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골 남원. 얼마 전인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망발을 했다고 남원이 분노했다. 도저히 한 지역의 방백이 할 소리가 아닌 말을 했다는 것에, 참으로 참담한 느낌이다. 이 춘향골 남원에는 예부터 팔경(八景)이 전해져 내려온다. '남원팔경(南原八景)'을 예전에 용성관이 있었다고 해서 '용성팔경(龍城八景)' 또는 ‘대방팔경(帶方八景)’이라고도 불렀다.


제1경 '교룡낙조'(蛟龍落照) - 교룡산에 비치는 석양풍경. 구름이라도 걸리면 그 낙조에 무든 구름이 가히 환상이다.
제2경 '축천모설'(丑川募雪) - 함박눈이 내리는 축천의 저녁 설경을 말한다.
제3경 '금암어화'(錦巖漁火) -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에서 밤에 횃불로 고기 잡는 풍경이다.
제4경 '비정낙안'(費亭落雁) - 비안정 뜰 앞 요천 백사장에 떼지어 나는 기러기들의 풍경을 말한다.



제5경 '선원모종'(禪院暮鐘) - 해질녘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종소리. 예전 남원성 동문 밖에 있는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 남원의 비보사찰인 선원사의 그윽한 종소리.
제6경 '광한추월'(廣寒秋月) - 광한루 하늘 위에 떠 있는 가을달이다.
제7경 ‘원천폭포'(源川瀑布) - 주천계곡을 흘러 내려 가르며 아홉 폭포를 이루는 계곡의 구룡폭포의 물소리.
제8경 '순강귀범'(순江歸帆) - 저녁의 해질 무렵 황혼과 함께 돌아오는 순자강의 고깃배 무리이다.




이런 남원팔경 중 제5경에 해당하는 천년고찰 남원 선원사. 그 경내에 작은 연못이 있다. 요즈음 그 연못에 심겨진 백련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순백의 아름다움. 그 꽃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20대 젊은이들. 그들은 ‘열정대학’이라는 곳에서 1박 2일간 남원으로 무전여행을 왔다고 한다. 20대의 소중한 시간을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 안에 내재한 것을 깨우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여학생 3명과 남학생 2명이 한 조가 되어, 1박 2일 동안 차비만 달랑 받아들고 남원으로 길을 나섰단다.

지난 토요일(16일) 남원에 있는 103연대 장병들에게 짜장면을 만들어주고 선원사로 돌아왔더니, 문화관 안에 젊은 학생들이 보인다. 그저 관람을 온 학생인가 보다고 생각을 했는데, 무전여행을 온 학생들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에 무슨 무전여행이냐고 물었더니, 20대에 자기개발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는 것이다.

1박 2일동안 고찰에 젊은 웃음을 남기고 간 열정대학의 학생들

이 젊은이들에게 과연 열정은 무엇일까?

다섯 명의 젊은이는 학교도 학과도 다르다. 그러나 자격증으로 전락해 버린 기존 대학들의 모습과 달리, 대안 대학으로 20대에 꼭 해야 할 것들을 일들을 하는 학습 커뮤니티인 ‘열정대학’의 학생들이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무전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

밥은 먹었느냐는 질문에 점심도 못 먹었다고 한다. 말이 ‘무전여행’이지만 이 무더위에 과연 밥도 제 때 먹지 못하면서 버틸 수가 있을까? 우선 공양간에 부탁을 해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다. 절집에 공짜는 없다. 그만큼 ‘울력’이라는 노동을 해야만 한다.

때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먹는 젊은이들. 한 사람은 사진을 찍고 있겠지.

면을 먹고 나온 학생들이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한다. 아마도 라면 한 그릇으로 배가 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더 이상은 없다. 밭에서 풀을 뽑는 댓가로 저녁에 삽겹살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20대 때와 무엇이 다른가도 궁금하다.

지난날의 나와는 또 다른 젊음을 보다

마침 가까운 곳에 막걸리집이 있어 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안주를 시켜 놓고 막걸리 몇 순배가 돌았다. 젊은이들답게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들도 아름답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담소를 하기를 두어 시간.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때와는 또 다른 젊음을 본다.

막걸리를 마시며 젊음을 논하다. 먹기 바쁜 녀석, 그러다가 체할라

사를 밝히는 젊은 친구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개발하기 위해 어려운 일을 마다않고 선택했다는 젊음. 그 용기 하나만으로도, 이미 이 젊은이들이 앞으로 다 많은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날 아침 6시를 조금 넘겨 잠자리를 제공한 곳으로 가보니,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 다 밭으로 나가 풀을 뽑고 있다. 벌레가 싫다고 하면서도 풀을 뽑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모기한테 물렸다고 엄살을 피우기도 한다.





끝임없이 샘솟는 젊음. 그것이 부럽다

아침을 먹고도 일은 계속됐다. 양파를 까고 스님짜장에 사용할 춘장을 볶고. 그러면서도 당당히 밥값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1박 2일 동안 절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웃음으로 일을 마치고 떠난 ‘열정대학’의 젊은 친구들. 자주 찾아오겠다는 말이 반갑기만 하다. 60대 블로거의 어쭙잖은 불안감이 기우였던가?

그들은 젊은이들답게 무엇 하나를 해도 당당하다. 그리고 작은 일에도, 말 한 마디에도 웃음이 그치지를 않는다. 생각보다 더 밝은 모습을 보여준 20대의 열정. 아마도 그들에게서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배운 것이나 아니었는지. 고찰을 찾아 모처럼 젊은 웃음을 남기고 간 그들에게 참다운 ‘열정’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후기)
열정대학의 김재석, 박수진, 신지현, 양혜지, 유태수 늘 젊음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답답하던 고찰에 젊은 웃음을 많이 남기고 가 주어 고맙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번지,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운문사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운문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으며, 율원과 강원 등이 있다. 운문사의 율원은 ‘보현율원’이라 칭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고지순한 계행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는 곳이다.

이 운문사에는 율원과 강원 등이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 있다. 그 중에는 금당도 끼어있는데, 금당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금당은 가람의 중심으로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각을 말한다. 일설에는 전각 안을 금색으로 칠하므로, 본당의 명칭을 금색의 당이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설은 금색의 불상을 내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금당

운문사는 비구니의 요람답게 일반적인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며, 출입이 제한되는 곳 역시 많다. 금당 또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석등 한 기가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곳으로 대개 전각 앞에 세운다. 불교에는 육법공양이 있는데, 그 중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또한 이 석등은 부처님의 불법을 온 세상에 퍼트려 세상을 밝힌다는 뜻도 갖고 있다. 하기에 석등은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이 되었던 것이다.




석등은 받침돌인 하대석과 간주석인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 등 5부분으로 구성이 된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우아한 모습의 석등

청도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은 8각으로 꾸며졌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아래로 향한 꽃잎을 새긴 앙화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인 간주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으며, 불창마다 불창을 바람을 막기 위한 장식을 했는지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이다. 7월 15일 찾아간 운문사. 도착하기 전부터 내리는 비가 점점 더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산도 받치지 못하고 금당 앞 석등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한시라도 빨리 촬영을 마치고 딴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다. 비가 오는 날 답사는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늘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문화재가 있어, 내리는 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485-1에는 전남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이 된 ‘담양후산리은행나무(潭陽后山里銀杏)’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금의 호남지방을 돌아보던 중, 이곳 후산에 살고 있던 선비 명곡 오희도(1583∼1623)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도 명곡의 북쪽 정원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타고 온 말을 맸다는 것이다.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仁祖大王 繫馬橡)‘이라고 이 은행나무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인데,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0m 정도이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7.7m에 동서로 펼친 가지가 20m정도에 남북으로는 각각 14m와 10m 정도의 거대한 은행나무이다.

지난 6월 18일 담양군의 답사 일정 중에 만난 후산리 은행나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벌써 나무의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600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서 인간들의 온갖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런 것을 눈을 감고 있던 은행나무의 속내를 닮고 싶다.




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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