 것이죠.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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