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인 명재고택. 이 집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한옥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고택이다. 조선조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집으이다. 안채는 비튼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의 앞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튼 ㅁ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잘 정리된 앞마당에서 풍기는 멋

명재고택을 찾아가면 우선 집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바르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집 앞에는 네모나게 조성한 연못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샘이 있다. 주변 정리가 잘 된 앞마당은 너른 공지가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사랑채 옆으로는 장독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색다른 운치를 더해준다. 아마도 곁에 있는 집에서 전통 장이라도 생산을 하는가 보다.



사랑채의 우측 계단 위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당 역시 장독들과 잘 어울린다. 사당은 사랑채 우측으로도 오를 수가 있지만, 안채에서도 일각문을 통해 오를 수 있도록 동선을 조성하였다. 아마 사당에 제라도 올릴 경우, 부녀자들이 손쉽게 사당을 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 같다

열린 공간으로 조성한 명재고택의 사랑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열려 있다고 한다. 앞으로 펼쳐지는 마을을 향해 언제나 개방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윤증 선생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재고택의 주인인 윤증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자인, 호는 명재 혹은 유봉이다. 김집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송시열, 윤휴, 이유태 등 당대의 명현들과 함께 교분을 쌓았다.



윤증 선생은 등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면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증 선생은 이러한 벼슬을 모두 사양하고 한 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객을 해보아도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 이런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증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두 단의 높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정면 네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는 가운데 두 칸은 온돌을 놓고, 양편 두 칸은 마루방으로 조성하였다. 바라보면서 좌측은 높이 올린 누마루 방으로 조성하였는데, 사랑채 온돌방 앞에 놓인 툇마루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돌출을 시켰다. 우측의 마루는 시원하게 개방을 해놓았다.

옆을 판자문으로 마감을 한 명재고택의 사랑채는 놀랍다.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면 계단식으로 꾸민 건물에 툇마루를 통해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까지 이어진다. 사랑채를 보면서 좌측으로는 문간채로 이어지며,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러한 사랑채의 누마루 방은 문을 들어 올려 완전 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 한옥의 미학을 대표한다는 명재고택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다.  




대청 양편에 고방을 둔 안채의 겸손함

고방이란 고택에서 잡다한 살림살이나 곡식 등, 다양한 물건들을 넣어두는 작은 방이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고방 대신 광이라 불리는 창고를 여러 곳에 배치하였으나, 규모가 작은 집에서는 안방과 부엌 가까이에 고방을 설치하고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였다. 명재고택의 색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고방을 대청 양편에 두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꽤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명재고택에는 광채가 따로 없다. 이것은 윤증 선생이 허세를 부리기보다는, 주변에 민초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절대로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채는 북쪽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양편에 날개채를 달아냈다. 대청 양편 뒤쪽에는 양편에 고방을 두고, 대청의 서쪽에는 두 칸의 안방과 한 칸의 윗방을 두고 있다. 남쪽으로는 두 칸 넓은 부엌과 부엌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리고 대청 동쪽으로는 건넌방과 윗방 남쪽으로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채의 ㄷ자와 문간채, 사랑채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며, 대청, 누마루, 고방 등의 배치가 품위 있게 나열이 되었다.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 앞면에는 나무를 위로 질러 시렁을 낸 것도 명재고택의 특징이다. 그리 넓지는 않으나 그래도 조심스러운 집안 여인네들의 동선을 생각해, 이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꾸민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휴일이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명재고택. 아마도 이 고택에서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겸손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배어있는 명재고택을 쉽게 뒤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속초시 동명동에 소재한 보광사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사의 느낌을 받는 곳이다. 앞으로 20m 정도를 나가면 영랑호와 닿고,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사의 분위기를 맞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절은 예전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리라고도 전해지며, 골짜기 이름을 불당골이라도 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관음'이라고 각자를 해 놓았으며, 이 관음바위 위에서 '영랑스님'이 동해와 금강산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을 했다고도 한다.



소나무 숲길, 정말 명품이야

보광사 경내를 벗어나면 소나무 숲길이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숲길로 접어들면 온갖 산의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길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나무 뿌리들을 보아서도 이 숲이 어제오늘 조성된 숲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도 그리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걸어오르면, 어린 아이들도 따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는 한다.

산이라고 해도 그저 작은 소나무 동산 정도이다. 그 위로 오르면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바위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과 눈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다. 이 바위가 바로 영랑스님이 날마다 공부에 정진하던 '관음바위'라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커다랗게 '관음'이라는 글자를 각자해 놓았다.




이렇게 좋은 바위에 마애불 하나 있었다면 정말 제격이었을 것이다. 동해에 뜨는 해를 바라다보는 마애불의 자비스런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이 바위를 볼 때마다 나는 저 각자가 마애관음이란 생각을 한다. 아마도 마애불을 그리고 싶은 어느 사람이 그럴 수 없어 대신 글자를 새긴 것이나 아닌지.



콧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나무 길

바위 한편에는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듯한 자국이 보인다. 저 밑에 혹 삼존불이라도 모셔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음바위 위에 오르면 펼쳐지는 동해와 설악산, 그리고 금강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는 영랑호의 푸른 물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관음바위를 떠나 봉우리 위의 바위 밑을 통과한다. 흡사 석문과 같은 바위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사 저리 의지를 하고 믿고 살면 참 좋으련만. 한 20년 전에는 이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게 징을 두드려대고는 했다.




영랑호가 보이는 길로 접어든다. 몇 사람이 바삐 걸어 지나친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일까? 이 명품길이라는 소나무 숲길. 그리고 앞으로 펼쳐지는 자연경관. 이런 것을 어찌 그리 즐길 줄을 모르는 것인지. 그저 마음 바쁜 버릇은 어딜가나 볼 수가 있다. 괜히 나 혼자만 할일 없는 사람인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을 붙잡을 수 없으면, 세월을 타고가면 될 것을, 무엇을 그리 앞서려고 하는지.



그 길 끝에는 소나무 줄기에 흰 표식을 해놓았다. 숫자를 보니 1부터 10까지가 있다. 짧은 거리를 도는 곳이니, 이렇게 표시를 해놓고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하나씩 옮기는 것인가 보다. 괜히 몇 개를 한 편으로 밀어본다. 바쁠 것도 없고, 굳이 다시 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곳 나무 틈사이로 보이는 동해와 영랑호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까지 한 마리 소나무 가지에 앉아 시끄럽게 짖어댄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글마다 광한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광한루는 조선조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천경계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이라는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광한루는 1461년 부사 장의국에 의해 보수가 되고, 158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철이 광한루를 크게 지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유재란 불에 탄 사라진 것을, 인조 16년인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광한루원 전체는 명승 제33호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광한루만은 보물 제28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호남제일루'라 명성을 얻어

'호남제일루', 광한루는 그런 명성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누각이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누각을 말한다.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인 전각이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걷어 올려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인 날개채를 들였다. 주위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강한루.앞으로는 넓은 인공 정원과 인공 섬, 그리고 정자들이 서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 뒤집어 보기,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

누구나 광한루를 가면 그 누정에 올라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을 한 번쯤 흉내를 내보고 싶어한다. 한 때는 광한루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어째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는 공무원들의 사고에 의해서 멋대로 바뀌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출입을 시켰을 때는 문화재 보호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렇게 문화재 관리를 통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입장료 받고 광한루원에도 출입을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정작 광한루원은 돈을 받고 출입을 시키고, 광한루는 보존을 해랴하기 때문에 출입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광한루의 주추는 특이하다. 밑에는 네모난 덤벙주추를 놓고 그 위에 막다듬은 장초석을 올렸다. 다시 원형의 기둥을 놓고 누마루를 받치게 하였다. 일부는 장초석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동편에 붙여지은 날개채는 온돌방이다. 그런데 그 밑에는 네모난 장초석으로 받쳐놓고 있다. 그 날개채 밑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나 온돌방 밑에 있어야 할 아궁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돌 담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궁이만 볼 수 있어도 한결 문화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을 본다. 한편에서 보존이라는 허울아래 출입을 통제시키면서, 정작 온돌방의 밑 부분은 모두 돌담을 쌓아 막아버리다니.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다. 아마도 저 막아버린 돌담 안에는 한편을 높게 싼 아궁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광한루, 월궁의 선녀인 항아가 노닐만 하다는 곳. 그리고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던 곳. 그 무대 주변만 맴돌다가 결국엔 열어서 위로 붙들어 맨 창틀만 찍고 말았다. 느껴야만 하는 문화재를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단절시키는 이런 행위, 이것만이 정말 보존일까? 제대로 된 문화재 정책이 아쉽다. 어느 곳은 보물인데도 사람들을 출입시켜 더욱 마루가 반들거리고 보존만 잘 되던데...
그동안 지쳐버린 심신을 쉴 겸 바다가 보고싶어 속초로 향했습니다. 어제(토) 길이 얼마나 막히든지. 겨우 속초에 도착했을 떄는 이미 녹초가 되었다는 것이죠. 속초에는 명물거리가 있습니다. 영랑동 포장마차 촌이라는 곳이죠. 동해를 끼고 있는 이곳은 포장마차가 죽 늘어서 있는 곳입니다.

물론 밖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한 잔 할 수 있디고 하고요. 이 많은 집 중에 제가 잘 가는 곳이 있습니다. '당근마차'라는 이 집을 찾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털게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 아무나 못 먹어

털게탕은 쉽게 먹을 수가 없는것이, 그렇게 많은 양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집은 늘 털게탕을 먹으려는 분들이 들리는 곳이고, 주인의 솜씨가 칭찬할말 하다는 것이죠. 시원한 국물은 술 한 잔을 하기에도 아주 제격입니다. 그러나 하나 좀심해야 할 것은 털게 잘 드셔야 합니다. 털이 가시같다는 것이죠.

술 한 잔 하다가 답답하다 싶으면 바로 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속초 포장마차 촌이기도 합니다. 자주 갔던 곳인데 한 3년 넘어 찾아왔나 봅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사람이 늘었다는 것 밖에는. 아마도 토요일이라 그런 듯 합니다.



요즈음 양미리와 도루묵도 제철

다음 주부터 속초는 양미리 축제를 한다고 합니다. 시내 여기저기 걸린 현수막이 눈에 띠네요. 그 때까지는 못 있겠지만, 어제 양미리와 도루묵도 함께 맛을 보았죠. 도루묵은 알이 꽉 찬 것이 입안에서 자꾸만 끌어들이기도. 요즈음은 무엇인들 맛이 없겠습니까? 모처럼 맞은 자유가 입맛까지 돌아오게 했나봅니다. 

오늘은 동해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합니다. 그동안 오래 찾아보지 못한 곳이기에. 바람이 찹니다. 그런데 발길은 자꾸만 나가자고 하네요. 좋은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진을 환하지 않은 등 밑에서 폰으로 찍었더니 엉멍입니다. 아마도 한 잔 먹은 것을 알리는 듯. 속초 밤바다 하나 남겨 두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건 먼 또라이야' 하시는 분들. 저 또라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0.01%의 재벌님들꼐 3억을 요구합니다. 대한민국이 오늘 생긴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이 내일(지금은 토요일 11시 53분입니다)  겁나게 조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먼 정신병자가 감히 대한민국 재벌들을 향해 3억을 달라고 하느냐고.

그런데 말입니다. 0.01%의 재벌님들은 3억이 큰 돈입니까? 물론 큰 돈입니다. 하지만 사과상자 안을 가득채우면 한 10억쯤 들어갈까요. 그 반에 반만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왜 3억이 필요하냐고 묻는 분들께, 지금부터 3억에 대한 내력을 말씀 드리렵니다.

횡갯다리입니다. 표준말로는 홍교가 됩니다. 그러나 전 홍교보다는 횡갯다리가 좋습니다.


3억 산출근거는 이렇습니다

한 20년 넘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니, 그동안 쓸 돈이 이 정도였습니다. 1박 2일에 들어가는 답사비가 300,000원 정도입니다. 숙식비, 차비 등등 해서요. 한 달에 네 번 정도 답사를 나가면 1백 2십만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로 1박 2일과 2박 3일 정도를 돌아치면, 한 달에 약 2백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1년이면 2천 4백, 20년이면 4억 8천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답사를 한 자료는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의 한 30% 정도입니다.

이러다가보니 마음이 무지 바빠집니다. 이제 나이를 보니 앞으로 제가 답사를 할 수 있는 햇수가 약 5년 정도 잡습니다. 앞으로 매일 답사를 한다고 해도, 1,825일 정도입니다. 그동안 약 7,300일 정도에 30%이면 1,823일 정도면 매일 답사를 해보았자 25%정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합해도 55% 정도의 답사를 할 수 있습니다.


위는 미륵당입니다. 아래는 모악산 대원사에 있는 용각부도입니다. 

그 3억이 무엇을 주지?

 3억이 왜 필요할까요? 1박 2일에 300,000만원, 그러면 하루에 약 200,000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매일 답사를 나간다고 하면 3억 5천 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5년 동안 아플 수도 있고, 지쳐서 쉴 수도 있는 날을 제하면 3억이면 적당하단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일 정말로 누가 3억을 준다고 하면, 3억 대신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제 답은 하나입니다. 줄 것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달라고 하느냐고요. 문화재는 가치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 가치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문화재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말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1,000년 세월 풍상을 겪은 이 다리. 과학과 예술을 합한 멋진 농다리입니다. 

그냥 3억 주시면 됩니다. 그 다음에는 30억의 가치가 있는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대한민국 0.01%의 재벌님들에게 당당하게 3억을 달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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