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스님인 남원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이 작은 사고로 인해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계신대도 불구하고 남원 선원사의 스님짜장 봉사는 그칠 줄을 모른다. 이미 약속을 해 놓은 일정이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허전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운천스님 스스로가 세워놓은 약속이기도 하다.

 

제가 없다고 해서 봉사를 그칠 수는 없으니까요. 다행히 그동안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짜장 봉사를 함께해 온 많은 분들이 모두 일급 요리사들이 되어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만은 항상 스님짜장을 봉사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가끔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운천스님의 봉사에 대한 마음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약속이란 지킬 때 아름다운 것

 

127()에는 익산시 여산에 소재한 부사관학교에서 300명의 생도들에게 스님짜장을 급식하기로 약속을 한 날이다. 그 전날 경기도 일대의 봉사를 마치고 26일에 남원으로 내려가 준비를 하고, 일요일에 부사관학교 봉사를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선원사 봉사단과 지구촌공생회(이사장 월주 대종사) 회원들이 함께 참여를 해 봉사자가 1명 정도가 부산관학교 스님짜장 봉사를 도왔다는 것. 한 달에 한 번 생도들에게 스님짜장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새해 첫 달부터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스님짜장을 먹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생도들인데, 제가 못 간다고 해서 약송을 어기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다행히 지구촌공생회에서 봉사를 함께 해 주겠다고 해서 퍽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희 선원사 봉사단이야 이미 짜장을 만드는 대는 도사들이니까요

 

참 병원에 있으면서도 짜장 봉사 걱정을 하는 이 스님, 어떻게 말릴 수가 있을까 싶다. 운천스님은 아무리 하찮은 약속이라도 한번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기틀이라는 것.

 

 

300명이 500인 분을 해치워

 

그날 봉사를 함께하지 못해 미안스럽다는 스님은 짜장봉사를 마친 봉사단들과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을 묻는다. 짜장은 맛이 있었는지, 혹 부족한 것은 없었는지 등.

 

눈이 내리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선원사 봉사단으로 참여를 한 성민정(, 45. 남원시 금동 휴먼시아)은 그날 분위기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날 저희가 여산 부산관학교 생도 300명에게 스님짜장을 만들어 주기로 했는데, 500인분이 모자랐어요. 봉사자들은 스님짜장 구경도 못하고 국수를 삶아먹었어요.”

 

이럴 정도였는데 자신이 다쳤다고 해서 약속을 어겼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다는 것이다. 병원에 입원을 해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스님짜장을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짜장스님. 막말로 개콘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이건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한다.”

 


 

지난 밤에 잔뜩 흐리더니, 아침부터 겨을비가 추적거리기 시작한다. 어제 밤늦게 여주장을 보러나갔다. 장을 본 것은 아니고,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라는 재래시장에 설치한 루미나리에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갖가지 색을 자랑하는 입구부터 눈이 현란하다. 요즈음 재래시장이 변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장에서 보이는 정감이 사라지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비가 온다고 밥 안 먹간디?

 

어제 미리 연락을 취해놓고 장의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여주장으로 나갔다. '여주상권 살리기 추진위원회' 박흥수(남, 65세) 씨와 김동호씨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겨을비는 차다. 이 비가 오는데도 천막을 치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우는 사람들. 5일장이야 5일에 한번, 5일과 10일, 15일과 20일, 25일과 30일, 한 달에 여섯 번이 열리는 장이다.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5일에 한 번씩 장으로 오니, 오늘 일당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는데도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한분. 작은 파라솔 하나를 의지해 나물과 곡물 몇 가지를 놓고 자리를 지키신다.

 

 

"할머니 비가 오는데 이렇게 앉아계세요"

"장날인데 어쩌겠어. 비가 와도 기다려봐야지"

"물건은 좀 파셨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도통 손님이 없네."

"오늘 같은 날은 손님도 없을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감기 걸리시겠네요."

"뭔 소리여. 비 온다고 밥 안 먹간디?"

 

할머니는 오늘 장에 나온 차비라도 끝내 벌어 가셔야 한단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하다. 겨울비는 추적거리는데 오한이 오시는지, 몸을 으스스 떨고 계시다. 어머니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경기도에서 두 번째인 여주장 많이 변했죠'

 

약속한 장소에 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박흥수씨가 들어온다. 그동안 여주장을 취재하러 많은 언론사 사람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점포위주의 장사를 하는 문화의 거리에 여주 5일장이 선 모습.

 

"경기도에서는 성남 모란장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여주장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그 세가 많이 축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장입니다. 근동에서는 가장 크죠. 40 ~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주 인구가 별 차이가 없으니, 그 전 생각을 하면 정말 큰 장이죠"

 

여주장은 두 곳으로 나눠진다. 한 곳은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로 명명된 재래장으로, 여주농협부터 순화당 사거리까지 320m 구역이다. 이곳이 바로 밤이 되면 루미나리에 불빛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점포가 있는 분들이 '여주 상권살리기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장의 발전을 도모한다. 그리고 여주읍 하리 쪽의 5일장이 서는 곳에는 또 다른 상인연합회가 관리를 한다. 문화의 거리 상인연합회는 현재 회원이 150명 정도다.  

 

"저 어릴 적에는 아버님이 이곳에서 시계도 고치시고, 심지어는 지퍼라이터도 고쳤어요. 원래 장을 돌아다니시면서 물건을 파는 장꾼이었는데, 이 자리에 좌판을 벌이시고 물건을 팔고 수리도 하셨죠. 그 가게를 제가 물려받은 겁니다."

 

김동호씨의 말이다. 그 말에 이어 박흥수씨도 자신의 가게도 어릴 적에 보면 작은 포목 몇 필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2대에 걸쳐 여주장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박흥수씨는 장을 지키는 풍속도 바뀌어 가고 있다면서.

 

여주장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박흥수씨(좌)와 김동호씨(우)

 

"지금은 장 사람들이 선진화가 되어 가는가 봐요. 전에는 연세가 드셔도 점포를 지키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연세가 좀 드시면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시고는 장에 나오시지를 않아요.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이 자꾸만 보이시질 않으니 그도 한 걱정입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50년 전만 해도 장작도 팔고 물장수도 있던 여주장인데

 

여주장이 얼마나 변했느냐고 물었다. 50년 전만 해도 여주 장에는 나무를 해 갖고 와 파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몇 십 미터씩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장작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사서 떼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물장수가 있었는데, 여주 남한강 물을 그대로 떠다가 팔았다는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보는 남한강물을 어찌 그대로 떠다가 식용수로 사용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강물이 상당히 맑았어요. 그래서 그냥 강물을 떠다가 그 물로 밥도 하고 그랬죠. 그때 물장수들이 있었는데, 그저 밥만 먹여주면 물은 얼마든지 길어왔으니까요. 밥이라도 먹는 것이 그 당시에는 최고였죠."

 

박흥수씨는 옛 생각이 나는지 눈을 지그시 감는다. 하기야 내가 살던 서울에서도 어린 시절 개울가를 흐르는 물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놀았으니, 이곳이야 얼마나 맑았을까? 이야기를 끝내고 나무를 팔던 거리를 알려주겠다고 일어선다. 비는 아직도 추적거리고 온다.

 

 여주장에 비가온다. 상인들은 파라솔과 천막, 비닐 등으로 비를 피한다. 그래도 5일장은 파장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장작을 팔던 거리. 이 거리 수십미터에 나무장사들이 줄을 지었었다


"지금은 노점상을 하시는 분들 중에도 상당한 부자들이 많아요. 저분들 중에는 중국에 공장을 갖고 계신 분도 있고요. 장이 많이 변했죠. 다양한 물건을 접할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빈대떡 같은 먹거리가 많았는데. 심지어는 도롱뇽 알도 팔았어요. 눈이 좋아지는 약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고 만다. 하지만 옛 정취를 찾겠다고 발전 없는 장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변해버린 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풍물과 함께 깊은 정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는 추적거리고 오는데,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5일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 파장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단다.

삼인삼색, 최연숙, 최자영, 윤주은의 시화전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세 명의 미인과 마주 앉았다. 삼인삼색의 시인들이다. 시인이라는 분들이 워낙 개성이 독특하다보니, 조금은 버거울 듯도 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마음 단단히 먹고 부딪혀 보는 수밖에. 119일 저녁에 전시장에서 만난 최연숙(, 56, 수원시 영화동), 최자영(51, , 수원시 정자동), 윤주은(, 41세 수원시 세류동) 세 명의 여류시인이다.

 

이들은 각각 독특한 스타일의 시를 쓴다. 최연숙 시인은 원래 수필로 등단을 했. 최연숙은 2005년에, 촤자영은 2004년에, 그리고 막내인 윤주은은 2002년에 등단을 했다. 나이순이 아닌 역순으로 등단을 한 셈이다. 이들이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3-2 ‘그림이 있는 공간 크로키에서 삼인삼색의 시화전을 연 것이다.

 

좌로부터 윤주은, 최자영, 최연숙 시인

 

시로 안주를 삼아 술을 마신다고

 

참 세상은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 한 시인이 이야기를 한다. 술안주 중에 가장 좋은 안주는 바로 ()’라는 것이다. 시를 쓰시는 분들이야 그런 말에 대뜸 환한 미소를 짓겠지만,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야 겨우 그 말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아직도 그 깊은 속내는 알 수가 없다. 그저 같은 시를 쓰는 분들끼리, 타인의 시를 갖고 시평을 하면서 술을 마신다고 설명을 한다. 그런 내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런 말귀라도 얻어 들었으니, 그보다 큰 공부는 없을 듯하다. 이 세 시인들을 동시에 함께 취재를 한다는 것이 참 힘도 든다. 우선은 시를 모르는 인사니 말이다.

 

시화전이 열리고 있는 그림이 있는 공간 크로키 

 

시는 나를 내려놓는 것’, 최연숙 시인

 

끊임없이 내려앉는 느티나무 잎 사이로

닭 울음소리 길게 퍼지고 순한 개가

기다림도 없이 앉아있다

간간이 서너 집씩 모여 살아도 산중에는

골마다 이름이 있어

느티나무골

쌀밥보다 비싼 보리밥을 먹겠다고

여자랑 남자랑 느티나무 밑에서

낙엽을 맞으며 나물보리밥 비비는데

오는 사람마다 밥상 차려주는 시인은

떨어지는 느티 잎으로 시인은

가을 해를 비빈다(이하 하략)

 

밥차리미 시인의 가을이란 최연숙 시인의 시이다. 최연숙 시인은 시가 무엇이냐고 묻자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가슴에 차고 넘치는 것을 시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수필은 소재를 찾아가지만, 시는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삶을 살다가 보면 말을 하라고 시가 시킨다는 것. 그것을 글자로 풀어 놓은 것이 바로 시라고 설명을 한다.

 

시는 삶의 이야기라는 최자영 시인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는

시작되기 전에 끝났고

끝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사람들 귀를 기울이고

당신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다가

이야기 속으로 떠난 사람

특별한 이야기 찾아 헤매는

당신의 이야기가 되어

옛날부터 이야기가 있었다.

 

최자영 시인의 이야기1’이라는 시이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이야기인줄도 모르겠다. 시인은 시는 삶의 이야기라고 표현을 했다. 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글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 최자영 시인은 스스로 어려움이 닥치면 시를 써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점점 어렵다.

 

시는 삶의 기록이자 치유의 방법이라는 윤주은 시인

 

한 때 면도칼 좀 씹었다는 그녀와의

키스는 아슬아슬하다

혀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아직도 비처 빠지지 않은 채

깊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면도칼 조각을 찾으며

아니 피하며

그녀의 혀 위를 산책한다.(하략)

 

윤주은 시인의 입안의 칼이라는 시 한 부분이다.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등단은 가장 먼저였다. 윤주은 시인은 시가 무엇이냐고 묻자, ‘시는 삶의 기록이자 치유의 방법이라고 대답을 한다. 참 어렵다. 시는 쓰는 시인과 보는 독자가 모두 마음의 아픔을 치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풀이- 문을 연 것이 시작이고 문을 닫는 시간이 끝이었다 

 

한 달간 준비한 시화전

 

삼인삼색(三人三色), 참 난해하다.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과 대답이 서로 선문답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닮았다. 세 여인 모두가 시인이고 시를 쓰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시를 사랑하기에 시를 쓰고,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런 마음속에 돌아다니던 글자들이 조합이 되어, 아름다운 시 한편으로 태어난단다.

 

시는 아픔을 치유를 합니다. 시를 쓴다고 하면서 나와 남을 치유할 수 없으면 시인이 아닙니다.” 당당한 말에 수긍을 한다. 그래서 나는 자책한다. 시인이 못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 달간 준비하여 마련했다는 시화전. 크로키를 찾아가 시인들과 시를 논해보고, 시 한 수로 안주로 삼아 날밤을 새워봄은 어떨지.

한방 기능성 수제비누를 만드는 김종해 대표

 

참 그동안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몇 번을 실패를 거듭했고, 길에다가 뿌린 돈도 엄청 납니다. 아마 몇 억은 족히 될 것만 같아요.”

 

수원시 팔달구 구천동 5-6번지. 아래층은 수원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들려보았거나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고기 집이다. 그 이층에 달마선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 바로 김종해 대표가 신비화라는 기능성 한방 미레랄 수제비누를 생산하고 있는 곳이다.

 

 

한창 비누를 포장하고 라벨을 붙이고 있는 김종해 대표는, 이 비누는 기계를 사용할 수가 없어 일일이 손으로 만들고 포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꼼꼼히 만들어진다는 신비화는 2012216일자로 특허 제10-1119706호로 특허를 득했다. 그 발명의 명칭에는 복합 기능성 천연 미네랄 한방비부 및 그 제조방법이라고 명기가 되어있다.

 

아이 때문에 만들게 된 비누, 신비화

 

제가 비누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만 내 아이가 너무 아토피가 심해 그것을 치료하려고 이것저것 아이에게 좋다는 것을 찾다가 보니, 이렇게 한반 기능성 비누를 만들게 된 것이죠. 실패도 무지 했습니다. 처음에 비누를 만들어 대학마다 찾아다니면서 나누어 주었죠. 그랬더니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 비누를 사용하고 얼굴에 무엇이 생겼다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버린 것도 수없이 많고요.”

 

그렇게 자신이 직접 사용을 해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써 보라고 권유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약초를 사용해보고 싶어서 강원도 속초에 있는 약초꾼에게 부탁해 약초를 사용해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는 형님이 약초를 제대로 배우려면 강원도에 와서 한 달을 살라는 거예요. 무작정 산으로 따라 다니면서 약초를 캐면, 그것을 이겨서 제 몸에 발라보고는 했죠. 그러다가 벌겋게 부어오르기도 하고요. 한 일 년 넘게 그렇게 약초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비누로 인정을 받으려면 순 비누분이 틀 성형의 경우에는 93 이하, 기계성형의 경우에는 93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신비화는 30 정도 밖에는 비누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다. 한국생활환경시험연구원에서 분석한 시험성적서에 따르면, 순비누분 30.2%에 유리알칼리는 전혀 검출이 되지 않고 있다. 일반 비누의 경우 3 이하여야만 한다.

 

저는 아이에게 정말 못된 짓을 한 애비죠. 아토피를 고치겠다고 아이에게 정말 온갖 것을 다 발라보았으니까요. 지금은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래서 신비화라고 비누 이름을 지었죠.”

 

 

 

온갖 고통으로 인해 자살까지 생각해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신용장을 위조한 한국인과 중국인이 중국에 비누를 팔아주겠다고 해서 컨테이너로 한 가득 비누를 선적했는데,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돈으로 환산을 하면 수십억이 될 분량이죠.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쫄딱 망했습니다. 거기다가 대기업에서는 자신들이 생산을 맡아서 해주겠다고 특허권까지 달라는 거예요. 비누를 만들면서 정말로 수없이 많은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용케 넘기고는 했습니다. 이제는 안전하게 비누를 생산할 수가 있게 되었죠.”

 

 

아직도 큰돈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비누를 사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토피와 비듬, 무좀 등이 나아졌다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만든 비누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우리 신비화는 엄밀히 따지면 비누라기보다는 기능성 한방제품입니다. 40~50가지에 달하는 약초와 복합 미네랄 광물인 신비토를 섞어서 제조를 하죠. 이 비누는 여자들의 마사지 비누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효험을 보았다고 주문을 해오시고는 하죠. 가격이 조금 비싼 것이 흠이지만, 따로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피부가 깨끗해지기 때문에, 화장품 값이 들어가지 않으니 비싼 것이 아니란 생각입니다

 

복합미네랄 광물인 신비토

 

김종해 대표가 그동안 수없이 실패를 한 것은 약초가 강했기 때문이란다. 그 약초의 강함을 중화시킨 것이 바로 신비토라는 광물이다. 신비토는 33~ 5억 만년으로 추정되는 화산의 고열에 의해 생성된 광물질들의 복합체로, 우리나라 특정지역에만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신비토는 아토피 피부질환으로 인한 가려움증과 미백에 효과가 있다는 것.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가 빚진 것을 갚아야죠. 올 해는 아마 꽤 좋은 일들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기능선 한방비누의 효과를 아시는 분들이 대량으로 납품을 할 곳을 찾았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가격의 얼마정도를 불우한 이들을 위해 사용을 하려고 합니다.”

 

아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만들어 졌다는 기능성 비누. 숱한 고생을 하면서 좋은 비누를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는 김종해 대표가, 잔뜩 쌓인 비누를 보여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판매를 하지 않았다는 비누들이다. 그 가격만 해도 수억은 될 것이라고.

 

우리 이 한방비누는 전혀 오염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경경영시스템인증서도 받았죠.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한방으로 된 미네랄 비누는 저희가 최초로 생산을 했을 겁니다. 앞으로 값싸고 더 기능이 좋은 비누를 생산해야죠.”

 

(문의) 031-248-2040 / 010-9080-9100

섬 한 끝이 나를 불러

다시 돌아와 선

애월리 바닷가

 

不感

마른 생각 하나

솔숲에 묻는다.

 

꼭 손바닥만 하던

나의 열일곱,

시간은 늘

위태로운 몸짓으로

바다의 둥지 속으로 풀려가고

 

해풍에 절은 기다림이

점박이 나리꽃으로 붉던 날

억새꽃 마른 꽃대로

일어서던 섬이여(하략)

 

 

임애월의 시집 <정박 혹은 출항>에 실린 다시 애월리에서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2013년 새해 들어 첫 만남을 가진 시인 임애월(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석천리 거주, , 54). 그녀를 만난 곳은 허름한 수원천변의 한 선술집이다. 그런 곳을 마다않고 선뜻 자리를 함께 해준 임애월 시인의 본명은 홍성열(洪性烈)이다.

 

제가 필명을 임애월(林涯月)이라고 사용하면서,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숲과 물가 그리고 달, 그 세 가지를 아우르는 이름이거든요. 제주를 그리는 애월이란 호를 많은 분들이 시용하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필명으로 사용을 하서 정말 죄스럽기도 하고요

 

책 읽기를 좋아했던 섬소녀

 

시인 임애월은 제주 출신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5년 정도가 되었다. 정식으로 등단을 하기도 전에, 그 이전부터 벌써 문인지에 시가 실릴 정도였다. 그만큼 차곡차곡 쌓아왔던 어릴 적 책읽기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보다.

 

기자님은 어릴 때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살던 곳은 어릴 적 교과서 외는 책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책을 읽는 것이 행복해 오빠들이 만화책을 빌려오면, 그것을 보고 자려고 밤늦게까지 졸린 눈을 부비며 기다리고는 했죠. 그래도 정말 재미있는 책은 국어 교과서였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오빠가 중학교를 다녀서 오빠 국어책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죠. 오빠가 고등학생일 때는 제가 중학생인데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고는 했어요.”

 

어릴 적부터 책읽기가 좋았다는 섬 소녀 임애월은 그렇게 글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한 후 서울을 거쳐 수원으로 화서 정착을 했다. 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수원문화원(당시 심재덕 원장)에서 백일장이 있다고 주변에서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벌써 20년이나 지났네요. 수원에서 하는 백일장은 초, , , 일반으로 나뉘어졌는데, 당시 일반부는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참가를 했어요. 거기서 운 좋게 시 부분 장원을 한 것이죠. 그 뒤 임병호 선생님께서 하시는 문학 강의 등을 듣게 된 것이 본격적으로 시를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등단은 1999년에 했는데, 그 이전인 1998년에 경기시학에 글이 실리고는 했어요.”

 

시인이 되어 정말 행복하다

 

임애월 시인은 감성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 시상(詩想)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주저없이 여행을 떠난다고. 그곳에서 만난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쎄요, 사람들은 흔히 시인을 영감설과 장인설로 나누고는 하는데, 저는 영감설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지시에 의해서 80% 이상의 시를 쓰고 있으니까요. 시는 억지로는 되지 않잖아요. 오히려 억지로 글을 쓰려고 하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듯도 하고요. 그저 어느 순간 떠오르는 시어를 적어갈 때가 가장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듯해요

 

 

그저 막걸리 한 잔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즐겁다. 시를 쓰면서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은 직업을 가지면 정년이라는 것의 올무에 갇히게 되죠. 하지만 시인은 그런 것이 없어요. 저는 시인이 되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해요. 물론 시를 쓴다는 것이 생활에 수단은 되지 않겠지만,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죠. 시는 자신과의 대화라고 하잖아요. 이 다음에 더 나이가 먹어도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는 것이죠.”

 

표정조차도 정말 행복해 보인다. 그 동안 <정박 혹은 출항><어떤 혹성을 위하여> 등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 시를 쓰면서도 지역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임애월 시인은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와 수원시인협회 이사, 국제 PEN 한국본부 경기자역위원회 사무국장, 유네스코 경기도협회 이사, 기전문화연구회 연구위원 등을 역임하고 있다.

 

수원문학상과 경기문학인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임애월 시인. 시인이어서인가? 마주 앉아 있으니 시인의 고향 제주 바닷가의 한적한 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반쯤 버리고 나니

바다가 보였다

남양만의 밀물이

가슴 속으로 흘러왔다.

 

임애월 시인이 살고 있는 화성시 우정읍 석천리를 그린 시이다. 늘 그렇게 자연과 대화를 하고 사는 임애월 시인. 언젠가는 그녀를 졸라대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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