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만들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을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질을 높이고, 서로가 소통하는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데 있다. 수원은 이제 마을만들기를 시작한 지 1년 반 남짓 됐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중에 괄목한 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마을만들기 추진단의 적극적인 지원과 모든 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 사고 때문이었다. 

 

그간 수원시 마을만들기 추진단에서 추진해왔던 수원시 좋은 마을만들기 사업은, 2010년 하반기부터 준비되기 시작했다. 2011년 상반기 까지 조례 제정과 마을르네상스센터 개소, 마을만들기 지원을 위한 행정협의체 운영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서 마을만들기 활동가 지원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으로 지난해 55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하고, 올해에는 공모지원 사업 80개를 비롯해 수시사업을 합해 모두 134개 사업이 수원시 곳곳에서 의욕적으로 펼쳐졌다

 

 

"소통으로 공동체 회복, 그게 목적"

 

12월 7일 오후, 수원시 청사 안에 있는 마을만들기추진단 사무실에서 민완식 추진단장을 만났다. 올 한 해 마을만들기 사업에 대한 총체적 평가가 어떤지 궁금해서였다.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스스로 마을환경을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데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주민들 간의 소통으로 인해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죠."

 

민완식 단장은 그동안 공직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을 통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흔히 마을만들기 사업을 벽화조성이나 텃밭조성으로 국한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

 

 

벽화조성·텃밭조성으로 시작하는 마을만들기의 내일

 

"벽화조성이나 텃밭조성은 마을만들기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고, 나아가서 마을기업 등으로 연계돼 수입 창출까지 하자는 것이죠. 그렇게 수입원이 생기면 그것을 마을을 위해 사용하거나,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민완식 단장의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는 단순히 마을만 잘살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마을 단위의 규모로 개선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나아가 수원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다는 것.

 

"지난해부터 시작한 마을만들기 사업은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을만들기 사업이 어느 기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성과는 만족할 만합니다."     

 

 

무형의 자산 생겨나는 마을만들기 사업

 

올해 25억 원이라는 예산을 들여 조성한 마을만들기 사업은 어떻게 보면 그 몇 배의 성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바람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갖고 사업 실적을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을만들기 사업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사업 외적인 요소들이 더 많습니다. 그것은 마을만들기를 추진하는 마을의 주민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벽화를 그리고 텃밭을 조성하면서 주민들의 사고가 바뀌고, 그분들이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됐다는 것이죠. 그것은 가치로 평가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달라지고 있는 마을들을 볼 때마다, 더 많은 마을이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한다.

 

"2013년에는 더 많은 사업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수원 39개 동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정밀 분석해 그 마을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올 12월에 공모지원 사업을 신청받아 내년 초에 선정해 3월부터는 추진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또한 공모지원 사업 외에도 매달 수시로 신청을 받아 추진하려 합니다. 저희는 모든 신청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것이 마을만들기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2012년에도 마을 자체에서 조금씩 수익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2013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마을에서 수익사업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수익을 창출하게 되면 앞으로도 지속적인 마을의 변화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마을들이 적은 것이지만 수익 창출이 되면 그것을 다시 나누고는 합니다. 얻어진 수익으로 한 달에 한 번 반찬나눔을 갖기도 하고, 이웃들과 함께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인다는 것이죠. 그것이 곧 우리가 추구하는 소통과 공동체의 창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민완식 단장은 2013년에는 SNS 등을 통해 더 많은 교류와 홍보로 모든 마을이 함께 잘 살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 민완식 단장의 바람처럼 2013년에는 수원의 마을마다 주민들이 서로 소통이 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3년 5월 말레이시아 총회에서 취임

 

11월 19일 수원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세계화장실협회 이사회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정을 했다. 비공개로 속행된 19일 오후의 이사회에서는 신임 이사들의 선임(한국 4명, 외국 2명)과 함께 차기 회장 추천, 이사회 내용 보고, 그 동안의 추진 사업 보고, 네팔 화장실 보급사업 승인, 2013년 총회 준비 논의, 그 동안의 프로젝트 소개, 기술위원회 활동 토의 등으로 이어졌다.

 

화장실 문화 개선 운동의 발원지인 수원에서 개최된 2012년 세계화장실협회 이사회에는, 미국, 러시아, 호주, 몽골, 네팔,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 11개국에서 27명이 참석했다.

 

 

세계화장실협회는 화장실 시설의 보급 및 개선, 화장실 관련 기술 및 세계기술 표준 개발·보급, 세계의 화장실 문화 및 시설 실태조사, 홍수 등 세계적 재난 발생 지역에 화장실을 설치하고, 물 절약 및 수질오염 방지를 위한 노력과 수준 높은 화장실 보급 등의 사업을 수행하는 국제기구이다.

 

환송만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 승낙연설

 

19일 오후 5시 30분부터 1시간 동언 비공개로 펼쳐진 세계화장실협회 제5차 정기 이사회를 통해 경제적인 어려움, 불결한 환경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인류의 고통을 덜어 주고, 불결한 화장실 환경을 개선하는 등을 의이했으며, 세계화장실협회 차기 총회와 엑스포는 2013년 5월 경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했다.

 

 

이사회의 일정을 마치고 난 뒤 가진 환송만찬 장에서 조용이 현 회장은 이제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다고 하면서, 염태영 시장에게 차기 회장자리를 넘길 수 있어 고맙다고 인사말을 했다.

 

축사에 나선 차기 세계화장실협회 회장에 추대된 염태영 수원시장은 수원을 찾아 준 세계화장실협회 이사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세계화장실협회를 잉태시킨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뜻을 이어갈 수 있게 되어 책임이 무겁다고 했다. 또한 조용희 현 회장의 뒤를 이어 세계화장실협회의 무궁한 발전에 기여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해우재문화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밝혀

 

축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세계화장실협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이 30년간이나 살고 있던 집을 변기모양으로 짓고 이름을 ‘해우재’라고 붙였으며, 전 심 시장의 유족들이 그 집을 수원시에 기증을 했고, 수원시는 그 뜻을 받들어 리모댈링을 거쳐 ‘수원시 화장실문화 전시관 해우재’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해우재를 문화공원으로 조성을 하겠다고 했다. 또한 심 전 시장의 뜻을 이어 수원을 화장실 문화의 메카로 발전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화장실을 개선하는데도 앞장 설 것을 피력했다. 환송만찬 장에는 심 전 시장의 부인인 선정선(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 회장) 여사와 아들인 심영찬 씨(세계화장실협회 신임 이사)도 참석을 해 박수를 받았다.

 

축사를 마치고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한국의 전통춤인 진도북춤과 장고춤, 소고춤 등을 감상하는 이사진들은, 연신 동영상으로 춤을 촬영하느라 부산한 모습을 보이기도. 제5회 세계화장실협회 정기이사회는 환송만찬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전국공무원노조 수원지부장 김해영의 인생이야기

 

초등학교 6학년생이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남학생이, 두 동생을 이끌고 사회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나이 33살에 수원시청에 기능직 공무원이 되었다. 그 뒤 18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중, 고 검정고시를 보아 대학을 들어갔다. 그리고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한 마디로 놀라울 뿐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사과정도 4곳의 학교를 동시에 다녔다. 하지만 두 곳은 중간에 포기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시 수원대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국공무원노조 김해영(남, 51세) 수원지부장의 이야기이다.

 

 

 

“어려서 뛰어 든 사회생활, 별거 다 해보았네요.”

 

1962년 충남 연기군 조치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산골로 이사를 했다. 그 산골에서 시작된 김해영지부장의 인생이야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의 이야기의 시작은, 갑자기 부친이 작고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재가를 하셨는데, 계부 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4남매 중에 한 명만 남기고 동생들과 함께 집을 나오게 되었죠. 가장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계부가 중국집 주방장이라,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중국집에서 배달부터 시작을 했죠.”

 

그렇게 시작한 사회생활이다. 서울 홍대 앞에서 중국집에서의 생활서부터 시작해, 수원과 화성 등지에서 전기공사와 가스배달업, 전자제품 판매원과 모터 수리, 대형트럭 운전사, 동해시와 수원에서의 공인중개사, 그리고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전기 기사직으로 1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원시의 기능직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자격증 몇 장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았다. 하기야 20여 년 전에는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우대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낯 뜨겁습니다. 한 마디로 배우지 못했기에, 제 스스로를 몰랐던 것이죠. 이제 배우고 나니 그 때 제가 얼마나 유치하고 남들에게 비웃음을 샀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배움으로의 끝없는 도전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가 공부를 해 온 과정이 ‘미쳤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검정고시로 중, 고 과정을 마치고 대학을 들어갔다. 직업을 갖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주변의 동료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마칠 수 있었단다.

 

“제가 있는 곳이 가정집의 물을 관리해 주는 곳이었어요. 3층까지는 물이 올라갈 수 있도록 수압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산 중턱에 큰 저장고가 있어, 한 사람이 12시간씩 2교대로 24시간 관리를 합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저는 야간만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대학을 마칠 수가 있었고요. 다 주변의 직장선배님들과 동료 분들의 도움이 컸죠.”

 

낮에는 학업에 정진하고 밤에는 근무를 했다.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배움으로의 끊임없는 열망이 지탱을 하게 했다.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공부까지 한다는 것이 힘도 들었지만, 그래도 박사과정까지 마칠 수가 있었단다.

 

김해영지부장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유교철학을 공부해 3년 조기졸업을 했다. 또한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을 했다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에서 리더십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문화정보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노조활동은 천명(天命)이다.

 

수원시에 재직을 하면서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정발전연구단과 시청 공무원 중 1%에 해당하는 24명이 꾸민 혁신선도팀에서도 활동을 했다.

 

“제가 노조활동을 한 것은 2004년부터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죠. 그리고 2009년부터 지부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노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저를 있게 해 준 수원시에 무엇인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이유입니다. 저희 공무원노조 수원시 지부는 현재 회원이 1,700명 정도입니다. 2,580명 정도의 전 공무원가운데 노조에 가입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이 1,900명 정도로 보면, 90%에 가까운 시 공무원이 노조원인 셈이죠. 인구 100만을 넘은 지방자치단체 중에서는 가장 높은 비율이죠.”

 

 

김해영지부장은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투쟁을 일삼지 않는다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노조원 조끼를 입었다고 해서 일이 해결이 된다면, 머리띠를 몇 개라도 두르겠다고. 먼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연적으로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희 노조가 주장하는 것이 ‘공직사회의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입니다. 사실 노조라는 곳이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입니다. 시정은 노조가 관여를 할 수 있지만, 노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부패하기가 좋은 조직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기 그렇게 썩어 있으면서 부정부패척결을 하자고 한다면, 그 누가 따라줄 것입니까? 저희는 노조원들이 내는 회비도 상당합니다. 그것을 회원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죠. 그래서 체육대회도 열고, 건강검진도 2년에 한 번씩 받던 것을 매년 받기로 했습니다. 또 어려움에 처한 회원이 있으면 도와도 주고, 일 년에 두 차례 장학금도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용’이란 소리도 듣는다고 한다. 그럴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것.

 

“공무원이 매달 받는 급료를 ‘봉급’이라고 합니다. 시민들을 섬기라는 뜻이죠. 시민들의 삶을 질을 높여주라고 주는 돈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3~4천만 원씩 받으면서 일을 하지 않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래서 일벌백계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노조원인데 그런 말을 했다고 어용이라는 겁니다. 노조라고 해서 무조건 시정에 반발하는 것은 안 되죠. 봉급을 받으면 그만큼 시민들을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죠. 지금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될 때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힘들게 내는 세금입니다.”

 

11월 1일 오후 5시, 수원시청 청사 한편에 자리한 노조사무실에서 만난 김해영지부장.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우리 수원시의 인구가 114만입니다. 그런데 공무원이 2,580명 정도입니다. 우리시와 비슷한 딴 지자체에 비해 적은 숫자죠. 공무원의 수를 늘려야죠. 그래야 격무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건강해야 시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수원시는 인구는 많은데 구가 4개뿐입니다. 이제 분구를 해서 5개 정도의 구를 가져야죠. 집행부를 도와 이것을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연신 드나들고 있습니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아마 그런 열정이 있어서 많은 일을 감당해 내는가 보다. 앞으로 더 많은 공부를 하겠다는 김해영지부장.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며 웃어댄다. 대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그의 책 <변화와 희망을 위한 철학에세이>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올해 51세 지천명에 이르렀다는.

 

‘천명(天命)이 있긴 있나보다. 하고자 한 게 아닌데 하고 있고, 이르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르러 있는 것을 보면, 묘하게도 맞아 떨어지는 얘기로 들린다. 10년 주기설. 사람마다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는, 대개 10년 주기로 찾아온다고 한다. 아전인수인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경우를 반추해보면 그리 부정할 일도 아닌 듯해 보인다.’

지난 10월 24일(수), 수원시 팔달구 구천동 수원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달마선원에서는 태평소와 아쟁 등의 소리가 울린다. 2층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굿판이 벌어졌다. 요즈음에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에서 굿을 하는 것을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찾아든 굿판에 참 볼것이 많다.

 

청주시 흥덕구에서 왔다는 굿을 의뢰한 제가집 사람들은 굿을 하면서 무격이 내리는 공수에 귀를 기울이며 연신 “고맙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한다. 굿판에서는 모든 것이 직설적이다. “내가 다 알아서 도와주마.”라는 무격의 공수는 굿을 하는 내내 계속된다. 아마도 그런 말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 바로 굿판인 듯하다.

 

 

‘입살이 보살’이라는데

 

이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이 4명, 악사가 3명, 그리고 제가집 사람들과 구경을 하는 사람들을 합해 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중에서 달마선원의 원장이라는 김종해(남)와 팔달구 장안동 315-1에 거주하는 황인애(여, 30세) 두 사람이 주관을 하는 굿판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신아버지와 신딸이다.

 

무격들은 자신의 내림굿을 주관한 사람을 신아버지 혹은 신어머니라고 부른다. 내림을 받은 사람을 딸 혹은 아들로 칭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령 안에서 부모의 관계로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나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내림을 하고, 받은 관계로만 형성이 되기 때문이다.

 

 

굿판에서 제가집의 조상이 실려 연신 ‘도와주마’라고 공수를 하던 김종해는 그 도와주마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입살이 보살’이라고 흔히 말을 합니다. 사람의 입에는 살이 있다는 것이죠. 거기다가 신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 입에서 나오는 공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죠. 굿판에서 무당이 도와주마를 계속하다가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굿판 내내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죠.”

 

 

 

이 무녀 사람께나 홀리겠소.

 

신딸인 황인애가 신복을 갈아입고 굿판으로 들어섰다. 처음에 전국 명산에 있는 산신을 초대한다는 산바라기 굿을 시작한 것이다. 홍천익에 빛갓을 쓴 무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거기다가 굿판에 선 무녀가 엷은 미소까지 띤다. 구경을 하던 한 분이 작에 말을 한다.

 

“저 무녀 참 남자께나 홀리겠네요. 저렇게 웃으면서 굿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황인애는 24살부터 신병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회사에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작은 점포 하나를 차리려고 계획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다리가 심하게 아파 걷기조차 힘들었다는 것. 다리가 아파 병원을 찾았더니,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그런데 수술을 해도 정상적은 사람들처럼 걸을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을 통해 신아버지인 김종해를 찾게 되었고, 거기서 들은 이야기가 ‘무병이니 수술을 하지 않아도 고칠 수 있다. 다만 네가 결정을 할 일이니 시간을 줄 테니 결정을 하라고 했다는 것.’ 그런데 점점 심해오는 통증과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고, 날마다 이상한 꿈과 소리가 들려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매초마다 심하게 몸이 떨려 막 울기도 했어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모아 둔 재물도 다 날아가 버리고요. 그래서 결국 내림을 받았는데, 그렇게 아팠던 다리가 언제 아팠는지 모를 정도로 싹 가시는 거예요”

 

 

이제 내림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굿을 하다니. 굿은 그렇게 쉽게 배울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5년 이상은 지나야 굿을 배워 한 거리라도 굿판에서 할 수가 있는데, 애동(내린지 얼마나 안되는 무당을 지칭하는 말)이 굿판에서 그렇게 춤을 추고 소리를 하면서 공수까지 주다니.

 

밤늦게까지 이어진 굿에서 몇 거리를 맡아 한 무녀 황인애. 굿을 연구한다고 30여년 세월을 굿판을 쫓아다닌 내 눈에도 굿을 하는 것이 예쁘게 보일 정도였으니, 타고난 팔자라는 생각이다. 굿판을 나서는데 ‘다음에 굿 할 때는 더 잘 배워서 보여드릴게요.’라고 인사를 한다. 하기야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언젠가는 더 잘 배운 굿을 하는 황인애를 굿판서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에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에서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년.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 강월헌 강월헌의 현판

  
▲ 강월헌 판소리 중고제라는 한 류파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명창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 강월헌 명창 염계달이 밤마다 소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강월헌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에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작은 이 정자 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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