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에 소재한 사적 제445호 숭선사지.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자리했다는 숭선사지, 이 거대한 절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길은 없다. 폐허가 되어 옛 영화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절터 안에 널린 석조물로 보아 예전의 그 규모를 가늠할 수가 있다. 밤나무 아래 커다랗게 쌓아올린 와편 더미. 그 하나만으로도 오래전 영화를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숭선사는 고려 광종 5년인 954년에 광종의 모후인 신명숭선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원찰이라고 전한다. 숭선사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원찰이라는 것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절 곳곳에 들어난 석조물,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숭선사지를 찾아가 보았다. 마을의 안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낮은 산길을 조금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널려있는 석조물들을 보아도 예전의 그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 이렇게 거대한 사찰이 어떻게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보아도 상당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터와 배수로, 남문지, 담장터 등이 확인이 되었다는 숭선사지. 사지 안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옛날의 화려했던 흔적이 그려진다. 더욱 왕의 모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창건하였으니 그 규모가 어떠했을까?



1980년 초 절터 아래 형성한 숭선마을에서 <숭선사>명 기와가 발견이 된 후 주목을 받은 숭선사지. 그 곳에서 금동보살두, 분청사기 장군 등 많은 유물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널려있는 수많은 석재들을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하다. 절터 곳곳을 돌아보다가 보니 머릿 속에 숭선사의 옛 모습이 조금은 그려지는 듯도 하다.

조선 성종 10년인
1497년과 명종 6년인  1551년, 그리고 선조 12년인 1579년에 중창을 한 것으로 밝혀진 숭선사지는 조선조까지도 그 대 가람으로서의 웅장한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다고 해도 그 폐사지가 된 절터 안에 남아있는 석조물들. 그리고 와편더미. 그런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숭선사지의 옛 영화를 그려보는데 부족함이 없다.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보는 옛 절터 하나하나가 소중하개 다가오는 것은 바로 남아있는 옛 흔적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있어 나그네의 발길은 더욱 빨라지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충북 영동군 학산면 봉림리 미촌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4호인 성위제 가옥.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초가로 되어있는 성위제 가옥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일각대문, 광채, 사당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성위제 가옥은 대부분 20세기 초 이후에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다만 광채만이 1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택을 답사하면서 만난 광채 중 가장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성위제 가옥. 정면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이 광은, 좌측 세 칸은 판자벽을 막고 문을 달았다. 바닥은 나무로 깔아 이곳이 곡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나머지 우측의 한 칸은 개방을 하여 헛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광의 특별함이라는 것이 바로 판자벽이다.


재활용한 판자로 지은 광채

널따란 판자를 세로로 끼워 놓은 이러한 판자벽은 오래된 기법이다. 판자벽을 둘러보다 보니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다. 벽을 막은 판자에 구멍들이 뚫린 것도 있고,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무를 보니 어딘가에 사용했던 나무들로 벽을 둘렀다. 나무를 재활용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해답을 찾기가 어렵다. 이렇게 작지 않은 곳간을 갖고 있는 집에서 꼭 사용했던 목재를 이용해야만 했을까? 벽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주인의 알뜰한 습관 때문이다. 집주인의 물건 하나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이 배어있다. 막아놓은 벽은 듬성듬성 틈이 생겨 자연스럽게 통풍을 유도한다. 집주인의 여유로움이 배어있는 아름다움이다.



막힘과 자유스러움이 공존하는 외벽

안채 앞에 놓은 사랑채는 담 안과 담 밖에 걸쳐있다. 밖에서 사랑채를 출입할 때는 우측 담장에 난 작은 대문을 거치지 않고, 사랑채의 마루로 바로 연결이 된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사랑채의 뒤편에 난 문을 열면 담으로 막혀있다. 왜 이렇게 외벽을 쌓은 것일까?

안채는 집안의 안주인이 주로 기거하는 생활공간이다 보니, 사랑채를 찾아 온 외부의 손님들이 안채를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를 길게 막아버린 또 하나의 벽이다.



사랑채는 바로 안채를 볼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다. 넓지 않은 공간에서 사랑채와 안채의 거리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기거하는 공간이기에 집을 찾은 외부인들이 이곳에서 하루 묵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안채의 소리까지도 들릴 수 있는 거리인 사랑채가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차단하기 위한 외벽을 하나 막아놓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생활에 자유스러움을 얻을 수가 있다. 막힘과 자유스러움. 이것이 사랑채 외벽의 멋이다. 또한 사람들의 동선을 최대한 줄여놓아 이동을 편리하도록 하였다. 곳곳에 주인의 따듯함이 배어있는 집이다.



행랑채에 아랫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담겨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가 보인다. 그리고 우측에는 광채, 그 뒤에는 측간이 있다. 광채와 안채의 모서리에는 뒤주와 우물이 오롯이 자리한다. 좌측에는 담에 붙은 작은 문과 사랑채가 담으로 연결이 된다. 그리고 안채의 뒤편에는 담장으로 두른 사당이 자리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곳이 바로 행랑채다. 행랑채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은 집이, 바로 성위제 가옥이다. 비록 내가 부리는 사람이지만, 최선을 다해 인격을 존중했음을 행랑채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대문을 낀 행랑채를 보면 성위제 가옥의 집주인이 얼마나 아랫사람을 배려했는가를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고택의 경우 대개는 대문 양 편이나 한 편에 방을 두게 된다. 그러나 성위제 가옥의 행랑채는 대문과 방 사이에 헛간을 두고 있다. 이것은 대문에서 방을 바로 연결하지 않아, 문을 열고 닫을 때 소음을 조금은 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중간에 광을 두어 문을 여닫는 소리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어낸 것이다.



안채와 광채의 모서리에서 만나게 되는 뒤주와 우물. 전통기법을 그대로 살려 만든 뒤주는 이 집의 모든 아름다움을 정리하고 있다. 사방 한 칸으로 지어진 뒤주는 땅에서 한 자 정도를 높였다. 습기를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물과 가까이 두어 살림을 하는 부녀자들의 동선을 최대한 짧게 만들었다. 쌀광에서 바로 우물로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집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만나는 여유로움과 배려. 아랫사람도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위제 가옥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남원시에 소재한 광한루원. 명승 제33호인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마도 남원을 들렸다가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의 장소로도 유명한 광한루.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부른 후 ‘광한루’라고 광풍루를 고쳐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볼거리가 많은 광한루원

광한루는 누원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넓지 않은 루원 앞으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답다. 광한루원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그 앞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완월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정자는, 지상에서 달을 보기 위한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있는데, 아름다운 선녀들이 달나라의 궁전이라는 ‘계관’에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전을 닮은 광한루를 세웠으며, 완월정은 그 달 속에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겹처마 팔작 오방집인 완월정

완월정은 오방집이다. 오방집이란 네모난 집의 한편을 돌출시켜 오방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겹처마 팔작의 조선식으로 누각을 마련하고, 그 뒤편을 연못으로 돌출시켜 오방집으로 꾸몄다. 완월정은 작은 인공 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을 물이 에워싸고 있으며, 작은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중층 누각으로 조성을 한 완월정은 양편으로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꺾인계단을 놓았다. 위로 오르면 누각 뒤편을 밖으로 돌출시켜 높임마루를 깔았다. 양편으로는 게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다. 11월 6일 찾아갔을 때는 붉은 단풍이 완월정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완월정을 바라보아도 아름답다. 가을의 완월정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계단을 내려 누각 밑을 들여다본다. 굵은 원형기둥의 밑에는 자연 그대로인 덤벙주추를 놓아, 자연스러운 멋을 더했다.

완월정, 지금 그대로가 좋다

완월정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붉은 단풍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부서진다. 음력 5월 단오가 되면 춘향제가 열린다는 완월정. 아마도 그 어떤 누각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쳤을 때 이곳 완월정에 올라, 멀리 지리산 위로 솟는 달을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모든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다시 한 번 완월정 계단을 밟아본다.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천상의 선녀가 보이지 않아도, 이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광한루원에는 광한루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기이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가슴이 따듯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과거 우리네 선인들의 숨결을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어디를 가거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있는가해서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네의 사대부가와 민초들의 삶이,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지난날의 사대부가의 심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배울 수는 없는 것인지.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 ‘소리통’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59호인 이용욱 가옥은 강골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집이다. 비교적 넓은 평야에 인접하여 있고, 해안과도 가까운 지역이어서 풍수지리상 터가 좋은 곳이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의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로 향하는 우측 담장에 보면 담장에 작은 구멍 하나가 보인다. 그 밖으로는 마을의 공동우물이 있다. 집의 구조를 둘러보면 이 우물을 일부러 이렇게 밖으로 빼내 담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작은 구멍을 ‘소리통’이라고 한다. 우물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을의 온갖 이야기가 다 흘러나온다.

소리통을 통해 그러한 마을의 애경사를 듣고, 적당히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소리통은 마을 주민들과 사대부가의 보이지 않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부단하게 떠벌리지 않고도, 마을 사람들의 아픈 곳을 만져줄 수 있는 소리통. 그래서 이 소리통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배고픈 이들을 먼저 생각한 ‘타인능해’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인 운조루. 운조루는 조선 중기에 지은 집으로 영조 52년인 1776년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55칸의 목조와가인 운조루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길게 자리를 한 행랑채의 좌측 끝에 ‘가빈터’ 혹은 ‘초빈터’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운조루에서 상이 나면 3일장을 지낸 후 이 곳에서 3개월 동안 시신을 안치했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이렇게 조상에 대한 예를 극진히 모신 운조루에는 ‘타인능해’라는 나무로 만든 통과, 역시 나무로 만든 쌀통이 있다. 타인능해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통 안에 든 쌀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이 더 취하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타인능해에 담긴 마음을 알려주고 싶다.

이 외에도 고택을 답사하면서 만나는 많은 것들. 그 특이한 것들을 돌아보면 더 없이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양평 창대리 고가의 '기와박공'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이 집에는 맞배집의 양편 지붕에서 내린 박공에 기와로 와편을 넣어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어떻게 기와를 잘라 박공을 와편박공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인지. 보기만 해도 옛 선조들의 미적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익산 조혜영 가옥의 '꽃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인 익산 조혜영 가옥은 함라읍에 소재한다. 이 마을은 담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조혜영 가옥은 1920년을 전후해 건축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안채와 별채, 그리고 모습이 바뀐 문간채만 남아있다. 이 조혜영 가옥에는 꽃담이 있다. 십장생 굴뚝의 문양을 본따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꽃담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집이다.


남원 덕치리 초가의 '동학날리'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는 전북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덕치리 초가가 있다. 이 집은 짚으로 지붕을 한 것이 아니고 억새인 띠풀로 지붕을 이른 집이다. 이 집에서는 보기드문 여러 가지를 만날 수 있어 즐거운 곳이다. 대문에 붙은 광 안에는 동학란 때 선조가 사용을 한 목창이 보관되어 있다. 창에는 흰 글씨로 ‘동학날리’라고 써 놓았다.

이 외에도 고택에서 만나보는 여러 가지 즐거움은 무수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집은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심성과, 우리의 온갖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옛집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언젠가는 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집안에 있는 이런 이야기를 엮은 책 한권을 내고 깊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굴뚝 이야기, 알고 보면 흥미롭다. 옛 고택 답사를 하면서 옛 집에서 보는 것들이 비단 굴뚝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굴뚝도 굴뚝이지만 옛 집에는,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볼거리들이 많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은 굴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굴뚝이 그냥 연기를 빼는 용도로만 사용이 되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굴뚝을 보면 나름대로의 형태에서 그 지역적 특색이나, 집 주인의 성품, 심지어는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왜 굴뚝에서도 그런 특색이 있다고 보이는 것일까? 물론 추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굴뚝이다. 아래는 속초 김근수 가옥의 담장 안에 연도를 뺀 굴뚝이다, 아마도 심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른 굴뚝의 형태

굴뚝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고 앞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굴뚝은 강원도 동해안 등 3 ~ 4월 심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굴뚝을 별도로 조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담장 안에 연도를 이어 굴뚝을 만든다. 굴뚝도 상당히 견고하게 쌓는 편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바람으로 인해 굴뚝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위는 경기 양평의 이항로 생가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전북 고창의 인촌생가의 낮은 굴뚝이며, 아래는 익산 가람 이병기 생가의 굴뚝이다. 내룍이라 그런지 굴뚝이 낮게 조성이 되었다.


서해안 인접 지역 역시 상당히 견고한 굴뚝을 조성한다. 이곳도 바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내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이 나타난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의 굴뚝이 화려하고 크다. 이렇게 화려하게 굴뚝을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의 고택들이 상당히 넓고,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굴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집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의 굴뚝들은 대개가 낮다. 집이 넓다고 해서 굴뚝을 높게 만들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그 지역의 특징이다.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은, 일기가 비교적 순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는 서천의 이하복 가옥의 굴뚝이다. 아래는 부여 민칠식 가옥의 굴뚝이다. 큰 집에 비해 낮은 굴뚝을 조형했다. 


가세에 따른 굴뚝의 형태

집안의 가세를 보려면 광을 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안채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상당히 큰 집들이 있다. 이런 경우 그 집의 굴뚝을 보면 상당히 높게 축조가 되었다. 바로 부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위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대표적인 선교장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경남 거창의 정온 생가의 굴뚝이며, 아래는 함양 오담고택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게 조형되었다.


또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든 집들을 보아도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만큼 많은 불을 땠다는 것이다. 많은 양을 불을 때려면 아무래도 낮은 굴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뚝의 형태는 단순히 불을 때고 그 연기를 뿜어대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200여 채 이상의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면, 굴뚝 하나에도 그 집안의 내력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서산 김기현 가옥의 굴뚝이며 아래 좌측은 전주 학인당의 굴뚝이고, 우측은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고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기 위한 조형물인 굴뚝.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고택의 몇 배를 더 답사를 하고나면, 나름대로 ‘굴뚝의 미학’ 정도 한 권쯤은 쓸 수 있지는 않으려는지. 그래서 고택답사의 발길은 늘 바빠진다.(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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