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손태연 시집 내 칩은 두 개를 받아들다

 

나는 쇼윈도우에 걸린 야한 레이스 속옷을 보면

몸이 부풀어 오른다

 

와이프는 늙어가는 볼륨없는 몸매

지하철 내 앞에서 등 돌리고 선 미니스커트

희고 긴 다리를 보면

출근가방을 껴안고 몸이 부풀어 오른다

어느새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

 

봄볕에 돋보기를 닦고 나온 길 위로

여름 가을 겨울이 순식간에 스러지고

부숴진 길을 따라 걸으며

, 벌써 낙엽인가

음, 벌써 눈인가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소주를 마시며

음 벌써 21세긴가

 

지그재그 걸으면 핸드폰을 여니

당신 지금 몇 신지 알어? 인생 왜 그렇게 살어어~”

하이톤의 와이프 닥닥 긁는 소리

 

~ 자기야 멋쩌어어~”

주점에서 애교 떠는 아가씨에게 팁을 주고

나는 그 말을 산다.

 

, 가물가물한 길이여

볼륨없던 무대여

그러나 무대 위로

아가씨들이 춤을 춘다

빵빵한 몸매

빨간 브래지어

빨간 끈 팬티

 

내 몸은 다시 부풀어 오른다

 

시인 손태연의 시집
<내 칩은 두 개>에 실린 빨간 팬티만 보면 나는이라는 시입니다. 조금은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이런 시를 쓰는, 시인 손태연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쯤 되었나 봅니다. 수인사에서 나는 밤에 출근하는 여자예요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패션디스플레이어인 손태연 시인은, 백화점의 영업이 끝난 다음에 디스플레이를 하기 때문이죠.

 

손태연 시인은 이 시를 중년 남성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직장의 후배들,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는 상사들, 그리고 날마다 남들은 출세를 하는데, 너는 왜?’라고 욱박지르는 마누라. 명퇴를 하고 어깨를 처트린 남자들. 세상에 그런 이 시대의 수많은 남자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손태연이라는 시인에 대해서는 전 잘 모릅니다. 그저 모임에서 보았을 뿐이고, 술 몇 잔 함께 마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마이블로그에 올라오는 글과 그림, 그리고 수도 없이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서 제 스스로 조금씩 손가락을 꼽아볼 뿐입니다.

 

손태연 시인의 시집 <내 칩은 두 개>는 모두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 가시로 짠 시간, 2부 그가 들고 온 밤, 3부 고장 난 채널, 4부 낮은 지붕들입니다. 그런데 시집을 찬찬히 읽다가 보면 착각을 하게 됩니다. 흡사 네 사람의 시인이 글을 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이 시인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손태연 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도대체 얼마나 아픔이 있기에, 혹은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느꼈기에, 이런 시가 나올까 하고요. 하지만 이런 느낌을 저 혼자 갖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시집 뒷면에 보이는 김주대 시인의 평을 보면 공감이 됩니다. 괜히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제자 주절거리는 것이 실례인 듯해, 김주대 시인의 평으로 글을 접습니다.

 

그의 시는 아프고 깊다.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읽어야 할 시다. 읽으면 손끝이 아려온다. “여러 날 여러 밤/ 가시로 만든 시간을짜고 있는 시인의 밤은 또 얼마나 멀고 캄캄한지. 그의 시는 몸에서 왈칵왈칵 쏟아지는 눈물이다. 그러나 삶에 지쳐 쓰러진 약자들을 부여안고 불의를 향해 칼을 든 시들에서는 이 땅의 강인한 어머니를 볼 수도 있으니 그의 눈물은 생명의 뜨거운 태아들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천상 여자이면서 한 사람의 좋은 시인임이 분명하다. -김주대(시인)

 

내 칩은 두 개 손태연 시집

화남의 시집 041

2013216일 초판 1쇄 펴냄

9000

 

“제가 어릴 때 너무 고생을 하고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저희 4남매를 놓아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죠. 저는 13살부터 쟁기질을 하면서, 어린 동생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아마 그 때 제가 고생을 심하게 한 것이 늘 마음이 아파, 주변에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면 모두 자식같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가봅니다”

 

수원시청 옆 견인차보관소 담장 밑에서 24년 째 구두를 닦고 있는 한금정(남, 58세)씨. (사)수원시 자립청년회 총회장 직을 맡고 있다. 남을 돕는 것이 즐거워 ‘내일을 여는 멋진여성 경기협회 수원시지회’ 후원회장을 겸임하면서. 한금정씨는 구두를 닦는다. 요 며칠 문이 닫혀있다 했더니 몸살, 감기로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천성이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해

 

“저희 어릴 적에는 정말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개울물을 마시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고구마 한 개를 깎아먹고 하루를 보내고는 했죠. 어머니께서 장애인이셨는데도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해, 저도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배운 듯합니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즐거워하는 한금정씨는 천성이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만 같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인 옛 말일 뿐이다. 요즈음은 자신이 많이 갖고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려운데도 작은 것이나마 남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훈훈한 것은 아닐까?

 

“저희 협회 회원이 한 110명 정도 됩니다. 그 중에 봉사를 하는 회원들은 90명 정도가 되죠. 다들 어렵게 살지만 그래도 남을 돕는다고 하면 모두가 앞장을 섭니다. 아마도 자신이 어렵기 때문에, 남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많은 도움을

 

한금정 회장은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회원들이 정성을 모아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많은 돈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도움을 받는 청소년들은 곧게 자라고 있다는 것.

 

“25명에게 한 달에 5만원씩 통장에 넣어줍니다. 그 돈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쌀밥에 고깃국은 먹지 못해도 굶주리지는 않죠. 아이들이 살기가 힘들면 탈선을 하고 나쁜 길로 들어 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희가 도움을 주는 아이들은 모두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그 아이들에게 정말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지난 해 가을에도 회원들이 봉사를 하고 모은 돈 2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올 5월 중에도 회원들을 모아 봉사를 할 예정이라고. 회원들이 내는 회비에 여유가 좀 생기면 300만원 정도를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으로 쾌척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어렵지만 남을 돕는 일은 즐거워

 

“저도 아이가 넷입니다. 위로 아들이 셋이고, 밑으로 늦둥이인 딸이 있죠. 아이 넷을 키우기도 힘이 들지만 어린 노숙자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 10년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27살이 되었는데, 따로 나가서 살고 있죠. 아직 식을 올려주지 못해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절 때가 되면 꼭 찾아오곤 합니다.”

 

아마 자신이 조금 더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키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회원들이 모아 준 성금을 갖고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20만원씩을 장학금으로 준 것이 벌써 3회째라고 하는 한금정씨.

 

“사람이 올려다만 보고 살 수는 없잖습니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베풀면 그만큼 채워진다는 것이죠. 아마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인가는 모르지만, 베풀면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세상 순리인 듯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봉사를 하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한금정씨. 두 평 남짓한 영업장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 듯.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며 봉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앉으면 빠듯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 무예인이 자신이 그동안 연구하고, 직접 시연하던 무예 24기 중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써냈다. 이 책은 288쪽 분량으로 임진왜란기의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특성부터, 19세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쇠퇴기까지를 시대별로 정리를 하였다.

 

책의 저자인 최형국은 실제 조선시대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다. 자신이 연마해 온 무예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온 몸으로 마상무예를 연마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마음 속에 응어리를 풀지 못한 저자는 이 책속에 모든 것을 다 담아냈다.

 

 

특히 본 서의 주제인 마상무예 뿐만 아니라 전통무예 전반을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실기사를 바탕으로 한 무예사 연구의 시초를 연 조선시대 군사, 무예 전문가다. 현재 수원 화성행궁에서 매일 시범 공연되고 있는 무예24상설공연(수원문화재단 주관)의 수석단원 및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인 <朝鮮後期 騎兵馬上武藝 硏究>(중앙대학교 2011, 8)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안타까운 무예인의 현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무인(武人)’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부족한 실정이다. 마치 현재 학계의 흐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에 대한 연구나 군사(軍史)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듯이 국가는 문()과 무()가 균형을 이뤄야만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이라는 학문에서도 이러한 문무균형의 원칙은 산산조각 나버린 지 오래고, 안타깝지만 거의 문 중심의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무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연구해서 생기는 조금은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할 경우 쉽게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하기에, 생계유지도 막막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임진왜란기부터 19세기까지의 체계적인 마상무예 연구

 

10년 이상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펴내고, 그것을 보완해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기까지 오직 무()와 무인(武人), 마상무예에 몰두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최형국 박사는 본 저서에서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실제 무예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이론에 실기를 함께 병행해 역사학으로서의 무예사에 보다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국가 위기를 겪은 뒤,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무예사적 특성과 이에 따른 전술적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저자는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주변 국가의 군세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왔고,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고 본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중 특수한 병종(兵種)인 기병과 기마무예라는 군세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을 통해, 조선시대의 무예사를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또한 당시 전술의 변화와 정치, 사회적인 변화들까지 확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기존의 기병에 대한 제도사적 접근의 한계와 연구 시기의 협소성을 뛰어넘어, 기병의 전술사적 연구와 더불어 기병이 훈련했던 마상무예의 실기를 수련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조선후기 전반에 걸친 기병의 마상무예 변화와 특성을 살펴본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 역력해

 

기마무예는 한 시기를 정점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정조대에는 장용영(壯勇營)을 중심으로 한 기병 강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사도세자가 만든 보병무예 중심의 '무예신보(武藝新譜)'에 마상무예 여섯 가지를 추가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간행하여 중앙군영과 지방군에 보급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편찬된 병서인 '병학통(兵學通)''이진총방(肄陣總方)' 등에는 기존 병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의 다양한 진법들이 실려 있어 기병전술 강화를 의도했다. 이러한 기병 강화 정책은 화약무기의 발달과 함께 정조대에 완성된 거··(車騎步) 통합전법에서 기병의 역할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화약무기 연속 사격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양한 전술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더불어 기병의 마상무예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마상편곤이 무과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기병의 필수무예로 정착되었다. 마상편곤은 적에게 깊숙이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빠르게 적을 타격할 수 있어 기존의 환도나 기창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의 정비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쇠퇴하였다. 훈련대장 박종경이 편찬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화약무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의 변화하는 전술사적 특징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기병의 핵심 업무가 국왕 원행 호위나 궁궐 숙위 부분으로 한정되었으며, 마상무예의 경우도 기병의 쇠퇴현상에 따라 점차 궁궐 숙위병 위주로 한정되어 훈련되었다. 이러한 기마무예의 쇠퇴는 화약무기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그 실효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도서출판 혜안 펴냄, 지은이 최형국(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288, 26천원, 신국판

그 집

뒤뜰에는 상사화가 피곤했지.

여인네 입가

감추어진 미소처럼

늘어섰던 찔레나무들 사이에서.

 

그 날

달빛은 죽음과 흡사했지

덧문을 열고 내다보던 그의 얼굴위로

하얗게 드리워지던 달빛

장독대 뚜껑 위에 몰래 올라앉은 거미줄조차

필사적으로 헐떡였지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무덤 위

나비만 가끔 기웃거리는

그 집

 

 

최자영시인(, 51. 정자동 거주)의 시 나비의 흔적이다. 214일 수원시청 옆 작은 커피숍에서 만난 최자영시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동안이다. 그리고 아직도 호기심 많은 소녀와 같은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써 온 일기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늘 일기를 써 왔죠. 젊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20대에는 시를 써 노트 한 권을 꽉 채웠는데 그것을 잃었어요. 그 노트가 있었다면 꽤 많은 시를 갖고 있을 텐데요

 

최자영시인은 지금도 갖고 있는 시로, 한 권에 70편 정도의 시가 필요하다면 두 권 정도의 시집을 낼 수 있다고 한다. 2004년에 한국문인회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을 했으니, 올 해로 10년이 되었다. 시의 소재를 어떻게 찾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보고 느끼는 것이 소재가 된다고 한다.

 

저는 남의 손을 보기를 참 좋아해요. 이야기를 할 때 상대방의 손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거든요. 보고 느끼는 것, 사물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오는 느낌,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그림자 등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어요. 순간의 어떤 영감에 의해서 글을 쓰게 되죠.”

 

나를 위해 시를 쓰지만 독자의 느낌은 달라

 

최자영시인은 본인을 위해서 시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독자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전혀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오히려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시를 썼는데, 그 시를 읽는 독자는 슬프다고 할 때도 있죠. 아마 시라는 것의 양면성일 수도 있는 듯해요. 그렇게 독자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때면,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나의 내적 사고를 갖고 시를 쓰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 같아요. 사람마다 느낌은 다른 것이니까요

 

밖은 안개가 그득하다.

안개 주의보가 부슬부슬 내린다.

 

안개를 조심할 것

안개를 뛰어 넘어 다닐 것

절대로 헤매지 말 것

헤매다가 멈추지 말고

멈추어서 서성거리지 말 것

서성이다가 부딪혀도 아는 척 말 것

혹시라도 그저 지나치기

눈물겹게 쓸쓸해도

그리워하지 말 것

 

안개 주의보.

 

안개 속에서라는 최자영시인의 시이다. 조금은 슬픈 듯한 느낌이다. 그저 안개를 보고 지은 시 하나가 괜히 사람을 시큰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제 시가 조금은 슬프다고 해요. 아마 제가 안고 있는 슬픔 때문인가 봐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어느 분이 찾아왔는데, 제 시를 읽고 고마워서 인사를 하러 왔다고 해요. 제 시를 읽으면서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복받쳤는데, 나중에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수그러들었데요. 그래서 고맙다고요. 시도 슬픔을 치유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죠.”

 

자신은 슬픔을 표현했는데, 어느 독자는 그 시에서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함부로 쓸 수는 없다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해

 

현재 최자영시인은 수원시인협회 사무국장의 소임을 맡아보고 있다. 그동안 그런 직책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그저 시만 썼지 그런 소임을 맡아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소임을 맡고 보니까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제 나름대로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낯 선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거든요.”

 

대화를 하면서도 연신 질문을 한다.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보면 주객이 전도가 된 느낌이다. 그런 것을 재미있어 하는 최자영시인. 심성이 맑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앞으로도 좋은 시를 많이 써 달라고 부탁을 한다. 올 해는 시집 한 권을 내고 싶다는 최자영시인. 남들에게 많이 읽히는 시집이기를 바란다는 말에 기대를 한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 최형국박사를 만나다.

 

연구소 안을 들어가니 온통 검과 창, 등패, 곤방, 월도 등으로 벽을 도배를 했다. 이 정도로 많은 창검이라면 무예 24기 박물관 하나를 차려도 남을 듯하다. 거기다가 중국 청시대의 말안장까지 볼 수가 있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이자 역사학박사인 최형국박사(, 38. 무예 20)의 무예 연습실이다. 7년 전에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421-12에 소재한 한국전통무예연구소. 25일 오후에 연구소를 찾아가 최형국 소장을 만났다. 크지 않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지만, 검을 손에 들면 일당백의 무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최형국 소장은 화성 행궁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에서도 만날 수도 있다.

 

 

몸이 아파서 시작한 무예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공부를 하다가 보니 운동량이 부족했나봅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도, 물리치료 외에는 딴 방법이 없었어요. 운동을 많이 하라는 의사의 권유로 무예를 시작했죠. 그러다가 보니 이제는 무예가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몸이 아파서 시작한 무예는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무예동아리를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24기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원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도 오직 무예에만 열중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역사학박사 학위를 무예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을 했습니다. ‘조선후기 기병의 마상무예연구라는 논제로요. 아마 제 인생에 있어서 무예 24기와 저를 떼어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최형국 소장은 늘 우리 전통무예 24기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항상 마음 아픈 것이 일본은 중, 고교 과목에 활쏘기와 검술 등이 정식교과목으로 채택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아파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 25 한국동란 이후 미 군정체제로 들어가면서 우리나라의 체육이 서구화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운동이 필요한 것이죠. 예를 들어 격구나 장치기, 검술 등이 교과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들의 체질에 맞는 운동이죠. 전국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수원만이라도 무예 24기를 교과목으로 채택을 해야 합니다. 수원은 딴 곳과는 달리 과거 정조대왕 때 이곳에서 장용영 병사들의 신체단련이 바로 무예 24기였기 때문이죠.”

 

입시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무예는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

 

최형국 소장은 입시생들에게 무예를 권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도 무예를 시작하면서 집중력이 생겼기 때문에 입시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

 

무예를 하다가 보면 남들보다 집중력이 뛰어납니다. 입시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집중력이죠. 저는 입시생을 둔 학부모님들께 우리 전통무예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무예 24기는 우리들의 몸을 만들고,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우리들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 최형국 소장. 인생 자체가 자신과 무예24기와 떼어놓고 말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가늠이 된다. 최형국 소장은 지난 해 12<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라는 책자를 송일훈(용인대 교수), 김산(전북대)과 함께 공저로 출간을 했다.

 

이 책은 누군가 반드시 써야 할 책입니다. 수원에서 이 책을 냈다면 더 바람직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책을 낼 수가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그 동안 각자가 썼던 논문 등을 수정, 정리를 했기 때문에, 이 책을 내기까지는 아마 1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듯합니다.”

 

 

무예24기 시범단 시립화 되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무예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괜찮을까 의문이 생긴다. 살아가는 데 부족함은 없느냐고 물었다.

 

제일 걱정은 바로 생계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날을 생각하면 저절로 움츠려듭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죠. 과연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무예24기 시범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시범단 모두가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저희들의 바람은 그래도 수원을 대표하는 것이 화성이고, 그 화성은 장용영 병사들이 수호하던 곳이라고 한다면, 무예 24기 역시 화성의 상징입니다. 시립화시켜서 무예 24기가 온전히 수원에서 전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최형국 소장은 수원은 딴 지자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화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조물이지만, 실제로 그 화성에서 나라를 위해 싸움을 한 것은 장용영 병사들이고, 그 병사들이 익힌 것이 무예 24기였기 때문에 화성과 무예 24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 그래서 무예 24기 시범단을 시립화시키고, 전수관과 공연장 등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무예 24기는 수원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관광상품이 됩니다. 단순히 화성 행궁 앞에서 시범만 보일 것이 아니라, 전수관과 상설 공연장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라도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오면 공연장에 들려 무예 24기 시범을 볼 수 있고, 전수관에서는 시민들에게 무예 24기를 전수시켜 그들 중에서 시범단원을 보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예에 대한 걱정뿐이다. 요즈음처럼 험한 세상에 무예 24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호신술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린 딸을 데리러 간다고 연구소를 나서는 최형국 소장의 어깨가 오늘따라 무거워 보인다. 눈발이 날리는 오후, 그저 아무런 걱정 없이 무예에만 열중할 수 있는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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