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은 대한국이요 경기도는 삼십칠관 마련하여

광화는 일품이요 광주는 이품

수원은 정삼품이요 안산은 군수수령 내명은 부사또라

 

10월 8일 오후 7시, 오산시 마등산 자락에 자리한 역말굿당 한 편에서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장단을 치면서 부정무가를 부르고 있다. 경기도당굿 중, 굿을 시작하기 전에 거리부정에서 부르는 무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 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굿이다. 도당굿은 매년 또는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 초나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현재의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나,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일씩 거행이 되던 경기도당굿

 

대개 마을의 도당굿은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에 끝이 난다.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부지역에서는 3일간이나 굿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굿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당굿을 영위하는 무격들은 집안으로 대를 이어 기능을 연마하고, 음악과 무용에 뛰어난 세습무들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남자무당으로, 줄을 타면서 재담을 늘어놓거나 재주를 보이면서 굿을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예전에는 도당굿판에는 기생들의 소리와 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기, 예능적으로 뛰어난 도당굿의 제차

 

경기도당굿은 굿을 하기 전날 당주 집에서 벌이는 ‘당주굿’으로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을 친다. 요즈음에는 대개 강신무인 여무들이 주로 굿을 하기 때문에, 거리부정도 여무들이 많이 맡아서 하는 편이다.

 

굿당에 도착하면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를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을 벌일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가리 앞으로 가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되돌아오는 ‘도당모시기’,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굿당에서 군웅마나님께 대취타연주를 올리는 ‘장문잡기’ 등으로 순서가 진행이 된다.

 

그런 다음으로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알아보는 ‘시루말’을 한다. 시루말은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 가로 확인한다. 이어서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과 도당조상, 본향조상을 모셔서 집안의 평안과 자손번창을 축원하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경기도당굿에서만 볼 수 있는 화랭이와 무녀가 함께 군웅상을 마주하고 진행하는 쌍군웅춤인 ‘군웅굿’, 날이 밝아 도당신을 도당으로 다시 좌정시키고 돌아오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화랭이가 놀며 동네축원과 영산수비를 풀어주는 ‘중굿’,에 이어, 굿판에 따라든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은 끝난다.

 

 

 

 

오산은 경기도당굿의 남다른 지역

 

경기도당굿은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산과 경기도당굿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것은 오산 부산리(현 부산동)에 재인청 3대 대도방의 가문인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대를 이어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오산 부산동에는 도당굿을 펼치던 당집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용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마등산 역말 굿당이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경기도당굿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여, 57세)은

 

“그동안 경기도당굿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굿거리 제차임에도 불구하고, 전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까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당굿을 전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죠. 3년 전부터 1기생 17명을 데리고 시작한 도당굿의 전수가, 올해로 3기생을 맞았습니다.”

 

 

 

 

일일이 소리를 하고 장단을 치는 법 등을 알려주는 승경숙은, 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에게서 춤과 소리를, 전수조교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방돌근 선생에게서는 장단 등을 학습했다.

 

“오산은 도당굿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란 생각입니다. 3대 째 재인청의 도대방들이 직접 도당굿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제가 배운 그대로 많은 전수자들에게 전승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도당굿이 옛 모습대로 활성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죠.”

 

열심을 내어 도당굿의 소리와 춤을 배우고 있는 전수생들. 언젠가는 저들이 도당굿의 굿판에 서서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당굿 제차를 해낼 것이다. 그래서 오산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인가 보다.

10월 10일 오후, 서장대에 올랐다. 늘 돌아보는 화성이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화성 때문에 어쩌면 수원을 잊지 못하는가 보다. 서장대에서 화서문을 돌아 돌아오는 길에, 장안동 화서문로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항상 보는 느끼는 것이지만 유난히 신령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은 골목이다.

 

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령을 모시고 남을 위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지나는 길이다. 무속에 대한 책을 십여 권을 쓰고, 방송 일을 할 때도 무속에 대한 프로그램만 만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데 딴 집과는 달리 낯선 간판이 하나 보인다. ‘칠성궁 제석당’이란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터라, 무조건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새내기 제자 칠성궁 제석당

 

문 앞에는 ‘새 신제자’란 글이 보인다. 30세쯤 됐을까? 잠깐 소개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속인들은 신을 모신 곳을 ‘전안’이라고 한다. 그 신당부터가 딴 집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울긋불긋한 무신도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정갈하니 글로 써서 신령들을 모셨다. 그 앞으로는 산신, 용왕, 대신할머니의 상이 좌정하고 있다.

 

붉은 색을 띤 조명도 없다. 대신 신상 앞으로는 축원카드가 나란히 놓여있다. 아마도 축원중인 신도들인 모양이다. 한편에 놓인 점상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든지, 책상 위에 종이와 연필 등이 놓여있다. 수원시 장안구 315-2, 3층에 마련된 황인애(가명, 여, 30세)를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전안을 차려놓은 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단다.

 

 

 

신병으로 인해 술로 보낸 20대

 

전안에서 만난 황인애에게 내림을 하기 전에 어떤 무병(巫病)을 앓았느냐고 물었다.

 

“23세 정도 되었는데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입에도 못 대던 술을 무지하게 먹어댔죠. 그러다가 보니 직장생활을 하면서 조그마한 가게라도 열 생각으로 열심히 모아두었던 돈을 다 탕진하고 말았어요. 이상하게 몸이 아픈데 딱히 병명도 나오지 않고요. 무릎에 물이 잡히고 십자인대가 다 망가졌다는 거예요. 수술을 해도 걸을 수는 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할 수 없다고 병원에서 이야기를 하고요”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생전 처음 점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병이니 신령을 모셔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러나 선뜻 그런 것에 동조를 할 수가 없어 많은 고민을 했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몸에 진동이 와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소변을 보고나면 몸서리를 치잖아요.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떨림이 오기 시작하더니, 그 떨리는 시간이 멀지 않고 매초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잠을 못자 무섭기도 하고 밤새 울었죠.”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저것이 날마다 술을 먹더니 미쳤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단다. 일 년 간을 그렇게 보내면서 날마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조차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황당한 것이었다고.

 

“정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저수지에 마네킹이 빠졌는데 건져놓으면 사람이 되거나, 제가 산에 배를 타고 올라가거나, 애들이 옷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오거나 하는 꿈을 꾸었어요. 또 모르는 남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놀래기도 하고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니면 밤새 여자들의 노래소리가 들리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로 미루어 황인애는 이미 자연통신이 된 상태에서, 3년 전에 내림굿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림굿을 받고 난 후,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는 다리가 아픈 것이 말끔히 나았다는 것이다.

 

“가리를 잡고 나서 관악산을 여럿이서 갔는데, 그 꼭대기를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죠. 몇 발만 걸어도 무릎 통증이 심했거든요. 그런데 몇 발 옮겨보니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그래서 동행을 한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단박에 정상까지 올라갔죠. 참 지금 생각해도 신병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어요.”

 

‘타인능해’가 되고 싶다는 그녀, 무당이라 상처도 받아

 

내림을 받고 일 년 동안은 선생을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면서 허궁 기도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에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았다.

 

 

 

“올 6월에는 채널 A라는 TV에 출연도 하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 왔어요. 덕분에 생활이 조금 여유로워지고요. 그래서 모인 쌀을 갖고 경로당을 찾아갔는데 필요없다고 가져가래요. 아마도 제가 무당이라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상처를 받기도 했단다. 생활에 꼭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도울 생각을 했지만, 돈을 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오고 말았다고.

 

“전남 구례 운조루에 가면 타인능해라는 쌀독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어요. 그리고 돈이 조금 모이면, 공부를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요. 제가 신령들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젠 그것을 없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도 해야죠.”

 

생각하는 마음이 착하다. 팔달산을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일어서는 그녀를 보면서 세상엔 참 별별 사람이 다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늘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는 그녀의 생각에 고마움을 느낀다.


 

 타인능해(他人能解) 
'모든 사람이 열게해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하라' 라는 뜻.

조선시대 영조때 류이주 선생은 자신의 가옥 '운조루' 안 뒤주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꺼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다.


 

“선화란 정신적인 밑바탕에 기인한 그림입니다. 제목에서 말해주 듯, 둥글다는 것은 부처님의 원만구족한 덕을 말하는 것이고, 밝은 빛이란 부처님의 밝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죠.”

 

10월 5일 오전, 수원시 우만동 248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봉녕사 도서관 1층에는, 10월 3일부터 6일까지 동성스님의 선화 초대전이, ‘둥글고 밝은 빛’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있었다.

 

 

 

동성스님은 1964년에 통도사로 입신득도를 한 후, 1972년 조계종 중앙교육원과 1973년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에서 공부를 하셨다. 1984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를 마쳤으며, 1996년에는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학위를 받고, 2012년에는 몽골불교대학교 명예불교 철학박사로 학위기를 받았다.

 

그동안 선화를 갖고 세계 주요도심 기획전에 초대작가로 10여회 초청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도 6회의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교토, 시안. 뉴욕 등에서 개인초대전을 15회 정도 가졌으며, 2006년에는 시안 따시산스 ‘세계평화기원 사문동성 달마화비’를 세우기도 했다. 내년에는 인도 델리대학교와 뭄바이대학교에 개인초대전이 예약이 되어있다.

 

 

실제를 전제로 하여 그리는 동성스님의 선화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동성스님의 달마도와 선화세계’라는 평에서

 

‘동성스님의 선화는 일단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따라서 즉흥적인 흥취에 의탁하거나 무심히 붓을 놀리는 식의 기분에 취한 그림이 아니다. 어쩌면 그림 이전에 글씨로써 먼저 붓을 다루는데 익숙해 있었기에 운필에는 이미 일정한 격식이 갖추어져 있다. 한 마디로 튼튼한 뼈대가 박힌 필선을 구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전시장에 그려진 그림들은 달마와 천진불, 미소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달마는 깨달음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죠. 천진불은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래자리를 말하는 것이죠. 청정한 성품 그대로인 순수한 마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미소동자는 무관심의 희열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관심은 오히려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나 무관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죠.”

 

종교는 예술이어야 한다

 

현재 한국선미술인회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동성스님은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 79-3 봉국사에 주석하고 계시다. 전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 관람을 하러 들어온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반갑게 맞이하시는 동성스님께 선화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선화란 일체중생의 고른 정신문화입니다. 선화는 화두와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종교란 곧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예술입니다. 수많은 불교문화가 그러하듯, 선화 역시 그 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봉녕사 주지 자연스님은 초대 인사말에서

 

“선화란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처럼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산란하고 분주한 마음을 다스려 고요한 마음을 이루고 참 나를 찾도록 하는 수행자의 그림이다. 동성스님의 선화는 깨달음의 자유, 청정성의 봉연, 무관심의 희열로써 사람과 생명의 빛나는 장엄을 이루고, 그 어디에도 염오되지 않는 연꽃 속에 담겨져 있는 세상을 지향한다.” 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동성스님의 모습에서는 때로는 달마스님이, 때로는 천진불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림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자락 깊이 숨어있는 근심을 놓아버린다. 아마도 동성스님의 선화에서 내뿜는 선한 기운 때문은 아닌지. 그림 한 점으로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성스님의 선화. 그 옆에 서서 하루해를 보내고 싶다.

느릿느릿
하늘로 오르는 산이 있습니다
산의 속도로 머리 허연 사내가
세상을 비우고 있고
비워지는 만큼
채워지는
잘 익은 바람이 있습니다
광교산 오르다
살아서는 술
죽어서 식초가 되는
막걸리 한 생애를 마십니다
인간 한 세상 섞어 마십니다

산 위로
구름과 바람이 지납니다
잔 속에
한 생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막걸리를 생산하는 도가의 대표인 이수원 시인의 '막걸리를 마시며'라는 시이다.

 

"제가 워낙 막걸리를 좋아해서 좋은 술을 마시려고 막걸리 도가 하나를 차렸습니다. 홍보 차 여기저기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술 한 잔 들어보시죠. 맛 괜찮습니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충남집이라는 선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명절 전 날의 쓸쓸함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술 한 잔 마셔보라고 권한다면 이보다 더 한 횡재는 없다. 꼭 돈이 붙어야 횡재가 아니다. 거의 한 달이면 25일 이상을 막걸리를 마시는 나에게는, 이보다 즐거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본인이 좋은 술을 마시기 위해 도가를 차렸다고?

 

'속푸리 생 막걸리'의 대표인 이수원(남, 57)은 본인이 즐겨 마시는 막걸리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막걸리 도가를 찾아 돌아다녀 보아도, 마음 놓고 먹을 만한 술이 그리 많지가 않았다고. 막걸리는 맛은 좋은 물이 좌우한단다. 우리나라에서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술맛을 보았지만, 두 세 곳을 빼고는 물맛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고 한다.

 

"술이라고는 막걸리 밖에 안마십니다. 그래서 한 때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걸리를 마셔보기도 했죠. 그러나 정작 한 두 곳 빼고는 물맛이 좋은 곳이 그리 흔치가 않았죠. 그래서 이왕이면 내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막걸리,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생각하다가 대부도에 '광교산 생 막걸리' 공장을 차렸습니다."

 

 

10여 젼 전에 처음으로 도가를 차렸단다. 그러나 본인이 마시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술도가를 차린다는 것도 쉽지가 않은 일이다. 거기다가 계속해서 술을 생산하려고 하면, 그만큼 판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도 만만치 않을 일. 결국은 기존의 대형 막걸리 도가로 인해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단다.

 

"참 마음이 아팠죠. 정말 좋은 술을 생산했는데, 기존의 대형 도가와 저는 경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판촉을 하려고 하니,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고요"

 

다시 물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속푸리 생 막걸리 이수원 대표는 그런 상처를 잊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좋은 물을 찾기 위해 무진 고생을 했단다.

 

"저희 술 공장은 충북 괴산군 문광면 속리산 자락에 있습니다. 지하 250m의 암반수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물중에 한 곳입니다. 막걸리의 생명은 좋은 물입니다. 그 물을 맛보고 나서 다시 막걸리를 생산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래서 다시 생산한 것이 바로 속푸리 생 막걸리라고 한다.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먹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막걸리를 마시는데 혀끝에 매운 맛이 돈다. 왜 막걸리에서 매운 맛이 도느냐고 물었다.

 

"예, 원래 엣 문헌에 보면, 막걸리는 매운 맛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운 맛은 항상 나는 것이 아니고, 발효 중에 몇 시간 정도 매운 맛을 감지 할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이 돌았다면 그 막걸리가 최고로 맛이 있다는 것이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과향을 맡을 수가 있습니다. 숙성된 막걸리의 맛이 최고일 때죠. 그런 다음 식초가 됩니다. 지금 매운 맛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정말 발효가 제대로 되었다는 것이죠. 막걸리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음식입니다"

 

원래 막걸리는 유산균이 많아, 요구르트 100병과 맞먹는 유산균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변비에 걸린 사람은 막걸리보다 좋은 음식은 없다는 것. 연구결과를 보면 막걸리는 비만예방과 염증의 억제,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는 제가 먹기 위해서 막걸리를 생산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생산하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량식품이라고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즐겨 마시고, 이웃들과 함께 마시기 위해서 만든 술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최고의 재료를 사용했죠."

 

그 말에는 이해가 간다. 본인이 직접 만들어 마시는 술을, 안 좋게 생산할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속푸리 막걸 리가 최고라고 마셔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한다. 옆에서 술을 마시던 분들도 한 말 거든다.

 

좋은 술은 내장이 알아봐

 

"이 술 달지도 않고 정말 좋습니다. 역시 술을 좋아하고 생산하는 분이시라, 술맛이 전혀 다르네요. 탁한 듯하면서 맑고, 연한 듯하면서 깊은 맛이 납니다. 더구나 술병에 보니 회사 전화가 아닌 대표님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네요. 그것 하나로도 자신 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이수원 대표의 막걸리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다. 그만큼 좋은 술을 생산하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인가 보다. 이러다가는 밤을 새워도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아, 막거리를 좋아하는 주당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시중에 판매하는 막걸리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좋은 물입니다. 다들 암반수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중에는 수돗물을 정제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막걸리를 마실 때 쏘는 맛이 있다면, 그것은 탄산을 주입한 것입니다. 탄산을 주입하면 상하지가 않죠. 그러나 정상적으로 좋은 막걸리를 전통 재로로 만들면, 35도 이상이면 짧은 시간에도 식초가 됩니다. 막걸리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탄산을 섞은 청량음료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듯, 막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수원 대표의 이야기. 술 한 잔을 마셔도 정말 좋은 물로 빚은 좋은 술을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나도 이참에 우리 술인 막걸리로 주종을 바꿔야겠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오래도록 사랑을 받은 막걸리가 아니던가? 이 술 갑자기 맛이 더한 듯하다. 나도 벌써 막걸리의 마니아가 되었는지

인구 110만의 대도시 수원. 그곳의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님께서 차가 없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몇 배 부지런하다. 그저 지역의 여기저기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의장이 아닐 때는 지역구만 챙기면 되었지만, 이제는 수원시 곳곳을 다녀야만 한다. 34명의 의원이 있는, 수원시의회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9월 17일 오전 11시, 수원시의회 의장실에서 노영관 의장을 만났다. 그저 털털한 이웃아저씨 같은 노영관의장이 반갑게 맞는다. 사진을 찍겠다고 가운데 자리(상석)에 앉으라고 해도, 굳이 마다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겠단다. 그만큼 격이 없이 사람들을 대한다.

 

 

 

수원시의회 노영관 의장은 1967년 4월 10일에 출생을 하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지방자치 도시행정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수원시의회 7, 8, 9대 의원으로 피선된 3선의원이다.

 

수원시의회 노영관의장 대담

 

- 먼저 이번에 경기도시군의장협의회 회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 힘들게 찾아주셨네요. 경기도시군의장협의회는 31개 시군의 의장들이 모여서 구성한 기구입니다. 서로가 정보도 교환하고, 상응해가면서 의정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뜻에서 만들어진 협의회죠.

 

- 이번 9대 의회 후기 의장을 맡으셨는데, 무엇에 중점을 둘 것인지?

예, 아무래도 후기에는 의원님들이 지역에 대한 현안 등을 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의원님들께서 각 지역에서 주민들과 약속을 한 사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또한 110만 수원시민의 위상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 수원시민의 위상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수원시는 경기도의 수부도시입니다. 인구 110만을 보유한 수원시는, 전국 230개 자치단체 중 최대 규모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수원은 사실상 홀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선거구가 비슷한 울산광역시에 비해 2석이 부족한 4석 뿐입니다. 또한 공무원 1인이 담당해야 하는 주민들의 수는 수원시가 428명이나 됩니다. 이는 창원시가 282명, 울산광역시가 247명에 비해 두 배 가량 많습니다. 이런 점들을 중앙에 이야기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겠다는 것이죠.

 

- 의회 운영을 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은 의회사무직은 임명권을 의회에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회 사무직까지 집행부에서 임명을 하니, 직원들이 의회 눈치도 보아야 하고, 집행부 눈치도 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일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걸림돌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회사무직의 인사권은 당연히 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의회에는 전문 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법안을 다룰 때마다 정말 필요한 인원이 전문직이기 때문이죠.

 

- 기초의원 공천에 대한 견해가 남다르시다는 데?

이제는 중앙에서 공천하는 그런 공천제도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당에서 공천을 주는 방식은 유지하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거죠. 중앙에서 기초의원까지 공천심사를 하지 말고, 주민들이 공천권을 주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주민들의 투표로 50%, 대의원들이 30%, 지구당위원장이 20%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정당공천제가 이런 쪽으로 바뀐다면 주민들이 더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의회와 집행부가 어떻게 앞으로 관계개선을 해 나가실 것인지?

사실 그동안 의회와 집행부가 서로 어긋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나 집행부는 모두 수원시민의 삶의 잘 향상과 지역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 9대 후기 의회는 집행부와 서로 대승적 차원의 협력과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 조화와 상생, 견제와 균형의 틀을 유지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집행부에 조례안 등을 상정할 때는 의원님들이 충분히 검토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상정안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회기에 임박해서 상정안 등을 제출하면 검토를 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집행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하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 지난 번 호우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돌아보는 등 많은 일을 하셨다는데?

우리 수원시민들이 34명 시 의원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후반기 의회에서는 새로 구성된 의장단과 호흡 맞추면서, 장애인과 소외계층, 다문화가정까지 먼저 생각하며 발로 뛰는 의정활동으로, 시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의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시민들이 불편한 곳이 있으면 쫒아가 해결하고, 아픈 곳이 있다면 어루만져 주어야죠. 그것이 의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노영관 의장은 이 날 아침에도 호우로 인한 피해는 없었는지 지역을 돌아보았다)

 

 

- 전국시군구의장협의회 회장 출마를 결심하셨다는데?

그렇습니다. 이제는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많은 권한들을 지역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기초의회가 문을 연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기초의회 의원이 2,922명이나 됩니다. 2005년 제8대 의회부터 소선거구제도에서 중선거구제도가 도입되어, 기초의원들의 의정활동 범위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주민들 요구도 점차 다양화 되어 가고 있고요. 그런데도 아직 기초의회에서 갖고 있는 권한은 미비합니다. 이제는 중앙에 이런 것을 강력히 항의하여 실제로 주민들을 위한 의회가 돨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런 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전국시군구협의회장에 출마를 생각한 것이고요.

 

- 차를 없애버리셨다고 들었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신지?

예, 사실 저희 기초의원님들의 활동비는 많지가 않습니다. 저희들은 지역 주민들의 많은 애경사에 일일이 찾아보아야 합니다. 또 생활도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차까지 있으면 생활이 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저희 집 사람이 작은 소형차 한 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건강을 생각해서도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죠. 집에서 의회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15~20분이면 충분합니다.

 

- 끝으로 수원시민들께 당부하고 싶으신 것은?

저희 34명의 의원들은 늘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집행부와 함께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시민의 곁에서 현장정치, 생활정치를 하면서 시민들의 의견이 수렴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수원시민여러분들께서는 수원시의회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또,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따끔한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오랜 시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지역을 취재하시다가 어려움에 처한 시민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세요. 집행부와 함께 현안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원시의회 노영관 의장과 대담 중인 온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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