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태로 춤을 춘다. 음악이 무대에 흐른다. 무대 위의 춤꾼은 그 음악에 맞추어 아름다운 몸짓을 한다. 10월 28일 오후 7시부터 2시간 동안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염주종합체육관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바로 ‘천수관음춤’으로 유명한 유네스코 평화예술단의 공연이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 공연은 2011 남도문화축제의 첫날 기념 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특별한 것은 출연자 모두가 청각 및 시각장애인, 혹은 두 팔을 모두 잃은 장애인들이라는 점이다. 이 중 ‘공작새 춤’이란 아름다운 춤을 춘 ‘타이리후와’ 역시 청각장애인이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

이날 많은 공연이 있었지만 특별히 이 공작새 춤에 눈길이 간 것은 춤을 춘 무희가 바로 중국장애인예술단의 감독이라는 점이다. 타이리후와는 중국인들이 뽑은 ‘가장 대중적인 무용수’ 1위에 오를 만큼 아름다운 춤을 추는 무희이다.

타이리후와는 두 살에 청력을 잃었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몸으로 표현을 하는 춤을 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춤을 열렬히 사랑한 타이리후와는 비록 음악은 듣지 못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 음악을 보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몸을 맡기고 한 마리 아름다운 공작이 되었다.




손가락 마디에서 표현되는 공작의 꿈

공작새 춤은 손가락의 마디로 이야기를 한다. 아름답게 표현되는 손가락 끝에서 공작새가 수도 없이 날아오른다. 공작새 춤은 타이리후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수단이다. 그리고 세상이 준 관심과 기회뿐만 아니라, 행운과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타이라후와는 지성과 상실함 때문에 뛰어난 무용수가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무용수가 무대를 꽉 채우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마디마디로 수도 없는 공작새들을 무대에 날려 보낸다. 그 공작새들이 타이라후와의 분신이 되어 무대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감동적인 무대, 그 무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주) 300m 렌즈를 갖고 삼층 위에서 촬영을 하다가 보니, 손가락을 크로즈 업 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진만으로도 타이리후와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전달될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러나 그 문화재들을 다 찾아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데만 무려 20년이 걸렸다. 참으로 긴 세월이다. 이런 긴 세월동안 난 길바닥에 서 있었다.

오늘 그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이 가을에 보여주고 싶은 곳들이 있다. 보여주기보다는 가본 곳 중 그래도 이 가을 날 한 번 쯤은 찾아주기를 바라는 곳이다. 이 문화재들은 모두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정했다. 다만 마애불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산 위에 있는 것을 소개하지만. 올 가을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찾아보기를 권한다.


(정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정자 무진정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고택) 기가 모이는 곳이라는 명성황후 생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10월 24일,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천연기념물) 작가들이 찾는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이맘 때 쯤이면 꼭 가보는 곳이 있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지나가던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애불) 제작시기가 분명한 함안 방어산 마애불

불교유적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데는 그 생김이나 재질, 모습의 특징 등을 보아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 그래서 불교유적의 제작시기를 대개는 몇 세기경이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불은 유일하게 그 제작연도를 새겨놓아, 통일신라 불상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널직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마애불.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 산중에 도대체 왜 오랜시간 공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 선 하나 하나를 파면서 스스로 피안의 세계를 그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방어산 마애불의 조성년대는 신라시대인 801년이다. 중앙에 본존은 약사여래이며, 좌, 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새겨 넣었다. 왼편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이며 오른편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그려진 여성상이다.


(산성) 태조의 어진을 피신시키던 위봉산성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석탑) 통일신라 석탑의 백미 정혜사지 석탑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에 소재한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 석탑. 이 탑을 본 순간 가장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도대체 이 탑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정혜사지 13층 석탑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 가운데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이러한 석탑의 형태는 우리나라보다는 동남아 쪽 탑사 비슷한 형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이 탑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 13층 석탑을 누가 조성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9세기 경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정혜사지 13층 석탑. 전국을 돌면서 수많은 석탑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의 석탑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정혜사지 13층 석탑을 볼 때마다 '누가 세웠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언젠가는 누구에 의해 그 비밀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남원 솔바람 길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공간인 문화충만. 이곳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라이브 음악감상도 할 수 있다. 라이브도 그냥 라이브가 아니라, 운 좋으면 판소리 한 바탕도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이 집에는 길냥이 한 마리가 40여 일 전에 들어왔다. 녀석은 어미를 잃고 혼자 발견이 되어 이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 그동안 달라져도 보통 달라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만 보면 장난을 놀자고 한다. 환경에 완전히 적응을 한 것인지.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장난을 치기 일쑤다. 아무나 사람들을 보면 장난을 걸기도 한다. 손이라도 내밀면 발라당 들어눕는다. 그래서 별명이 '발라당'이다. 메뚜기도 잡고 잠자리도 잡는다. 뒤에 숲이 있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냥이일 것이다.


공장난으로 하루를 소일하고

이 녀석 의자에 묶인 곳을 갖고 하루 종일 놀고 있다. 누워서 공을 잡고 흔들고 쫓아가고, 이렇게 혼자 잘 노는 녀석이 처음보았다. 자연에서 뛰어놀기 때문에 야생 길냥이의 습성을 갖고 았으면서도, 사람들만 보면 재롱을 피운다. 이 집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녀석이기도 하다. 사람을 보면 피하기도 하련만 일을 하는데 곧잘 방해를 놀기도 한다. 이제 3개월 정도가 된 길냥이 출신 '벌라당'.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바란다.


공을 갖고 혼자 노는 길냥이 출신 고양이 끼끼. 재롱을 부려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메뚜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메뚜기를 잡으러 다니는 끼끼. 녀석아 숨어도 다 보인다,

 

사람의 손만 닿으면 땅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리고 놀자고 발을 흔들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붙입성이 많아 누구나 귀여워한다. 인기 최고이다.

하루 종일 혼자서 공을 갖고 노는 끼끼. 공놀이가 싫증이 나면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자연과 벗삼아 놀고 있다.
 
아이폰으로 찍었더니 화질은 안 좋지만 참고 보시길...  
 

'사람에게만 달인이 있는 것이 아녀. 우리 같은 강아지들도 달견이 있는 것이여' 남원 선원사 절집 강아지 봉순이(원래 이름은 써니라는데 난 이 녀석을 늘 봉순이라고 부른다)가 일갈을 한다. 이 녀석 심심하면 쇠말뚝을 붙들고 춤을 추워댄다. 하던 짓도 멍석을 피면 안한다고 했던가? 봉춤을 추다가도 카메라만 가까이 들이대면, 바로 먼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기가 일쑤이다.

"어이~ 봉순이 봉춤 좀 한 번 추어보지"
"됐거든 아저씨"
"그러지 말고 한 번 추어봐"
"그럼 딱 한 번만이여라"
 

심심하면 철봉을 잡고 봉춤을 추어대는 봉순이

녀석 봉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댄다. 이제 4개월 째인 봉순이. 이녀석이 봉춤을 추면 사람들이 자지러진다. 다음에는 몰래 카메라를 하나 설치해 놓고, 동영상으로 찍어야 할 판이다.

잘 추다가도 사람들이 보이면 딴청을 하기 일쑤다. 녀석 숫기도 없어 갖고...
    




치사하기는 조금만 보여달라고 해도 딴 청이다. 그리고 놀아달라고만 조른다. 나도 그냥은 절대 안놀지. 봉춤 한 번 보여주면 놀아줄께

아이폰으로 찍었더니 화질이 별로이다. 그래도 머 봉순이 표장은 일품이라는^^
참 사람들이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이다. 그 중에는 한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몇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있다. 물론 혼자 몸이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여러 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 무엇이라고 할 것이 못된다. 그것도 그 사람의 팔자려니 하고 이해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다. 어엿하게 배우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딴 사람과 놀아나는 사람들 말이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될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상당한 숫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남편이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한 남자면 정말 사랑하는 것이겠지 하고 넘길 수가 있지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한 사람만 사귀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이런 사람도 두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명의 사람을 동시다발적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 두 명이나 된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상당히 많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두 사람을 보면 이성을 사귀면서 정 반대로 살아간다.

한 사람은 상대에게 물량공세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어디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몇 사람을 사귀고 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여성에게 많은 물질적 혜택을 입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남자를 사귀는 것일까?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은 적당히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딜 가는데 돈이 필요하다. 또는 무엇을 해야하는 데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 등등의 이유를 붙여 남자들에게서 돈을 타낸다. 그렇다고 이 집이 살기에 그리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즐기면서 남자들에게 물질적 도움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 남편들은 모르고 있을까? 

아마도 두 사람의 남편들도 자기의 아내가 그러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남편만 모른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슨 이유일까? 이런 것은 충분히 이혼의 사유가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그저 모르는 체 하고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방종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한 사람은 부부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그저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부인이 없는 곳에서 본인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저녁마다 남편을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데, 그런 짓을 버젓이 하고 다니면서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정말로 아무런 죄의식을 못 느끼고 사는 것일까?


드라마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참 묘하다. 하긴 요즘 막장 드라마들이 이런 생활을 오히려 온통 칠을 한 후 그럴듯 하게 포장을 해, 사람들이 알게모르게 그런 짓을 따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베우자가 다니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도, 모르는 체 넘어가는 사람들. 비단 여자뿐이랴 아마도 남자들을 예로 들면 더 많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여자인지 알면서도 만나는 남자들이다. 아마도 그저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 단지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를 풀기 위해 만나는 것은 아닌지. 세상 참 이제 갈때까지 간 듯하다. 이성 간의 사랑은 나눌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는 할까? 사랑은 그렇게 허접한 것이 아닐진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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