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남원시 덕과면에 있는 호암서원을 찾아가다 보니, 길가에 커다란 석비가 하나 보인다. 호암시비공원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시비공원은 남원문화원, 전라북도와 남원시, 그리고 호암시비공원 건립추진위원회의 후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호암서원은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55호로 지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근처를 돌아다녀도 이정표 하나가 없어 결국 찾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앞에 조성이 되었다는 시비공원. 호암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조성된, ‘궁포조대(弓浦釣臺)’ 하천부지 낚시터 옆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시비가 줄지어 선 공원

도로 변 넓지 않은 곳에 마련한 시비공원에는 받침 위에 흑색이 나는 석물로 세운 시비 20여기가 줄지어 있다. 길가를 향해 3줄로 서 있는 시비들은 멀리서도 쉽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나치다가 한 번 쯤은 들려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길이 워낙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고 보면, 원래의 취지에는 많이 부족하단 생각이다.

2007년 6월 28일자로 비를 세운 것인 듯, 시비표지석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백두대간 만행산하 유서깊은 호암서원 앞 뜰 궁포조대에 고매한 선인들의 시혼을 모신다. 선인들은 애국의 명신이거나 학자인 동시에 시인이었으니, 그 생애가 일월처럼 빛났다. 우리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인간을 사랑하고 바른길을 따라 참되게 살아 온 인, 의, 예, 지 정신을 표상으로 삼고자 남원관련 선인들의 시를 모아 돌에 새겨 이곳에 세웁니다.」

뜻대로라면 정말 좋은 시비공원이다. 그런데 이 시비공원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기 이를 데가 없다.



글씨는 지워지고 조경수는 말라죽고

시비는 ‘용성지’와 ‘매헌집’ 등 남원 관련의 시인과 서책 등에 실린 글을 모아 돌에 새겼다. 그런데 몇 개의 시비는 아예 판독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경수로 심은 듯한 나무는 고사를 했는지, 말라 죽어있다. 선인들의 얼을 기리고자 조성을 했다는 호암시비공원. 이런 것을 바라보면서 후손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

불과 이 공원을 조성을 한지 이제 고작 5년이다. 그런데 조성을 해놓고 단 한번이라도 이곳에 신경을 쓰기는 했는지 묻고 싶다. 어떻게 시비에 글자의 판독도 어려울 정도로 지어진 것을 그대로 방치를 한 것인지.




많은 예산을 들여 조성을 해놓고, 나몰라라식의 방치라면 그 안에 새긴 뜻도 함께 버려진 것 같지 않을까? 선인들의 글에 녹아진 그 뜻을 후손에게 일깨우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면, 하루 빨리 제 모습을 갖추기를 바란다. 또한 이렇게 외진 곳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전도 생각해 봄직하다.

성경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의 정의처럼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째는 종교적인 사랑인 ‘아가페’이고, 둘째는 광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필리아’이다. 필리아는 이성, 삶, 자연 등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사랑은 ‘에로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한다. 네 번째는 ‘스토르게’로 혈육의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세상을 좀 보시지.

사람들은 곧잘 ‘사랑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은 영원한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이 네 가지의 사랑 중에 스토르게는 영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속을 뒤집어 보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식을 추행하고, 부모를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듯 내다 버리고 있는데,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는 없다.

이성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 어찌 그럴까? 사랑은 물이 흐르듯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을 종교에서는 영원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세상이 변해가면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랑의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리 해야 한다. 적어도 2500년 전 석가모니불의 시대나, 2000년 전 예수의 시대에는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통했을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과연 통하는 것일까?

사랑은 흐른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길이 가는 데로 흐른다. 그 길이라는 것이 늘 같은 곳이 아니다. 시간이 가면 물길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을 흐르는 물에 비유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 사랑을 보면, 이건 물도 아니다. 마구잡이식으로 파헤친 무엇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드는 것 말이다.

결국 보편적인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랑의 정의가 사라졌다는 뜻일 게다. 위 네 가지 사랑 중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 중 한 가지를 비유로 들어도 좋다. 과연 이 시대에 그런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들이 공존한다.

이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한계에 다달았다. 예전처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부모, 부모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내던 자식도 볼 수가 없다. 성인들이 베풀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조차 개 같은 짓을 하기가 일쑤인 세상이다.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의 정의는 존재하는지 의문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인간이 공존한다. 하나는 그래도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사람의 탈을 쓴 ‘개만도 못한 인간’이다. 이렇게 두 가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수위가 달라졌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오늘 곰곰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느 사람이 정말 인간답지 못한 짓을 하다가, 배우자에게 걸려 길거리로 내쫓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세상은 이제 사랑태령도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왕 쾌락을 추구하려면 표시 안나게 잘했어야지. 하긴 내놓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세상 참. 이런 사람들도 자신들은 '사랑'이라고 표현을 한단다. 그래도 영원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전남 무안군 심향면 유교리 698에 소재한 나상열 가옥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67호이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천석지기의 집’ 이라고 부른다. 천석지기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부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농의 집이라고 부르는 이 집을 돌아보고 나서야, 그 부의 척도를 알았다.

나상열 가옥을 찾아가 보았다. 약 90여 년 전에 지은 안채와 일제 때 지은 창고, 그리고 문간채와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나상열 가옥은 전체적으로 3단의 구조로 축조되었다. 맨 위에는 안채가 있고, 계단을 내려 맞은편에 창고와 중문채가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맨 아래편 3단에는 대문과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부호답게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예전의 건물에서 사라진 부분이 있는 듯하다.


대문도 창고로 사용한 부호의 집

나상열가옥의 대문은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다. 커다란 대문을 갖고 있을 경우, 그 양편은 문간채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높고 큰 나상열 가옥의 대문은 다르다. 문 앞과 안 편이 모두 판자문을 만들어 놓았다. 담벼락 위에 낸 들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 등이 이것도 곡식창고로 이용했음을 항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에는 여기저기 곳곳에 곡식창고를 만들어 놓았다는 소리다. 그만큼 천석지기의 집에는 다양한 창고가 필요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대문에 붙은 창고는 원 곡식창고에서 곡물을 밖으로 운반하기 전에 사용한. 중간 창고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행랑채는 대문 안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나 있다. 이곳도 너른 광을 만들고 그 한편 구석에 방을 들여 놓았다. 너른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를 한 형태다. 나상열 가옥이 오밀조밀한 멋을 벗어나 시원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엌과 연결된 마루의 용도는?


나상열 가옥에서 눈에 띠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안채에 딸린 부엌이다. 이 부엌은 안쪽과 문쪽에 작은 방을 두었다. 아마 안채에서 일을 하는 집안의 부녀자들이 이용한 듯하다. 그런데 그 방 사이에 마루가 있다. 앞을 문을 단 것으로 보아 대청은 아니다. 마루방의 한편에는 벽에 붙여 계단식으로 짠 것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그곳을 부엌에서 사용하는 용기를 보관하는 곳인가 보다. 집에서 일을 하는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테니, 그만큼 집안에서 사용하는 용기도 많았을 것이다. 많은 용기를 보관하기 위해, 부엌과 방 사이에 별도로 장식장처럼 꾸며놓았다. 그런 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마루방을 만들 정도로 세심한 배려를 하고 지은 셈이다

안채 뒤편에 있는 석빙고

나상열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집안에 석빙고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축대 안에 만들어 놓는 석빙고는 많은 인원이 기거하는 절집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음식을 만들 때도 많은 양의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그 많은 양의 음식재료를 날마다 사들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안채의 뒤편에 굴을 파고 석빙고를 만들었다. 이 석빙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적당한 숙성까지도 도왔을 것이다. 결국 이 집안의 음식은 항상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우물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의 정체는?

우물에는 도르래를 달아서 사용을 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물의 사용양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음식을 조리하는 집안 아낙네들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데 사용하는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우물의 양편에 기둥을 세워 도르래를 달았다.


우물을 보기 위해 가까이 갔다.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우물 안에 등나무와 같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왜 이 안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을까? 저 나무는 어떻게 저곳에서 자라게 된 것이고, 언제부터 저렇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무성한 잎이 싱싱해 보인다. 그 밑에는 물이 있다는 소리다. 나상열 가옥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반전의 미학, 아름다운 돌담장

집안의 전체를 돌담장으로 쌓은 나상열 가옥. 그래서 전체적으로 무거운 집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또한 그 무거움을 덜어내는 하나는 담장의 한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안채를 보고 좌측의 담장 앞으로는 계단이 아닌 비탈로 조성을 하였다. 곡식을 나르기 위한 수레가 다니던 길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너른 대지위에 시원하게 조성된 나상열 가옥에서, 정감이 가는 유일한 축조물이 바로 돌담장이다. 이 담장은 담장에 붙은 대문과 행랑채까지도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수레를 끌 수 있는 비탈로 여유를 부렸다. 천석지기 집이라는 나상열 가옥에서 보이는 전체적인 여유. 그것은 생활의 여유이기도 하다.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의 사랑채 굴둑. 전형적인 초가의 굴뚝이다. 제천시 금성면 소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위는 사적 제230호인 천안의 유관순 생가지의 굴뚝이다. 전형적인 민초들의 굴뚝 모습이다. 아래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38호인 청원 낭성 관정리민가의 굴뚝이다. 연도에서 솟은 연소통이 짧다. 이 집이 있던 곳은 바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가의 연소통치고는 너무 짧은 감이 있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초가집 굴뚝이다. 바람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담장에 연도를 집어 넣었다. 가운데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인 고창 신재효 생가의 굴뚝이다. 낮지만 연도를 길게 빼어 집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아래는 삼척시 도계의 신리 너와집 굴뚝이다.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는 수원 파장동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광주이씨 월곡댁의 굴뚝을 세우는 연도이다. 연도만 마련하고 연소통은 마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운에와 아래는 남원 운봉에 있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지에 세워진 집이다. 측면을 보고, 뒷면을 보아도 굴뚝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쓴다. 많은 곳을 다니고 직장에 매달린 사람이 밤에 글까지 쓴다고 하더니 일이 터졌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블질을 쉴 수가 없는 것은, 하나의 문화재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데, 과연 그 문화재 사랑은 얼마만한 효과를 얻었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블로그 한편에 <인기글 위젯>을 달았다. 그런데 참 마음이 씁쓸하다. 정작 문화재 소개를 전문으로 하는 블로거는 맞는데, 인기글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화재에 대한 글이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보지만 문화재에 대한 글이 없다. 이 정도되면 문화재는 역시 찬밥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긴 요즈음 사람들 문화재에 대해 무슨 관심이 있으랴. 그저 벗고, 가슴이 절반 쯤 보이고, 배꼽 들어내고, 장딴지 보이고, 흔들어 대고, 빨아대는 것에나 관심이 있지.

그 다음 페이지를 한 번 넘겨본다. 그 끝에 하나가 달랑 보인다. 결국 문화재 블로기의 치욕이란 생각이다. 얼마나 감칠 맛 나게 글을 쓰지 못했으면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것일까?

 


이래 갖고 무슨 문화재 블로거라고 떠들고 다닐 수 있을까? 이제는 생각을 좀 종리를 해야할 듯하다. 죽어라 하고 갈겨대 보았자, 별 관심들이 없는 것을, 몸 망가져 가면서 기를 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3일이나 들락거리며 통증을 참아가면서도 글을 써 보지만, 이제는 좀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더 마음이 아프다. 정말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욕이라도 신나게 해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중단했단 블질을 다시 시작하면서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서를 했으니 참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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