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안에 무엇이 날아다닌다. 창 밖으로 나가고 싶은가 보다. 창에 붙어 안간힘을 쓴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일까? 하기야 날아다니는 곤충이 못 갈 곳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열차 안가지 들어왔을까?

어제 저녁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를 탔다. 자리에 앉았는데 무엇인가 창에 붙어 퍼득거린다. 날개 짓을 할 때마다 안 좋다는 흰 가루가 나른다. 자꾸만 나에게로 날아오니 짜증스럽다. 마땅히 잡을 것도 없다. 나방이다. 그것도 가루를 엄청 떨구는.
 


처음에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날아다니면서 사람에게로 달라붙는다. 짜증이 난다. 여수에서 출발을 해서 용산으로 가는 열차인데, 도대체 열차안에 이런 것이 왜 들어와 있을까? 몇 번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히지도 않는다. 


 
창 밖으로 풍경이 보인다. 나방이는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내 자리 옆으로 와 앉는다. 날때마다 가루가 심하게 날린다.

기분 좋게 떠난 길인데 초장부터 나방 한 마리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너는 얼마나 힘들겠냐. 비록 창 밖으로 나가려고 가루를 날리고는 있지만, 그 창을 뚫을 수 있는 힘은 없을 것이고. 혼자서 키득거리다가 사진을 찍는다고 헸더니, 아우녀석 친절하게 휴대폰까지 꺼내 불까지 밝혀준다.  

열차 창 밑에 붙어 있는 나방. 앞으로 앞 좌석의 팔걸이 등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승객들이 기분좋게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을. 이렇게 기분 찜찜하게 만들어야만 할까? 생전 나방이하고 함께 하는 열차여행은 또 처음이다. 여행 첫날부터 '옴 붙은 것'아 아닌 '나방 붙었다'.
 
이런 벌레 한 마리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또 열차 안에 벌레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하필 내가 앉은 자리에 이런 것이 따라 붙었을까? 아마도 내가 블로거라는 것을 알고, 글 소재 하나를 주려고 했나보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무엇이 재미있는지 키득거린다. 오랫만에 마음 편하게 며칠간 떠나는 여행에서 오는 여유인가 보다.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소재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한 곳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팔각의 받침돌을 삼단으로 쌓았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고 있는 이 석등은, 현재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한다.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 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연화대가 상징하고 있는 뜻은?

이 통도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귀꽃 양식 등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아래받침돌인 연화대의 옆면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아래에 있는 연꽃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아래 위 연화대 가운데에 있는 간주석인 기둥은 중앙에 세 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줄에 대한 정확한 풀이는 알 수가 없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간주석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석등 하나가 갖는 뜻은 상당히 깊은 것이다.

흔치 않은 부등변 팔각석등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이 된 것을 후에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석등의 조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등은 언뜻 보면 4각처럼 보이지만, 부등변 팔각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 얹은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인 귀꽃을 달았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놓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석등. 크고 작은 모형의 이 석등을 볼 때마다 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합천 해인사. ‘법보종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으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고 한다.

이 해인사 한편에는 ‘학사대’라는 곳이 있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은거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서에 몰입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경청을 했다고 한다.



학사대에 서 있는 기이한 전나무

이 학사대에는 기이하게 자라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가지를 아래로 내린 듯하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이 전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전설로 미루어보면 이 나무의 수령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인 85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으로 유학을 가, 다시 신라로 돌아온 것이 885년이다. 그 뒤 897년에 효공왕의 ‘사사위표’를 찬술하였고, 효공왕 8년인 904년 무렵에는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다. 908년에는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고 난 후,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이 곳 학사대에 머물렀던 것은 9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고 해도 이 전나무의 수령이 1,100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가지가 아래로 처진 전나무

전나무는 대개가 굵은 한 줄기가 곧바로 자라난다. 하지만 학사대에 있는 전나무는 어느 정도 원 줄기가 위로 오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나무의 높이도 상당하다. 대충 눈대중으로 따져보아도 25m 이상이 될 것만 같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그만큼 이 전나무는 위로 까맣게 솟아 있듯 보인다. 나무줄기가 갈라진 곳에는 풀씨가 떨어져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보듬은 최치원의 마음인가 보다.

그 아래로 가지가 부러져 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부러진 모습이 어느 쪽에서 보면 용머리 같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 보면 늑대의 머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연히 부러진 가지가 남은 모습이지만, 해괴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학사대에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 등이 보인다. 그만큼 이 곳이 원시림이었을 것이다.


그곳 학사대에서 은거를 했던 최치원. 가야금을 벗 삼아 세월을 유유자적하던 최치원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높다랗게 위로 솟은 줄기와 아래로 고개를 떨군 가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싶었던 최치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7월 26일, 해인사에서 만난 학사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당산이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신표이다. 당산은 장승, 신목, 돌탑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에 있는 당산은 당산나무와 석장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당산은, 운봉읍사무소 근처 숲 앞에 자리하고 있다.

남녀 한 쌍으로 조성된 석장승은 가운데 길을 두고, 양편에 마주보고 서 있는 남녀 한 쌍의 부부장승이다. 주변에는 숲이 있고, 남장승 곁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이 곳 당산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으며, 주변에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원래는 솟대와 함께 있었다고 하나, 현재 솟대는 사라지고 장승만 남아있다.



허한 곳을 방비한다는 서천리 장승

마을 입구 양편에 서 있는 이 부부장승은, 마을의 허한 곳을 방어하고 서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고 복판에 새겨져 있다. 남장승의 복판에는 ‘진서대장군’이라 쓰여 있으며, 머리에는 벙거지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왕방울 눈을 하고 있다. 얼굴에는 주먹코와 아래로 쭉 뻗은 송곳니가 표현되어 있다.

처음 대할 때는 우락부락한 것이 무섭게 보이지만, 찬찬히 훑어보면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장승은 ‘방어대장군’이라 복판에 음각을 하고 있으며, 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석장승을 가만히 보면, 그 제작기법이나 시기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어느 시기에 한 기의 장승이 먼저 서고, 후에 나머지 장승이 제작된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목이 부려졌다는 석장승

이 석장승을 보면 양편의 석장승이 모두 목 부분에 회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목이 떨어진 것을 붙여 놓은 듯하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 부부장승이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주민들이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장승의 곁에 있는 당산나무에서는 정월 초하룻날 주민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나무에 제가 끝나면 장승 앞에도 간단한 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 마을의 주신은 당산목이 된다. 하지만 이 석장승의 경우 주신은 아니라고 햊도 목장승과 같이 썩어서 부러지거나 넘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문화재이다.




일몰에 찾아간 장승, 해학적인 모습이 정겨워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도 부른다. 7월 24일 오후 6시가 넘어 찾아간 장승이다. 늘 운봉지역을 다니면서도 꽤나 늦게 찾아갔다. 자세히 살펴보면 가슴에 희미하게 표현이 된 창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눈은 왕방을 눈으로 이 지역 장승의 형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 뚜렷한 ‘방어대장군’이나 ‘진서대장군’이라 쓰인 글씨는, 이 장승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직능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정월 초하루에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 장승에 조촐하게 제를 지내고 있지만, 어느 시기에는 이 장승이 주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장승은 한 때 도난을 당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도난당했을 당시 장승에 올리던 당산제가 신목으로 옮겨 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마을을 수호한다는 남원 운봉 서천리 석장승. 오랜 세월을 주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두 기의 석장승은, 그 해학적인 얼굴 모습만큼이나 주민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고 있다.

여름철에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보양식을 먹는 것이다. 남들이야 보신을 하기 위해 즐겨 먹는 것이 있지만, 난 그런 것을 먹을 수 없으니 늘 말로만 즐기는 편이다. 그래도 초복도 지나고 중복이 지났는데, 그까이꺼 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여름을 나기 위해 체력보강을 하려면, 더운 날임에도 산으로 올라 자연산 더덕을 캐고는 한다. 우선 자연산 더덕은 오삼 중 하나로 '사삼'이라 한다. 그 사삼을 먹으면 몸안에 열기를 가시게 하기 때문에, 이 여름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더덕을 캐서 먹는다.

이건 머? 남들이 자연산 산삼이라고... 

더덕을 캐러 갔다가 만난 횡재

사람들은 때 아닌 것을 얻었을 때, '횡재'를 했다고 한다. 꼭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얻어야 횡재는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외에 소득이 생겼을 때도 횡재가 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기어 오르고, 다시 물이 있는 계곡 쪽으로 내려가 더덕을 찾는다.

더덕은 물가 가까운 곳에 주로 많이 서식을 한다. 고산지대부터 계곡 근처까지 폭 넓게 자라는 더덕이다. 어딘 들 더덕이야 다 있지만, 향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고산지대에서 캐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 지리산이 있으니, 지리산을 뒤질 수 밖에. 

한 참이나 그렇게 산을 뒤지며 더덕을 캐기에 바쁘다. 많이만 캘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여나 옅은 비를 맞으며 땀을 흘렸다. 땀인지 빗물인지 구별도 안된다. 거기다가 여름에는 유난히 뱀들이 기승을 떤다. 자칫 뱀에 물릴 수도 있다.

이끼를 덮어 잘 갖고 내려오긴 했는데....

그런데 이게 먼가. 낯 익은 것이 눈에 띤다. 어디서 많이 보던 풀이다. 잎이 다섯개, 그리고 가느다란 줄기. 이거 산삼이 분명한데. 먼저 손을 모아 잠시 감사를 한 후, 찬찬히 흙을 뒤집어 본다. 오~ 정말이네. 작기는 해도 산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여름에 보신을 하라고 산신령이 주시는 것인가 보다.

자연산 산삼을 캐긴 했는데, 이건 머

사람들은 평생 산삼 한 뿌리 먹기도 힘들다고 한다. 산삼이 어느 집 아이녀셕 이름도 아닐테니, 그리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일부러 씨를 뿌린 것도 아닌, 자연산이 아니던가. 한 뿌리를 캐고 주변을 돌아본다.

"오 ~ 산신령님 감사합니다. 불초소생 이걸 먹고 이 더운 여름에 힘좀 쓰겠습니다. 땡큐 산신령님"

여기저기 산삼이 눈에 띤다. 여기도 저기도 보인다. 이 정도면 더덕은 뒷전이다. 무릎을 끓고 열심히 캐어본다. 작다. 상품으로야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산삼은 분명하다. 내가 전문 심마니도 아닌데, 더 세월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캐서 돌아오기는 했다. 이끼를 잘 덮어 내려왔다. 잎이라도 시들까 보아서.

                                       나에게는 '그림의 떡' 그럼 이걸 어떻게 해?

그러나 이건 머시람? 지난 번에 이것보다 작은 거 하나를 먹고 난 후, 열이 뻗쳐 죽는 줄 알았던 기억이 난다. 벌떡증이 생겨 거의 초죽음이 되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산삼을 놓고, 한 숨만 내쉰다. 이걸 어쩌지. 다시 갔다가 심어야 하나?

먼 좋은 방법이 있음 알려나 줘 보셔. 누가 알아 횡재할 일이 생길지. 

덧글 / 이 것은 상품가치가 없는 이쑤시개 삼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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