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을 할 때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나로서는 버스나 기차 안에서 많은 일을 보고 듣는다. 어제 버스에 올라 이동을 하는데 버스 뒷 자리에 앉은 여성 한 사람이 손거울을 꺼내들고 화장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저 여성들이야 어딜 가나 화장을 고치는 것을 자주 보았던 터라 그리 눈여겨 보질 않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다, 흰 위옷을 접고 있는데, 아무래도 교복만 같다.

그 옆에 여성의 커다란 백 안에도 역시 흰 옷이 담겨져 있다. 교복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방과 후 시간에 버스에 올라 화장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학생이었다는 소리이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다. 도대체 왜 화장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일까?


미팅에 가는데 교복입고 가나요?

그 여학생들이 내려버렸다. 나야 아직 내릴 정류장이 아니니 내릴 수는 없고, 그런데 옆 자리에 학생 하나가 비슷한 또래인 듯하다. 

"학생 혹 저 사람들 학생 아닌가?"
"예 맞아요"
"그런데 왜 저렇게 화장을 하고 있지" 
"아마 오늘 미팅이 있나보죠 머"  
"미팅을 가면 화장을 하나?"
"그럼요. 그럼 교복입고 미팅 나가나요. 미팅 가면 맥주도 한 잔 하는데 교복입으면 쪽 팔리죠"

참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내릴 시간도 멀었고 해서 옆 학생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이 학생 묻는대로 시원하게 답을 한다. 아주 당당하다.

"저렇게 가방이 아닌 것을 들고 학교를 가나?"
"아뇨. 학교 근처에 맡기는 데가 있어요"
"그럼 거기다가 맡겨놓고 저렇게 갈아입고 다녀"
"예 그런 학생들도 있고요. 그냥 등가방 안에 백이랑 옷이랑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어요"

하긴 요즈음은 고등학교 학생만 되어도 화장을 해 놓으면 도대체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제 저녁인가 방송에서 중학교 3학년 학생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다고 선생님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런 일로 인해 교권 강화를 하야 한다고도 하고.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하고 미팅가면 몇시에나 끝나는데?"
"잘 모르겠어요, 어떤 아이들은 밤새도록도 논다고 하는데.."
"밤 새 놀고 그 다음 날 공부를 할 수 있어?"
"공부는요. 수업시간에 자겠죠"

스스럼없이 대답을 하는 이 학생. 미팅을 해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 못해본 학생들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웬만하면 중학생들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 건전한 학생들의 이성교제를 갖고 무엇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청춘은 마음껏 누리라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마음대로란 단어 안에는 지킬 것은 지켜가면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에 올라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는 학생들.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세상이 변해도 참 너무 빨리 변하고 있는 듯하다.(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이천에 있는 설봉산. 설봉산에는 사적인 설봉산성을 비롯해, 향토유적인 영월암 등이 있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 설봉산에 올랐다. 한 낮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설봉산은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차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을 한 낮에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다리가 더 무겁다. 물도 준비하지 않은 채 산을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하게 목이 탈 때쯤 영월암 입구에 도착했다.


천년 세월 설봉산을 지킨 마애불

목이 타던 차에 영월암 입구에 있는 샘에서 물을 몇 대접이나 마셨는지. 한숨을 돌리고 난 후 대웅전을 비켜 뒤로 오르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불은,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은 얇게 돋을새김을 하였고 나머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고려시대 특유의 거대마애불인 영월암 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마애불. 고려시대의 마애불은 하나같이 커다랗게 조성이 되었다. 아마도 국가적으로 북진에 대한 염원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돌계단에 주저앉는다. 산으로 오르며 흘린 땀이 시원한 바람에 말라간다. 마애불을 떠나 내려오면서 드린 대웅전. 그 어간문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이리 훼손이 되지 않은 모습으로 천년을 지켜왔음을 감사를 드린다.

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고집을 피우다가 병원을 향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통증이다. 이제 누구 말마따나 연식이 오래되어 폐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넘기고는 한다. 그런데 심각할 정도로 통증이 온다. 할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는 수밖에.

원래 병원하고는 담을 싼 사람이다. 째지고 깨어져도 대층 넘어가는 판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 가는 길이다. 가면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병원이라는 곳을 다녀왔는데도 다시 통증이 있다면, 이젠 정말로 농담삼아 하는 몸을 바꾸는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지 실실 웃어도 본다 . 아픔을 조금이나마 잊어보려고. 그런데 뒷 자리에서 아이 하나가 심하게 울어댄다. 이제 10개월이라는데 엄마가 진땀을 흘린다.

어린 엄마는 더 울고 싶을 것

뒤돌아보니 아이엄마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불편한 것인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몸도 안좋은데 아이까지 쉴 새 없이 울어대니 솔직히 짜증도 난다. 그런데 아이가 을어대는 것이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아이 엄마의 나이가 이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 것만 같다.

곁에 탄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추스려보지만 그것도 허사.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아이가 무엇이 불편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차 안이 덥다. 요즈음 일기가 다시 여름이 오는 것인지 며칠 간 여름날씨로 돌아간다고 이야기를 할 지경이었으니. 기사분에게 에어컨을 좀 틀어달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를 않는다. 아이엄마도 옆 할머니도 감당할 수 없는가보다. 

내리라는 사람, '너나 내려라'

두 시간 정도를 가는 버스이다. 고속도로에서 나이 어린 아이엄마는 울고 싶을 것만 같다. 그런데 버스에 함께 탄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줌마 아이 데리고 내려요. 듣기 싫어 어디 사람이 살겠소. 자가용 타고 다니든지"

아이를 데리고 내리란다. 여기 고속도로인데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내리라고. 아이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 말에 사람들이 모두 동조를 하는 표정이다. 하긴 버스 안에서 아이가 한 시간이 넘게 울고 있으니, 짜증들이 날 만도 하다. 그렇다고 고속도로 인데 내리라니.

"아저씨 여기 고속도로인데 어딜 내리라고 해요"
"당신은 듣기 싫지도 않소?"
"나도 듣기는 싫죠. 그렇다고 일부러 울리는 것도 아닌데.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나요"


그런데 이 양반 바로 육두문자가 나온다. 결국 어린 아이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미안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옆에 탄 할머니께서 이제는 아이가 아니고 엄마를 달래고 있다.

"아저씨 세상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무엇이라 할 일이요. 아이가 우는 것이 엄마 탓도 아니고. 그런 당신이 자가용 타고 다니면 되지"

말이 험해지니 이 양반 바로 꼬릴 내린다.
 
"듣기 싫으니까 그러죠" 
"듣기 싫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겠소. 그렇게 능력이 좋으면 당신이 내리쇼. 차 없어 버스 타는 것도 서러운데 별 소릴 다하네"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차 없는 것이 무슨 죄인가? 아이 엄마를 보니, 아이아빠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20대 중반일텐데. 차 없는 것을 나무라다니.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 되었는지. 없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살기가 힘들다. 그렇게 아이는 두 시간이 넘게 울었다. 어디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아팠는지. 아이엄마에게 병원을 가보라고 이야기를 한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어린 엄마. 우리 며눌아이도 차 없어 혹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늘을 본다. 가을 하늘이 참 높다. 어쩌다가 이 어린 사람이 엄마가 되어서 곤욕을 치루나. 세상이 조금만 이해를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야박해야만 하는 것일까? 따듯한 사람들이 그립다.

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굿판에는 늘 해학이 넘친다. 예전에는 대감굿을 할 때면, 전문적인 ‘무기(舞技-춤추는 사람)’들이나 소릿광대들이 굿판을 찾아들었다. 대감굿은 지금처럼 한 거리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거리마다 끝에 질펀한 대감놀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감굿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하였다.

11월 2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남, 55세)의 ‘진적굿(진적굿은 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한 굿을 말하다)’ 판은 흥이 넘쳤다. 춤을 추는 무희들과 소릿광대가 자리를 함께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타고난 소리꾼

박종국(남, 57세)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소리꾼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릴 때 시흥 읍내 탑골에 살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집을 지을 때 하는 지경닺는 소리 등 많은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요. 그 어린나이에 무엇을 알고 그랬는지. 한 번은 상여를 쫓아가 공동묘지에서 잠을 잔적도 있어요. 밤이 늦었는데도 아이가 들어오질 않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경찰들에 의해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집에 가서 혼도 많이 났죠.”

굿판에 초청이 되어 부채 하나를 손이 들고 신바람 나게 ‘변강쇠타령’을 불러대는 박종국씨.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의 이수자이던 박종국씨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40호 수표교다리밟기 소리부문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당시 큰 만신 집이 있었는데, 그곳서 구경을 하다가 늦게 들어와 혼도 많이 났다고 한다.

“아마 음악이 저에게는 팔자인가 봅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보컬을 조직해 공연도 하고, 무명가수로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어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소리판

그런 끼가 있어서인가 자신에게 맞는 소리를 찾다가 우리소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선소리 산타령의 보유자였던 고 정득만 선생과 현재 서울 휘몰이잡가의 보유자인 박상옥 선생께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 동안 수원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온 박종국씨는 판소리를 마당극화 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하는 등, 많은 공연을 하였다. 언제나 타고난 소리꾼으로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고 이어간 것이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인가 보다.

소릿광대는 재담이 뛰어나야만 한다. 판소리의 소리꾼만이 아니라, 어느 소리를 하든지 재담이 없으면 소리판이 영 밋밋해진다. 소리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좌중을 휘어잡는 재담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박종국씨의 재담은 언제나 재미있다. 수많은 무대에 작품을 올리면서 직접 연출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함께 소리로, 박수로 굿판의 흥을 절정으로 오르게 한 소릿광대. 아마 이 날 장구를 대한민국 최고의 장구잽이라고 하는 장덕화 선생이 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굿판의 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우리 굿의 재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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