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란 참 기묘한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문화재를 답사할 때는, 가급적이면 철마다 한 번씩 찾아간다. 물론 일부러 철마다 찾아가는 곳도 있으나, 대개는 그 지역을 지나칠 때 들려가는 경우가 많다. 10월 29일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시민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곳 가까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가을마다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다. 가을경치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전 역시 여기저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고 북적인다. 경기전 안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 분위기 정말 좋아

가을에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답사일정을 많이 잡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아울리는 문화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철마다 왜 문화재의 모습이 그리 달라져 보이는 것인지. 그렇다고 문화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화재 주변의 경치가 달라지는 것이지.

29일 찾아간 경기전의 예종대왕 태실과 비도 마찬가지이다. 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은 형형색색의 단풍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냥 볼 때는 조금은 삭막한 석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지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문화재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도,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 주변에 단풍을 심을 수는 없을 테니,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문화재 중에 복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까?

태 항아리를 가져간 조선총독부, 좋아할 수 없는 이웃

이웃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일본은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 있다니,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웃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두 사람이 태실의 돌난간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마저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해주기만 한다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내판이라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여 땅에 묻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은 태를 묻은 곳이란 뜻이다. 예종대왕의 태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이다. 원래 이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묻었다가, 영조 10년인 173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태실이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근처에 방치가 된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결국 이 태실 안에는 예종대왕의 태는 없고, 그 태를 감쌌던 석조물과 비만 남은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태실과 비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화려하지 않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조성한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배가 부른 원통형의 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도탑의 형태이다. 난간은 두 개의 6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난간을 둘렀는데, 이음새 부분에는 문양을 한 받침돌을 놓았다.


석비는 태실과 함께 옮겨온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있고,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연대를 음각하였다.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의 얼굴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앞뒤로 새긴 용은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날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는 평범하게 조각이 되었다. 다만 거북의 귀갑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갈 것인가?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를 보면서, 이 가을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 태를 훔쳐다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단풍도 그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이별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만 같다. 물론 첫사랑에 성공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다 그 이전에 알게 모르게 청소년기에라도 이별이라는 것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 이별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혹자는 쉽게 이별을 하기 때문에 마음에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이별은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래도 한 때나마 생각했던 사람, 자신과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을 가져봤단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왜 유독 가을이면 생각이 나는 것을까?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사람들은 가을을 '분위기 있는 계절'이라고 한다. 분위기야 사람마다 잡기 나름이니 무슨 계절과 관계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유난히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 답사를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어찌보면 그 분위기 탓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같은 문화재라도 철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문화재가 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가을에 떠난 사람 때문인가도 모르겠다. 유별나게 가을을 좋아했던 사람.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하늘 높게 달린 재를 신바람나게 노래를 부르며 운전하며 올라가던 사람. 그리고 가을이 되면 술 한잔에 취해 세상 멋이 무엇인지를 알던 사람.

난 그 사람을 가을을 남기고 갔다고 늘 생각한다. 가을에 떠난 사람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정말 마음 속에 두었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계절이 되면 더 더욱 생각이 난다. 함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가끔은 지루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말없이 먼 길을 달려가고는 했다. '남자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죽은 인생'이라고 늘 버룻처럼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다.


"왜 가을엔 떠난 사람 생각이 날까요?"


스님께 물었다.

"가을이면 떠난 사람이 왜 더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나요?"
"예"
"그거야 가을이니까"


세상에 난 지금 선문답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 가을이면 떠난 사람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는데, '가을이니까'라는 대답이다. 그러더니 뒤이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가을에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죠. 그리고 계절이 가을이기에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이죠. 가을엔 모든 것이 떠날 준비를 하는 계절이죠. 만물이 그러하죠. 나뭇잎이 변하고 떨어진다는 것은, 곧 그것이 떠날 것이란 것을 의미하죠. 사람이나 세상사 모두가 떠날 때는 더욱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죠. 좀 추한 인간들을 빼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하게 되죠.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연인들이 가을에 가장 많이 이별을 한다고 하네요. 아마도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기에, 그 계절이 오면 당연히 생각나는 것이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에 더 많은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별의 계절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것일까? 그러나 가을이기에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왜 가을엔 사람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 스스로가 자연에 속해있기 때문이죠. 사람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사람과 자연은 상부하는 것이죠. 사람이란 것이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가을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만큼 가슴 아린 사랑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가을엔 떠난 사람은 더욱 마음 아플 수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사랑하던 사람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쪽이 마음 아파하면 저쪽도 이 가을에 마음 아파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아름답게 헤어진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모르겠다. 어렵다. 가을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이유가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미쳐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이 아플 때 그 사람도 마음이 아프다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은 마음 아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또 가을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생각조차 하지 말라니. 이 죽을 놈의 가슴 아픈 계절인 가을이.      
장애, 장애인, 그런 것들이 이들에게는 별로 닿지 않는 말이다. 광주 공연장에서 만난 유네스코 예술단의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난 그 많은 공연 중 단연 이 두 가지 공연을 잊을 수가 없다. 장애를 딛고 일어 선 인간의 위대한 승리. 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내가 이렇게 칭찬을 하는 이유는 장애는 결코 사람의 인생에서 덧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무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시각장애인들이 군무로 보여 준 '봄을 보러가자'는 무용이었다. 또 하나는 양퍌을 잃은 황양광의 '싱싱한 새싹'이란 무용이다. 이 두 가지의 무대를 보면서 내내 코끝이 징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시각장애를 이겨 내 마음으로의 춤

무대 한 편에서 지팡이를 든 사람들이 나온다. 머리에는 모판을 상징하는 소도구를 이고 있다. 그런네 이들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허리를 줄로 묶어 이었다는 것이다. 허리마다 줄을 묶고 있는 이들은. 하나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허리를 묶은 이 줄들은 서로의 체온이 전해져 한 사람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동작 하나하나를 이 줄로 느끼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동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줄은 이들에게는 생명의 줄인 셈이다. 봄을 보고 싶어하는 시각장애인들. 그들의 마음속에 염원을 닮은 무용이다.



이들은 이 줄로 모든 것을 느낀다. 동료의 마음을 느끼고 보이지 않는 봄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지팡이를 소고두로 삼아 무대위에서 움직이는 이들. 이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된다. 몸을 묶어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봄을 보러 가자. 아마 이들은 무대 위에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봄을 보았을 것이다.


  
두 팔을 잃은 최고의 무용수

두 팔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황양광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다섯 살 때 고압전기를 건드려 두 팔을 잃었다. 황양광은 두 팔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엔 아팠고, 다음엔 불편했고, 그 다음엔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지를 배웠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쓴 글씨를 보았습니다. 없어진 팔, 그 자리에서 희망이 새싹처럼 돋아났습니다. 하루가 고스란히 선물같기만 합니다.'

싱싱한 새싹은 황양광의 실제 체험을 무용으로 엮은 것이다. 황양광은 지게질을 하면서 모자를 돌리고 여기저기 새싹들이 대지를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봄을 노래한다.



장애는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장애를 딛고 훌륭한 예술인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이 두 가지 무대를 보면서 이들에게 장애란, 한낱 자신이 살아가는데 조금 남들보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뿐이다. 많은 세게의 장애인들에게 꿈을 주고 있는 유네스코 평화예술단. 그들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전북 남원시 도통동에 소재한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객산으로 힘이 센 교룡산을 누르고, 주산으로 힘이 약한 백공산을 복돋아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백공산 날줄기 끝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천년고찰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선원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과, 약사전, 대웅전, 범종 등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 들어있는 유명한 절이다. 이 고찰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작은 일주문 안으로 절집을 들여다본다. 한때는 30여채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곳이다. 범종각 앞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가을은 절집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다. 절집 안에 피어있는 가을꽃들이 이제 절정에 달했다




선원사는 돼지감자차를 생산하는 곳이다. 절집 여기저기에도 꽃들이 가을을 알린다. 그리고 수확을 하고 난 밭에도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을이 깊었음을 이야기한다.



밭에서 수확을 한 형형색색의 호박들이 정겹다. 그리고 이 고찰에는 봉춤을 추는 봉순이가 산다. 
우리나라 사람들 교통신호 잘 지키는 편일까요? 가끔 길을 나서면 교통신호 정말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빨간불인데도 눈치보면서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이고, 횡단보도에서는 사람이 건너고 있는데도 그냥 달려듭니다. 도대체 교통신호라는 것을 왜 만들어 놓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죠.

교통신호는 생명의 신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운전을 하는 일부 몰지각한 운전자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욕을 먹는다면 되겠습니까? 운전하시는 분들, 제발 교통신호좀 지켜가면서 운전하세요. 난폭운전, 이거 자신만 다치시면 말 안합니다. 그런데 죄없는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으니까 걱정이죠.  


신호 무시하고 달리는 아저씨, 이유인즉은

어느 길에 교통경찰이 신호위반, 과속 등을 계도하고 있다가 보니,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는 것이죠. 경찰아저씨 열 받아서 쫒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운전자 신호라는 신호응 아예 지키지를 않고 달려가는 겁니다. 결국 뒤쫒아간 교통아저씨에게 붙잡혔다는 것이죠.

"선생님 면허증 좀 보여주세요"
"면허증은 왜요?"
"교통신호를 위반하셨잖아요"
"제가 언제요?"

이쯤되면 교통경찰 아저씨 열받아 죽습니다.

"아니 지금 계속 신호위반을 하셨잖습니까"
"제가요?.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 빨간불인데 지나가셨잖습니까"
"아니 그거 왜 위반이죠?. 빨리가라고 해서 지나간 것인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빨리가라고 해서 빨간불 아닌가요?"

경찰아저씨 숨 넘어가십니다. 겨우 진정을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럼 황색불은 무엇인가요?"
"아 그거야 황급히 가라는 신호 아닙니까?"
"그럼 파란불은요?"
"그건 퍼뜩가라는 것이고요" 

이쯤되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럴 정도로 신호를 안지킨다는 것이죠. 빨간불은 '빨리가라', 황색은 '황급히 가라' 파란불은 '파뜩(퍼뜩)가라'라는 신호랍니다.

주말 오후 참 할일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생활문화랍니다. 주말 길 나서시는 분들, 교통신호 좀 잘 지키고 다니세요. 양파를 심다가 들어와 오후 모임에 갑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모임이 있어서요. 행복한 주말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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